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이 보수 진보 간 합리적 경쟁 막아... 86세대 운동은 '공공재'
군에 입대한 해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10·26사건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12·12군사반란을 겪었다. 공군참모총장 당번병이었던 나는 당시 워커를 신은 채 사무실 바닥에서 눈을 붙였다.
박정희가 주도한 5·16군사쿠데타 세력 즉 구군부가 결성한 정당은 민주공화당, 신군부가 만든 당은 민주정의당이었다. 전두환의 쿠데타 동지이자 후계자인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정권이 그 후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려 만든 보수대연합 정당은 민주자유당이었다. 민주주의를 유린한 반민주 세력이 민주주의 수호자를 자처한 셈이다.
군사정권에 반대한 세력도 똑같이 자유민주주의를 외쳤고, 반공이란 ‘대의’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의 공산혁명 이론에 반대해 수립된 데다 동족상잔과 분단을 겪으면서 레드콤플렉스가 한국인의 DNA에 각인된 탓이었다. 박정희 구군부 세력은 아예 반공을 국시로 삼았다. 국가 이념이 무슨 이념에 대한 반대-무엇에 대한 안티라는 건 아이러니다. 국시의 시(是)는 옳다는 뜻이다.
문민정부 출범으로 군사독재가 막을 내린 후 민주화 세력은 군사정권에 참여한 산업화 세력을 수구반동으로 규정했다. 산업화 세력은 그들대로 민주화 세력에 친북좌파의 낙인을 찍었다. 이런 현대사의 질곡은 우리나라에서 보수와 진보 간의 합리적 경쟁 내지는 대결을 가로막았다.
총성 한 번 울리지 않은 군부 쿠데타로 최근 실각한 미얀마의 정치지도자 아웅산 수지는 과거 군사정부에 저항했지만 집권 후 자신의 심복들로만 정부를 꾸렸다. 민주화 투쟁의 주역들을 키우지도 않았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한 군사정부에 맞섰다고 저절로 민주주의·인권 수호의 보루가 되는 건 아니다.
운동권 출신 86세대 정치인들도 과거 군사독재에 맞서 싸웠다고 현재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건 아니다. 이들은 과연 지금 진보적 가치를 대표하는가? 위성 정당을 만들어 21대 국회를 장악하고 상임위원장 자리를 독식한 민주당은 위험의 외주화를 막아달라는 피해자 가족들의 단식에도 아랑곳없이 실효성 없는 중대재해법을 통과시켰다. 노동 문제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각은 박정희주의 신봉자들과 얼마나 다른가? 문재인 정권 실세들은 "가덕도 신공항 사업이 문재인 정부의 4대강 사업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느냐"는 심상정 정의당 의원의 비판에 뭐라고 해명하겠는가?
86세대 정치인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세대 집단이다. 역사상 어느 세대보다 정치적으로 과잉 대표되고 있다. 운동 경력은 이들에게 세월이 흘러도 빛바래지 않는 훈장이다. 이렇다 보니 홍세화씨의 지적대로 윤리적·지적으로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는 듯싶다.
그러나 교육의 평등을 외치면서 이들도 자식을 특목고에 보냈다. 해외유학도 보냈다. 부동산 투기를 죄악시하면서도 보수 기득권층이 그랬듯이 아파트를 여러 채 보유했다. 역대 급으로 이중적이면서도 스스로 성찰하지 않았다. 교조주의적 운동권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 아닐까?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미국 리버럴이 90년대 탐욕과 무절제에 빠져 트럼프라는 괴물이 탄생했다"고 말한다.
86 기득권 세력은 또 조국 사태를 겪으면서 정의를 독점하려 들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스스로 조성한 유리한 환경의 수혜자란 사실엔 눈감았다. 이들이 스스로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능력만능주의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성찰 없는 능력주의는 세습주의를 낳는다. 이미 한국사회에서 중산층 세습화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있다. 한 마디로 이들은 자신들이 쌓은 운동 경력을 이 사회의 공공재로 승화시키지 못했다.
무엇보다 반대 정파를 적폐로 몰아 한국사회를 분열시켰다. 기회 있을 때마다 친일파 프레임을 꺼내 들었다. 적대적 의존관계에 있는 보수 야당엔 토착왜구라는 낙인을 찍었다. 그 결과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의 오래된 갈등을 아예 화해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추월의 시대>를 쓴 80년대생 논객들은 이 두 세력 또는 세대에게 화해할 때가 됐다고 주장한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대립 구도를 넘어설 것을 제안한다. 국내총생산(GDP) 세계 10위 국가라는 빛나는 성취는 돌이켜보면 ‘좌우합작’을 통해 이룬 것이다. 산업화·민주화의 성공을 잇는 대중문화·방역 분야의 성과는 선진국을 추월했다. K 시리즈는 ‘국뽕’이란 비판도 받지만 퍼스트 무버로서의 가능성도 보여줬다.
때마침 코로나19는 우리 사회에 세기적 대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헬조선’에 사는 젊은 세대에겐 보수의 철지난 애국 타령도, 진보의 시대착오적 편 가르기도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