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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필재 Feb 22. 2021

33. 생명을 들이는 건 이별을 준비하는 것

생명은 다른 생명에게 반려 같은 존재 ... 반려동물 주인 잘 만나야

 온유가 갔다. 온유는 열 살 된 흰색 단묘종 믹스 암코양이다. 우리가 함께 살다 딸내미가 독립하면서 데려갔는데 딸이 해외지사 근무를 하게 돼 잠깐 귀환했었다. 그 후 두 달여 만에 딸의 남자친구 집으로 보냈다. 두 사람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길 기대하면서 떠나보냈다.   

 딸은 해외에 데려가고 싶어 했었다. 항공사 측에서 고령이라 리스크가 있다고 해 포기했다. 딸은 그곳에서 현지 고양이를 입양했다. 9개월 후 귀국길에 이 녀석을 데려오면 늙은 온유가 이 젊은 것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함께 살 때 딸은 온유를 안고 내게 와 “온유야, 아빠다” 하곤 했었다. 그럼 나는 “너 같은 딸내미를 둔 일이 없네”라고 받았다. 나는 반려동물에게 거액의 병원비를 들일 생각이 없다. 아빠라고 해 놓고 치료를 안 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온유와 함께 한때 우리는 시추종 반려견 시온이를 키웠었다. 해외여행을 하게 돼 춘천 처제네 맡겼다가 아예 처제네 식구가 돼 버렸다. 시온이가 그 집에서 더 행복해 할 거 같아 우리가 양육권을 포기했다. 본래 시온이를 명절 때 대구의 처가에서 만나 인계 받기로 했었다. 이때 시온이에게 관심을 보인 처가 식구들은 그 후 푸들종 보미를 입양했다. 반려견을 키울 맘이 없던 처남댁은 지난 설에 양 같은 보미에게 한복을 직접 만들어 입혔다. 

 강아지와 고양이는 참 다른 동물이다. 온 가족 해외여행 때 온유는 두고 시온이만 처제네 맡긴 건 개는 식욕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믿거나 말거나, 개는 “자기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주인이 위대하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주인과도 밀당을 하는 고양이 버전은 이렇다. 

“먹을 것과 잠자리를 집사사람에게서 제공받는 나는 위대하다.”

 온유는 '자폐 고양이' 같았다. 10년을 키웠는 데도 때로는 데면데면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 1967년 봄 왕십리 전셋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키우던 개를 데려왔다. 내 기억 속의 첫 반려견이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 이 녀석이 홍역을 앓았다. 밤이면 신음을 해 주인집 할머니가 싫어했다. 어느 날 밤 아버지가 이 개를 내다버렸다. 이 일로 나는 아버지와 일주일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동물보호 및 복지도 선진국인 스웨덴은 반려견 의료보험 가입률이 80%로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그래서 반려견이 중병에 걸려도 치료비 걱정을 하지 않는다. 생후 4개월 이전에 반드시 농림부에 ID 등록을 해야 해 유기견도 별로 없다고 한다. 6시간마다 산책을 시켜야 하고, 혼자 오래 두어서도 안 된다. 생후 8주까지는 어미와 떼어 놓을 수 없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작은 동물원에 데려갔었다. 다른 동물들처럼 대형견인 골든 리트리버가 우리에 갇혀 있었다. 우리 속 개를 처음 본 아이들이 ‘동물 학대’라고 말했다. 주인과 떨어진 강아지를 길에서 발견해 파출소에 데려갔을 땐 경찰들이 난감해 했다. 

 그 후 회사 선배가 자기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를 데려다 키워보라고 했다. 윙키는 지랄견 수준은 아니었지만 부산스런 강아지였다. 여름에 거실에 요를 깔면 신이 나 그 위에서 뛰어놀았다. 아내가 질색을 했다. 그럼 내가 악역이 되어 윙키를 쥐어박곤 했다. 쥐어 박히고도 손짓을 하면 다시 다가왔다. 

 결국 윙키를 돌려보냈다. 아이들이 울고불고했지만 나는 냉정하게 물었다. 

“엄마를 선택할래? 윙키를 선택할래?”

 선배 집에 데려다주러 가는 길에 윙키는 뒷자리 차 시트에 오줌을 쌌다. 어린 것이 얼마나 불안했을까? 

 그 후 고슴도치를 키웠다. 숨진 새끼 고슴도치를 아들과 함께 손바닥만 한 집 앞 공원에 묻은 적도 있다. 생명을 집에 들인다는 건 이별을 준비하는 것이다. 

 산책 길에 아파트 단지에서 마주친, 반려견 셋을 키우는 이웃은 양육노동을 힘들어 했다. 전원주택은 잠깐 방문한 남의 전원주택이 좋듯이, 반려견도 어쩌면 남이 키우는 녀석이 나은 건지도 모른다. 

 아내는 다시 반려견을 키우고 싶어한다. 지금은 반려식물로 만족하고 있다. 녹지가 많은 별내는 사실 반려견을 산책시키기에 좋은 동네다. 코로나19가 일깨웠듯이,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에게 반려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스웨덴 사람들은 반려견을 사람과 동일한 감각과 감정을 지닌 존재로 인식하고 존중한다고 한다.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옛말이 있지만, 반려동물이야말로 주인은 물론 ‘조국’을 잘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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