딸 둔 아빠들이 먼저 바뀌어야 ... 딸은 아빠 같은 사람 만난다
지난해 별내로 이사한 후 아내는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했다. 전공은 가족상담이다. 시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만학하는 아내의 가사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내가 주장해 식기세척기를 장만했다. 달랑 세 식구라 보통 저녁 식사 후 아내가 그릇을 세척기에 집어넣으면 아침에 내가 식사 준비를 하면서 꺼낸다.
설거지를 거드는 남편들이 많아졌다. 얼마 전 인터뷰한 유재흥 가농바이오 회장도 몇 년 전부터 설거지를 한다고 했다. 남자들이여, 설거지를 거드느니 식기세척기를 들여놓으라. 설거지가 그렇듯이 집안일은 요리 말고는 대부분 허드렛일이다. 식기세척기와 함께 건조기도 들여놨다. 세탁기 위에 올려놨다. 빨래는 20년째 내가 담당한다.
코로나 탓에 아내는 온라인으로 두 학기를 마쳤다. 얼마 전 회사에서 상을 받은 딸이 상금을 전액 엄마의 셋째 학기 장학금으로 내놓았다. 최근 줌으로 치른 큰처남 환갑 잔치 때 아내의 만학이 화제가 돼 내가 아내의 ‘딸내미 장학금’ 수령 사실을 전했다. 딸도 해외에서 줌 환갑잔치에 참석했다. 딸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지사에 근무 중이다. 다니는 종합상사에서 남녀 통틀어 창사 이래 최연소 주재원이다. 여자로서는 2호 주재원이라고 한다. 인사팀에서 지사 근무를 타진 받고서 결혼까지 미루고 응했다.
딸이 태어난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했다. 이로써 이른바 문민시대가 열렸다. 이름을 수민(秀民)이라고 지었다. 수는 돌림자로, 빼어난 백성이란 뜻이다. 여자로 살기 만만치 않은 이 나라에서 차별 없이 자라 여자사람으로서 행복하기를 바랐다. 아들인 동생과 차별하지 않고 키웠다. 무엇보다 부부 평등을 실천하려 애썼다.
딸이 초등학교 때의 일이다. 독서지도를 하던 교사에게 딸이 “저녁시간에 엄마는 소파에 앉아 있고 아빠는 빨래를 개켰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교사가 아빠가 정말로 빨래를 개켰느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친구 집에 다녀온 딸이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 일도 있다. 친구 아빠가 “신문 가져와라, 물 가져와라” 심부름을 시키더라는 것이다. 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한 번도 이런 심부름을 시킨 일이 없다.
한번은 아내가 초딩 딸에게 치마 길이가 너무 짧다고 한 후 나를 돌아봤다. 무언의 동의를 구한 것이다. 나는 “예쁜데 뭐”하고 말았다. 솔직히 말리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결론은 내버려 두자였다.
그래도 부모로서 유교주의적 가치관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딸은 성장한 후 명절날 자신은 음식 장만을 돕고 남동생은 설거지를 하게 했다고 불평했다.
4년 전 오키나와로 가족여행을 갔다. 일본지역학을 전공한 딸(맨 오른쪽)이 현지 소통을 담당했고, 처음으로 오른쪽에 운전석이 있는 차를 몰아봤다.
2019년 봄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홈페이지를 통해 실시한 서베이에 따르면 직장에서 성차별을 경험한 적 있다는 응답자가 전체의 83%였다. 여성은 87%가 성차별을 겪었다고 답했다. 여성 응답자가 들은 성차별적 발언으로는 “이런 건 여자가 해야지”, “여자 치고는 잘하네”, “독해서 승진한 거다”, “술은 여자가 따라야 제 맛이지” 등이 꼽혔다.
나는 신문사 시절 괜찮은 선배들은 직함 대신 형이라 불렀다. 가까운 취재원 중 일부 연장자는 선배라고 호칭했다. 남자가 대다수인 조직에서 남자가 남자 선배를 형 또는 형님이라고 부르는 일은 지금도 드물지 않다. 이런 호칭은 그러나 여성 구성원들에게 펜스로 작용한다. 여자는 남자 선배를 형으로도, 오빠로도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여자가 배울 게 많은 남자 선배와 친해지고 싶어 아무개 오빠라고 불렀다 치자.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성희롱·성차별뿐 아니라 이제 이런 남성 중심적인 조직문화도 바뀌어야 한다. 조직 차원에서 성차별적인 호칭도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체로 걸러낼 필요가 있다. 장기적으로는 여성 인재 채용에 장벽이 될 수도 있다.
여성 구성원들이 좌절하는 유리천장은 두 말할 나위 없다. 한 공기업 사장은 “요즘은 여자가 학업 성적이 더 뛰어날뿐더러 리더십도 남자보다 뛰어나다”고 말했다. 그는 성장기 남자들이 주로 게임에 빠지기 때문이라고 나름대로 분석했다. 어쨌거나 세상의 절반인 여성이 유리천장 탓에 외면하는 조직은 장기적으로 지속가능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딸은 아빠 같은 사람을 만난다. 주변을 돌아보면 다수가 그렇다. 심지어 아빠와 사이가 안 좋은 딸도 아빠 같은 유형의 남자를 배우자로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성장기 가정 폭력에 시달린 여자가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아이러니가 벌어진다. “장차 딸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남자는 좋은 아빠가 되어야 한다.” 딸 둔 남자 후배들에게 내가 사석에서 하는 말이다.
“대한민국은 남자가 최고의 스펙이다.”
2017년 생전의 노회찬 의원이 '<82년생 김지영> 대담회'에 참석해 한 말이다. 성차별적인 문화, 관습, 제도와 유형·무형의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 더 이상 남자가 스펙이 되지 않는 세상이 되려면 딸 둔 남자들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성 차별적인 조직문화를 바꾸는 데도 앞장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