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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필재 Mar 09. 2021

30. 남성도 남성으로 길러진다

남자에게 남자다우라고 강요하는 '맨박스' ... 남자도, 울어도 된다

 나는 영화와 드라마를 보다 걸핏하면 운다. 젊었을 때부터 그랬다. 나의 아이들은 어렸을 때 함께 TV를 보다 아빠가 눈물을 흘리겠다 싶은 장면이 나오면 나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아빠 또 운다”고 놀려댔다. 요즘은 누군가 흐느끼는 장면만 봐도 눈물이 난다. 대화 도중 갑자기 울컥할 때도 있다. 나이가 들면서 남성 호르몬이 줄어든 탓도 있을 듯싶다. 아내는 현실 세계에선 냉정한 사람이 픽션을 보고 운다고 핀잔을 준다. 

 남자는 평생 세 번 운다는 말이 있다. 막 태어났을 때의 고고지성,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리고 나라가 망했을 때. 가부장주의에 중독된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다. 미국의 한 심리치료사는 2015년 워싱턴포스트에 실은 칼럼에서 “남자는 울면 안 된다”고 남자아이를 다그치는 것이 우울증, 폭음 등 일생에 걸친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눈물이라는 자연스러운 감정 반응이 차단당하면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 스스로를 억압한 채 성장하기 때문이다. 여성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여성으로 길러지듯이 남자도 태어난 후 남자로 길러지는 것이다.

 미국의 교육자이자 사회운동가인 토니 포터는 자신의 저서 <맨박스-남자다움에 갇힌 남자들>에서 남성들은 남자다움을 집단적으로 배워왔다고 주장했다. 대다수의 남성들이 집단적인 강요를 통해 남자다움의 정의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남자를 둘러싼 이 고정관념의 틀을 ‘맨박스’로 규정하고 이를 깨뜨려야 한다고 역설한다. 

 맨박스는 남자들로 하여금 남자답지 못하다는 공격을 막기 위해 감정의 가드를 한껏 올리게 만든다. 가드를 내리고 감정에 충실했다가는 자신을 제대로 통제 못하는 나약한 남자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에 복학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학교 화장실에서 한 앳된 남자와 마주쳤다. 왜소한 체구에 도리구찌 모자를 쓴 그의 행색은 어쩐지 게이스러웠다. 그때 내 안에서 올라오는 감정이 있었다. 남자답지 않은 남자를 응징하고픈 폭력에의 유혹-일종의 폭력성이었다. 

 포터는 착한 남성들이 폭력적인 남성들을 대놓고 지지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무언의 합의에 따라 그들의 행동을 묵인할 뿐이다. 그는 남성들 사이에서 합의가 이루어진 묵시적 규범이자 기대치, 남성들의 행동과 생각을 제한하는 모든 규범이 맨박스 속에 뒤엉켜 있다고 설명한다.

 무엇보다 맨박스는 남자에게 남자다우라고 강요한다. 남자다움의 기준에 미달하면 ‘고자’ 취급을 당할 수도 있다. 최악은 ‘계집애’ 소리를 듣는 것이다. 왜곡된 남자다움 또는 남자의 허세이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남자는 여자처럼 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이 유혹의 뿌리였다. 

 포터는 착한 남성들이 폭력적인 남성들을 대놓고 지지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무언의 합의에 따라 그들의 행동을 묵인할 뿐이다. 그는 남성들 사이에서 합의가 이루어진 묵시적 규범이자 기대치, 남성들의 행동과 생각을 제한하는 모든 규범이 맨박스 속에 뒤엉켜 있다고 설명한다.

 무엇보다 맨박스는 남자에게 남자다우라고 강요한다. 남자다움의 기준에 미달하면 ‘고자’ 취급을 당할 수도 있다. 최악은 ‘계집애’ 소리를 듣는 것이다. 왜곡된 남자다움 또는 남자의 허세이다. 

 나에겐 두 가지 불안이 있다. 하나는 언젠가 앞을 못 볼지 모른다는 실명 공포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안경을 썼다. 안경 쓴 아이가 한 학년에 한두 명이던 시절이다. 어느 날 아버지와 동네 목욕탕에 갔는데 시력검사표가 벽에 걸려 있었다. 아버지가 한번 읽어 보라는데 제대로 읽지 못했다. 처음 쓴 안경은 안경점에거 권한 나비안경이었다. 여자 안경이라고 놀림 당했다. 반세기 넘게 안경을 썼고, 나이 마흔에 백내장 수술을 받다 보니 실명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가 있다. 또 하나는 실직 공포다. 정년퇴직한 지 8년째인데 지금도 일자리를 잃는 꿈을 꾼다. 실직에 대한 두려움은 남자로서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짓누르는 탓이 크다. 

 왜곡된 남자다움의 강요는 남자를 무너뜨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왜곡된 여자다움을 학습해 여자에게 부당한 여자다움을 요구하게 만든다. “어디서 여자가” 하는 남자들의 편견은 기질적인 여성다움과도 거리가 멀다. 맨박스는 말하자면 성차별의 온상이다. 남자의 여성차별 의식은 맨박스의 거울 이미지다. 

영화 <파이란>의 최민식이 연기한 강재는 싸움 실력은 없고 사람만 좋은 찌질한 건달이다. 이 3류 양아치는 돈 때문에 위장결혼한 중국 여성 '파이란'(장백지 분)이 한 줌의 재가 되기 전 자신에게 남긴 편지를 읽다 오열한다.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로 친절하고 고맙댄다..근데..씨발 나보고 어뜩하라고..! 송장으로 나타나서 어뜩하라고!!" 영화를 보다 나도 오열했다. 


 남자도 때로는 우울할 수 있다. 힘들 땐 힘들어 해도 괜찮다. 남자라고 센 척하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남자도 슬프면 눈물을 흘릴 수 있다. 남자가 눈물을 흘리는 건 여자가 그렇듯이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것이다. 신부이자 작가인 헨리 나우웬은 “우리가 사랑하고자 한다면 거기에는 많은 눈물이 있을 것”이라고 썼다. 이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시대에 어찌 연민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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