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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필재 Sep 30. 2020

24. The show must go on

정치도 언론도 국민 수준 ... 언론은 지속되어야 한다

 프리랜서 시절 포함해 지난 30여 년 나는 기자로 살았다. 언론학도 시절로 소급해 올라가면 40여 년 간 언론은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 인자였다. 기자생활 후반 20년 가까운 세월 나는 기자 및 기자 지망생, 언론학도들을 가르치는 일을 병행했다. 요즘은 언론인으로서의 활동보다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더 큰 비중을 둔다. 지난 9월 중순 한국잡지교육원을 수료한 제자는 이런 수강 후기를 남겼다. 

“아, 저희에겐 탈곡기(?) 같은 시즌이었던 것 같습니다. 매일 새로운 실습의 폭풍이었고, 그 자체가 도전이었어요. 하지만 그 시절이 있었기에 취재와 인터뷰를 겁 없이 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나라면 이렇게 문장과 표현을 바꾸겠어”라며 꼼꼼하게 기사를 손봐주셨고 그 뒤로 ‘그래 이렇게 바꾸는 게 더 나은 선택이 아닐까?’ 하고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정말 중요한 자기 점검의 태도를 배웠습니다.”

나는 기자, 기자 지망생, 언론학도 등을 상대로 20년 가까이 인터뷰 방법론 등을 강의한다.  한 제자가 남긴 수강 후기. 


 기자가 되려는 취준생들에게 나는 "The show must go on"을 외친다. ‘위기의 언론’이지만 이 쇼는 지속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려면 누군가 쇼 무대에 올라야 한다. 언론이 시계 0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지만 콘텐츠를 이기는 플랫폼은 없다. 

 ‘The Show Must Go On’은 1991년에 나온 영국 록 밴드 퀸의 마지막 앨범 마지막 곡이기도 하다. 에이즈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던 퀸의 리드 보컬 프레디 머큐리는 이 노래를 녹음할 때 보드카 한 잔을 입에 털어넣고 부스에 들어가 성대를 학대하듯이 불러 한 번에 녹음을 마쳤다고 한다.      


Show must go on

쇼는 계속돼야만 해

I'll face it with a grin

웃으면서 대면하겠어

I'm never giving in

난 굴복하지 않아

I'll top the bill, I'll overkill

주연이 되어 제압하겠어

I have to find the will to carry on

앞으로 나아갈 의지를 찾겠어    

 

 정치의 수준은 그 나라 국민의 수준이라고 하지만 언론의 수준도 국민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본다. 정치와 언론의 공통점은 전형적인 내수산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국제 경쟁력의 무풍지대이다. 해외 언론 자본이 국내에 진출하더라도 언론 종사자는 국내에서 충원할 수밖에 없다. 퇴임한 미국 대통령 오바마를 국내 정치판에 출장시킬 수 없듯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특종 보도했고 트럼프 대통령과의 열여덟 번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최근 <격노>를 출간한  밥 우드워드를 한국 언론이 수입할 수는 없다. 이 언론계의 ‘살아있는 전설’이 제안에 응하지도 않겠지만. 

 80년대 후반 언론민주화 운동 이래 한동안 기자사회라는 말이 회자됐었다. 기자사회는 기자들의 레퍼런스 그룹이다. 소속사를 떠나 기자들은 기자사회의 눈을 의식했었다. 언론이 자본에 포획된 후 기자사회는 죽은 말이 됐다. 언론민주화운동은 언론운동으로 불리다 그마저도 자취를 감췄다. 기자들은 샐러리맨으로 전락한 지 오래고 기레기 소리를 듣는다. 디지털과 자동화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한 언론은 사양화됐다. 3D를 넘어 4D 업종이 됐다. 3D에 드림리스 샷 추가. 기자들이 언론을 떠나고 있다. 

 그 덕에 정치를 하기 위해 기자가 되려는 가수요가 떨어져나갔다. 사실 기자와 법률가는 머리 좋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그보다 상식과 직업의식이 중요한 직업이다. 어느 면에서는 그동안 너무 머리 좋고 오버스펙인 사람이 들어와 물이 흐려졌었다. 언론이라는 무대에 오르고 싶은 사람들이 기자가 되는 시대가 비로소 열렸는지도 모른다.    

 나는 개신교 모태 신앙이다. 나의 종교적 정체성이다. 나는 “기독교인은 예수의 가르침을 자신의 인생관·가치관으로 받아들인 사람”이라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는 나와의 인터뷰에서 “지나치게 보수적인 교회는 차라리 없어져야 한다”고 강변했다. 나 역시, 단적으로 전광훈 목사가 이끄는 교회는 존재 자체가 민폐라고 생각한다. 한번은 이름을 대면 알 만한 강남의 문제적 대형 교회 앞을 지나는데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라고 쓴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내 눈엔 이응 받침 탈락 같았다.   

“하나님이 당하셨습니다”

 김 교수는 “교회가 없어도 기독교 정신이 살아 있으면 된다”며 “예수님도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나는 이웃 곧 타인을 사랑하는 게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타인의 범위를 인류 공동체로 확장한 사람이야말로 하나님만큼이나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 시대를 맞아 이제 그 범위를 모든 피조물로 확장하라는 게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나 역시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의 일원인 피조물이다. 내가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인다. 내가 사는 이유는 그분에게서 생명을 부여받아서이다. 생명은 상황이 어떻든 타인과 함께 살아가라는 지상명령이다. 어떻게 살 건지는 예수가 전 생애를 통해 말과 행동으로 보여줬다. 

 기독교 신자로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는 건 어떤 구실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동성애에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나 역시 동성애를 바라보는 게 불편하다. 기독교 신자라기보다는 내가 생물학적 성과 성정체성이 일치하는 이성애자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 나는 한 트랜스젠더와 인터뷰했다. 유명 트랜스젠더 하리수로 인한 착시로 인터뷰 전 나는 막연히 그에 대해 여성적인 용모를 떠올렸었다. 성인이 되고 난 후 성전환 수술을 한 그의 얼굴 골격은 그러나 완연한 남자였다. 성 정체성이 여자였던 그는 수술하기 오래 전부터 여장을 했었다고 말했다. 가족이 제일 먼저 등을 돌렸고 결국 집을 나와야 했다. 남자들과 한때 교제도 했었다. 여자인 줄 알고 접근했다 그가 남자인 것을 안 남자들은 돌아섰다. 내가 인터뷰했을 땐 나이가 많은 어떤 독일 남자와 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남자인 것을 알고도 떠나지 않은 그 남자에게 충만한 성적 만족감을 안겨주기 위해 수술을 했다고 말했다.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그는 단지 동성인 남자를 사랑하도록 태어났을 뿐이다. 

 이 말은 1974년 성추행 혐의로 기소됐던 영국의 동성애자 조지 몬타뉴가 2016년 BBC와의 인터뷰에서 한 것이다. 

"남자를 사랑하도록 태어났을 뿐, 그가 (용서받아야 할) 무슨 죄를 지었는가?"

 그가 이날 언급한 사람은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잠수함 암호기 에니그마의 암호 시스템을 해독해 종전을 앞당기는 데 기여한 튜링은 3년 전인 2013년 동성애 범죄에 대해 영국 왕실로부터 사면을 받았다. 1954년 41세에 청산가리가 든 사과를 먹고 극단적 선택을 한 지 59년 만이다. 자살하기 3년 전 그는 동성애 혐의로 체포됐고 화학적 거세 치료 등을 둘러싼 논란에 휩쓸렸다. 그의 사면을 계기로 발의된 치안범죄법 개정안 일명 튜링법이 통과돼 2016년 과거 동성애죄로 처벌받은 수만 명의 영국 남성이 한꺼번에 사후 사면을 받는다. 94세가 된 몬타뉴는 이날 BBC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무 죄가 없다. 이 사면을 받아들이는 것은 죄를 지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 이래 가장 사랑받는 19세기 영국 최고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도 동성애 행위로 고소 당해 투옥됐고 파산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작은 성실함은 위험한 것이며, 과도한 성실함은 치명적이리만큼 위험하다.” 

 나는 설사 동성애가 죄라 하더라도 동성애자를 정죄할 마음이 없다. 이들을 죄인이라고 혐오하고 차별하기보다 하나님의 처분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다.  

 지식인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은 진보다. 기자 출신인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는 최근 한 신문 칼럼에 “거대한 불공정에 분노하라”고 썼다. 진정 분노해야 할 대상은 교육 제도, 부동산 제도, 개혁 대상인 검찰·언론, 기득권 옹호센터가 된 일부 개신교단, 삼성 재벌 등인데 기득권 동맹 탓에 국민 상당수가 추미애와 조국의 부모 찬스라는 상대적으로 작은 불공정에 분노의 포화를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수 언론과 검찰이 주도하는 불공정 프레이밍으로 분노에 대한 우리 사회의 균형 감각이 기울어져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김수영의 시에 빗대 한국 사회의 분노는 왜 여전히 조그마한 것으로만 향하는가 묻는다.  

 “과정은 공정할 것”이라고 한 3년여 전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는 검언 주도 프레이밍 과정에서 분노의 균형추를 옮기는 데 악용되고 있다. 집권 세력의 불공정은 마땅히 비판의 대상이다. 하지만 작은 불공정에 시선을 빼앗겨 기득권 동맹의 큰 불공정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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