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나는 한국기자협회 부회장으로 있었다. 그해 말 제주도 서귀포 칼호텔에서 기자협회 전국 시도지부장회의가 열렸다. 핵심 안건은 규약 상 당시 2년 단임제였던 회장에 대해 연임을 허용할 것인가 여부였다. 나는 이 회의의 사회를 봤다. 표결을 통해 민주적으로 연임을 허용하는 규약 개정이 이루어졌다. 문제는 현 회장에게 개정된 규약을 적용하느냐 여부였다. 나는 규약 개정 전 취임한 현 회장에 대한 소급적용은 불가하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일부에서 편파적으로 사회를 본다고 항의했다. ‘국민’이 원하면 소급적용도 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토론을 한 후 표결에 부쳤다. 현 회장에게 소급적용을 할 수 있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나와 갑장으로 친구로 지내던 회장과 그날 밤 통음을 했다. 나는 회장에게 “이제 당신이 자발적으로 연임을 포기하는 길밖에 없다”고 설득했다. 연임을 허용하는 규약 개정은 사실 일을 잘했던 회장의 지지 세력이 회장의 임기 연장을 염두에 두고 벌인 일이었다. 회장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오전 나는 서울 행 비행기를 탔다. 집에 도착할 무렵 회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연임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일부에서 나더러 회장에 출마하라고 했다. 출마할 뜻도 없었지만 내가 출마하면 연임하지 말라고 회장을 주저앉힌 나의 진정성이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나는 원칙주의자이다. 살아오면서 나름의 원칙을 세웠고 지키려 애썼다. 이상주의자는 사실 원칙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1979년 7월부터 35개월 간 공군 사병으로 복무하는 동안 나는 구타를 하지 않았다. ‘병영 폭력’이 일상이던 시절이었다. 나는 사랑의 매를 믿지 않는다. 폭력은, 휘두르다 보면 감정에 휩쓸리게 마련이다. 구타가 아니더라도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른다. 폭력의 재생산이다.
3년 반 만에 복학한 후 나는 학교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군 입대 전엔, 과장하면 어디 붙어 있는지 정도만 알 만큼 도서관과 친하지 않았었다. 성적이 나빠 취업을 하려면 남은 2년 동안 학점 관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복사꽃(복학생 4학년은 꽃) 시절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중앙도서관을 지켰다. 10시 넘겨 도서관을 나서 칠흑 같은 백양로를 걸어 내려갈 때면 하루를 충실하게 살았다는 성취감이 밀려왔다.
1983년 봄, 그 시절 학교 도서관은 시험 때가 되면 자리 잡기 경쟁이 치열했다. 그렇다 보니 자리 대신 잡아 주기가 성행했다. 집이 멀었던 나로서는 시험 때만 되면 새벽에 나서도 자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남이 잡아준 자리는 티가 났다. 자리 주인은 없고 책 한 권이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어느 날 안 되겠어서 그런 자리에 앉았다. 얼마 후 인기척이 느껴졌다.
“저어 … 자리 좀 ….”
여학생이었다.
“이거 … 댁의 책이에요?”
“아닌데요.”
“그럼 여기가 댁의 자린 아니군요.”
“…”
칸막이 너머 앞자리에서 남자의 얼굴이 쑥 올라왔다.
“그거 제 책인데요.”
“그 자리에 앉은 거 보니 여기가 댁의 자리도 아닌 거 같군요.”
주위의 시선이 얼굴에 와 닿았다. 나는 말을 건 여학생에게 말했다.
“휴게실 가서 잠깐 얘기 좀 할까요?”
남학생이 따라 나왔다.
“거두절미하고, 먼저 온 사람이 나중에 온 사람한테 친구의 책이 놓여 있다고 해서 자리를 양보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일찍 와서 자리를 잡아주신 친구 분도 그 자리에 대해선 아무 권리가 없다고 보는데요.”
“…”
여학생은 내게 오늘 시험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다음 날부터 시험이었다.
“전 오늘 시험 봐요. 4교시인데, 그때까지 제가 앉았다가 시험 보고 와서 자리를 내 드리면 안 될까요?”
“…”
옆에 선 남자가 무언의 눈빛으로 동의를 구했다. 자리로 돌아와 가방을 챙겼다. 돌아서는 내게 등 뒤의 여자가 말했다.
“이따가 꼭 오세요.”
더 일찍 나선 다음 날 아침 나는 학교 정문에서 꼬부라져 에스 자로 이어진 줄 한가운데 서 있었다. 학생증 검사대를 통과한 나는 비호처럼 날아 지하 열람실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저기서 친구 자리를 잡기 위해 책을 내던지는 소리가 어지러웠다.
“아아~ 염세, 염세 ….”
80년대 초 대학에선 친구 위해 도서관 자리 대신 잡아주기가 성행했다. 이 편법 탓에 시험 때면 도서관에 일찍 가도 자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연세춘추>에 이 부당한 경험을 투고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학내 신문인 <연세춘추>에 투고했다. ‘우리들의 짧은 이야기’란 컷을 달아 ‘염세인’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얼마 후 미지의 사람에게서 편지가 날아들었다. 겉봉엔 ‘빛고을에서’라고 적혀 있었다. 광주에서 한 여학생이 보낸, 우기면 팬 레터였다. 그 시절엔 학보를 다른 학교 친구에게 보내주는 문화가 있었다. 도서관에서 대신 자리를 잡아주는 것이 어느 대학이나 익숙한 풍경이다 보니 이 짧은 이야기에 공감을 했던 것이다.
학내 집회가 열리면 어쩌다 시위대가 도서관 로비를 점거했다. 로비에서 노래를 부르면 전 층에 울려 퍼졌다. 도서관에 있던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가방을 쌌다. 시위대가 로비를 점거한 어느 날 나는 도서관의 높은 사람을 찾아갔다. “대학의 심장인 도서관이 시위로 멈춰 서게 방치해서야 되겠느냐”고 따졌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한 마디 했다.
“총장도 못하는 일입니다.”
나는 “총장은 말 못해도 도서관 근무자라면 나가 달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다그쳤다. 돌이켜보면 1980년대 전반의 대학 캠퍼스에선 또라이 같은 행동이었다.
신문사에 들어간 후로는 일절 촌지를 받지 않았다. 그러느라 촌지를 제공한 취재원 측과 여러 번 실랑이를 벌였다. 신문사 시절 나는 단골식당이 없었다. 취재원이 “어디로 갈까요” 했을 때 무심히 단골식당이 입에서 튀어나와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 선배는 회사에 있다가 어쩌다 혼자 밥을 먹게 되면 손님이 별로 없는 식당에 간다고 했다. 매상을 올려주기 위해서였다. 그의 이름은 조시행. 편집기자였던 선배는 조선일보가 1986년 11월 17일 김일성 사망 오보를 했을 때 고집을 부려 중앙일보의 오보를 막았다.
그날 조선일보는 “김일성이 열차를 타고가다 총 맞아 피살당했다”는 내용의 호외를 발행했다(이 오보는 정운현의 <호외로 읽는 한국 현대사>에 ‘김일성 사망’ 오보 소동으로 수록됐다). 이튿날 1면 탑 기사 제목은 ‘김일성 피격 사망’이었다. 당시 나는 조선일보 출판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다음 날 조선일보는 이렇게 1면 탑의 제목을 뽑았다.
‘김일성은 살아 있었다’
이 비겁한 제목을 두고 나는 부장과 격론을 벌였다. 이 제목의 과거시제에서는 이런 뉘앙스가 느껴진다.
‘우리가 오보를 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김일성은 당시에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알 수 없는 일이죠.’
나는 조선일보가 김일성 사망 오보를 한 이듬해 중앙일보에 입사했다. 그 후 우연히 당시 중앙일보가 실은 기사를 보게 됐다. 석간이었던 중앙은 1면 탑 기사에 각각 ‘김일성 피살설’(17일자), ‘김일성은 살아 있다’(18일자)라고 제목을 달았다. 조 선배가 단 제목이었다. 이 제목으로 그는 기자로서는 가장 영예로운 상인 기자협회가 주는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나는 조 선배와 식사를 하면서 당시 이야기를 들어 봤다. 그 시절 중앙일보는 삼성그룹의 일원이었다. 그래서 이른바 재벌 신문으로서의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단적으로 결정적인 때 치고 나가지 못했다. ‘피살설’이라는 제목을 둘러싸고 편집국 안에서 말이 많았다고 한다. 조 선배는 이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김일성이 죽었다고 기사를 고쳐오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누구도 김일성의 사망을 단정할 수는 없었다.
밖에서 점심을 한 편집국장이 가판대를 훑어본 후 전화를 걸어 조 선배를 찾았다.
“이 봐, 조시행씨. 김일성 피살에 ‘설’자를 꼭 달아야 해?”
“달아야 합니다.”
이 원칙주의자 덕에 중앙은 대형 오보를 피할 수 있었다. 김일성은 그로부터 8년 후인 1994년 여름에 사망했다.
나는 중앙일보 시절 노동조합 상임집행위원을 맡았다. 한때 몸담았던 중앙경제신문이 경영 논리로 문 닫을 땐 비대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당시 노보에 “현재 중앙경제신문에 몸담고 있다는 이유로 구조조정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고 실명으로 투고를 했다. 노보 편집장으로 있던 후배가 익명으로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지만 뿌리쳤다. 정작 노조 위원장으로 있던 선배가 이 대목을 들어내고 투고 글을 실었다. 이 건으로 노조 사무실에서 그와 격한 대화를 나눴다. 위원장은 발행인으로서 글을 손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는 발행인도 조합원 기고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고 반박했다.
나는 10여 년 간 기자협회 간부로 있었다. 그 기간에 기자협회보 편집인,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이사도 지냈다. 한국언론학회에선 현업 이사를 시차를 두고 두 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