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의 저주' 노인빈곤 ... 젊은 세대는 주거비에 치인 '소작농'
1960~70년대 우리나라 고도성장의 핵심 요인으로 학자들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실현한 이승만의 토지개혁을 꼽는다. 당시 남한 인구의 70%는 농민이었다. 그 중 60%가 소작농이었다. 이들을 정치 기반으로 삼기 위해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사회주의자 조봉암을 초대 농림부 장관에 기용했다. 조봉암은 지주세력을 압박해 소작농에게 농지를 유상분배하는 토지개혁을 밀어붙였다. 농민들은 높은 소작료의 부담에서 벗어나 삶이 안정됐다. 경제적 안정은 교육 수준 향상으로 이어졌고 ‘개천에서 용이 나는’ 계층 이동이 시작됐다. 반면 북한은 말만 무상분배일 뿐 농민에게 경작권만 줘 이들을 소작료 대신 높은 현물세를 내는 국가의 소작농으로 전락시켰다.
큰아이가 대학에 진학할 무렵 나는 정년퇴직을 바라보고 있었다. 젊었을 땐 무심했지만 55세 정년은 너무 일렀다. 자녀의 대학 등록금을 회사에서 지원했기에 웬만하면 아이가 재수하지 않기를 바랐다. 아이는 재수를 했고, 나의 퇴직 후 학자금 융자를 받아 대학을 다녔다. 남은 융자금을 아이는 지난해 회사에서 받은 포상금으로 청산했다. ROTC를 한 둘째는 지금 중위 월급으로 융자금을 갚고 있다.
기자를 양성하는 한국잡지교육원에서 내가 기자 지망생들에게 “우리는 언어노동자”라고 했더니 한 원생이 매일 작성하는 러닝 리뷰에 “사실 그는 언어부르주아다”라고 남겼다. 프리랜서 기자가 자본가일리 만무하니 내가 중산층 내지는 기득권층이라는 이야기 아닐까 싶다. 취준생보다야 형편이 낫지만 자산은 물론 수입 면에서도 나는 안정적이지 않다. 조직생활에서 벗어나 고용주라는 ‘절대 갑’은 사라졌지만 우기면 도처에 갑이다. 그래도 할 만한 건 갑도 자를 수 있는 당당한 을이기 때문이다. 덜 먹고살겠다 마음먹으면 사실 두려울 게 없다.
내가 사는 별내는 녹지가 많고 명물 카페 거리가 있다.
지난해 나는 별내로 나왔다. 병이 난 아버지와 합치면서 전세로 옮긴 지 6년 만에 집장만을 하기 위해서였다. 서울보다 녹지가 많은 별내가 삶의 질이 떨어진다고 생각지 않지만 서울이 고향이기에 마치 밀려난 듯했다.
서울의 젊은 세대는 월급을 그대로 모아도 이제 내 집 마련이 거의 불가능하다. 어쩌다 이 나라는 아이들이 건물주를 꿈꾸는 사회가 됐다. 세입자가 수입의 절반을 주거비로 지출해야 한다면 해방 당시의 소작농 신세와 다를 게 없다. 이 자산 불평등을 해소하려면 토지개혁에 준하는 특단의 정책을 써야 한다. 아니 정책의 기조를 전환해야 한다. 살고 있는 아파트의 안전성이 D등급을 받았다고 주민들이 경축 플래카드를 거는 나라는 가치가 전도된 사회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이미 끊기다시피 했다. 좌우를 가리지 않고 기득권층은 능력만능주의에 중독돼 있다. 자신의 능력으로 사다리 꼭대기에 올라갔다는 오만이다. 능력이 유일한 평가의 잣대라는 착각이다.
아내에게 나는 아이들과 각자도생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결혼할 때 얼마간 보태느니 나중에 손주 용돈을 주는 게 낫다고 얘기한다. 최악은 노인빈곤에 빠져 자식에게 손 벌리는 것이다. 그 손을 잡아줄 수 없다면 자식은 또 얼마나 괴로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