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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관계 변천사

사랑받고 싶음에서 동역으로

by 하루만

"띠로로롱"

새벽 6시, 알람이 울렸다.

남편이 부스럭거리더니 알람을 끄고 금세 다시 코를 곤다.


'휴.. 다행이다.'



어젯밤 내일 뭐 할 거냐는 남편의 질문에 나는 속이 뜨끔했다. 주말엔 아무 일정 없이 뒹굴고 싶은 속내를 들킬세라 빠르게 대답을 쏟아냈다.

"첫째 중간고사야. 애들은 어디 못 가니까 가려면 우리끼리 일찍 일어나서 갔다 오던지."

​그 후 별말 없이 잠들었는데 새벽 6시 알람을 해놓은 걸 보니 남편이 어디 갈 작정을 하긴 했나 보다.

'잠이나 실컷 자야지.'
다시 잠을 청하며 눈을 감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화장실이 마렵다. 기척을 내지 않으려 깨금발로 볼 일을 보고 나왔는데 남편이 눈을 번쩍 뜬다.


'아.. 망했다.'
비가 와서 흐리기만 한 회색빛 아침에 스피드가 장점인 나와 신랑은 빛의 속도로 준비를 마쳤다.
몇 년째 가을 옷이 준비되지 않는 케케묵은 옷장에서 8년 된 원피스형 바람막이를 집어 들었다.


남편이 준비한


준비하고 나가니 남편이 아이들을 위해 차린 아침밥이 식탁 위에 차려져있다. 거실은 떡갈비 위에 올려진 체다 치즈 꼬랑내가 진동을 했다. 아이들이 일어나면 먹도록 세팅해놓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

"어디 가는 거야?"
물어도 대답 없는 남편.
어디 가는지 알려주지 않은 채 우리를 데리고 여기저기 다니는 게 하루 이틀인가.
그래, 어디든 가보자. 지금 당신이 공황장애 앓지 않고 버티는 게 감사한 일이니까.



국도로 들어섰는데 왠걸..공사중ㅜ


남편은 고속도로가 막힐 때는 서서 기다리기보단 국도로 빠져서 낯선 길을 가보길 좋아한다. "이런 길이 있네" 하며 신이 나 샛길로 들어왔는데 아뿔싸, 공사 중이다.

신이 인생은 계획한 대로 되질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우리는 이렇게 도로 위에서도 막힘을 당했다. 삶의 무게가 버거워 도망치고 싶은 남편인데 환난 중에 늘어난 인내로 다행히 아무 일 없이 그곳을 빠져나왔다.



공사 중인지 차들이 쭉 늘어서 있다. 원래 주말에는 안 막히는 곳만 찾아가는 사람인데, 지금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당최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가 딱히 궁금해하지도 않는 이유는 전혀 기대감이 없을 때 도착지의 일정이 선물처럼 다가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낯선 길에서 만난 예쁜 가로수길


나를 철저히 통제하며 살다가 남편을 처음 사귀게 됐을 때, 사실 나는 그동안 못다한 연애의 한을 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기다릴 때의 설렘, 뚜뚜 거리는 통화음이 주는 긴장감, 모든 것에 "함께"라는 의미 부여는 사랑을 더욱 특별한 맛이 나게 하는 조미료 역할을 톡톡히 했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였다


스물여섯이 되도록 아무도 만나지 않던 내가 연애를 시작했는데 눈에 뭐가 씌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마음 놓고 사랑이란 걸 해본다는 거 자체가 날 구름 위로 둥둥 뜨게 만들었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주지 못했던 마음을 그에게 원 없이 퍼주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연락할 길이 전화와 캠 밖에 없던 시절 우리는 전화값(070없던 시절)으로 비행기표 가격을 내고, 캠을 종일 틀어두며 그의 잠자는 모습까지 지켜보았다.

​그렇게 첫 설렘은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이 흘려보내며 마구 심장을 뛰게 했다.



"여보, 우리 속리산 가?"
표지판을 보고 나서야 목적지를 알아챘다.
뒤이어 '말티제는 여기부터'라는 표지판과 함께 꼬불꼬불한 길이 등장했다. 핸들을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감으며 어지럽게 올라오는 길이 꼭 우리네 인생길 같다.

아무도 꼬불 길이 될지는 생각지도 못하고 결혼 서약을 한다. 결혼에 대한 환상을 가진 채 시작했던 신혼시절을 지금 돌아보면, 끝없이 나만 바라봐 줄 것을 요구했던 철없는 집착의 때였던 것 같다.

​함께함이 꼭 꽃길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으며,
우리는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그 익숙함은 사랑의 감각을 무디게 하는 마취제가 된다.


슬프게도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나는 몸소 경험하고야 말았다.




전망대를 바라보는 남편


전망대를 바라보고 선 남편을 따라 자욱한 안갯속으로 들어갔다. 단풍 명소로 알려진 말티제는 아직 가을의 초입에서 미처 옷을 갈아입지 못한 상태였다.

​"진짜 단풍 들었을 때는 복잡해서 여기 못 와."
붐비는 곳은 일부러 피하는 우리 부부는 서로를 쳐다보며 지금 오기 잘했다고 말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말티제 풍경


계단을 걸어 올라가 툭 튀어나온 전망대 끝으로
걸어나가는 내 다리가 후들거린다. 온 김에 사진은 남겨야 하니 자세를 잡고 셀카봉을 들었다.(블로거 다 됨)

남편의 도촬컷



흩뿌리듯 한 빗방울과 바람은 내 머리카락을 엉클어트렸지만 나는 꿋꿋이 셀카 찍기에 집중했다.

"내가 찍어줄까?"
갑자기 남편이 셀카를 찍는 나를 보더니 시키지도 않은 사진을 찍어준다. 그런 남편을 보며 갑자기 이 남자는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어린 나이에 나랑 결혼했을까 하는 물음이 들었다.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하던 스물여섯의 청춘이 말이다.

'그때는 곰돌이처럼 순둥순둥했는데..'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의 남편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학생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의 모든 변천사를 지켜보면서, '아, 지금같이 사는 사람이 내가 처음 만났던 그가 아닐 수도 있구나.'라는 마음이 든 적도 있었다.

​살아가며 부부가 한곳을 바라본다면 더 끈끈해지지만, 각자 다른 곳을 향해 가고 있다면 둘 사이엔 괴리감이 들 뿐이다.

​그 어려운 시절을 통과하며 우리의 초점이 하나로 맞춰진 것은 하나님 은혜이자 가장 감사할 일이다.

목탁봉 카페뷰


말티제를 넘어가면 속리산 테마파크가 나온다. 거기서 모노레일 타고 올라가 목탁봉 카페에 앉았다. 충북 보은의 특산품 대추로 끓인 대추자의 향이 진하게 풍겨져 나왔다.

안개가 끼어 산 정상의 뷰가 다소 아쉬웠지만, 대신 운치가 있었다. 가만히 있던 남편에게 카페에서 사진을 한 장 찍어달라고 부탁했더니 모노레일도 찍고, 목탁도 찍으라는 둥 부쩍 요구를 많이 한다.



속리산 테마파크 모노레일


내려가는 길 최대 10명까지 탈 수 있는 모노레일에 우리 부부만 타다니 럭키비키다. 남편은 이럴 때 아니면 모노레일 안에서 사진 못 찍는다며 자리에 앉으라고 성화를 부린다.

​'아니, 이 남자 사진 찍어주는 거 매번 귀찮아하더니 오늘 왜 이래?'

​망망대해에 남편과 딱 나만 남았다면 당신은 어떤 마음이 들 거 같은가? 나는 그런 상황이 지옥 같았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저 사람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손을 스치는 선선한 바람이 좋다


그 이유는 우리 부부가 "나만 사랑해 줘!"라고 소리치기보단 이젠 "함께 짊어지는 삶"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폭풍 같은 첫사랑의 설렘을 지나 잔잔한 바다로의 항해를 이어나간다. 결국 부부는 함께 걷는 인생의 길동무이자 서로의 버팀목이 된다.

​우리 부부가 오늘의 광야길을 묵묵히 걸어갈 수 있는 힘은 따스한 집의 온기와 같이 보이지 않는 강한 유대감에서 나온다. 그 동행은 봄꽃 같던 설렘에서 편안한 익숙함을 거쳐 삶을 함께 만들어가는 진짜 사랑이라고 이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충북 보은의 특산품 대추가 주렁주렁 달린 길을
돌아나오며 남편에게 물었다
"여길 그렇게 오고 싶었어?"

​"무슨 소리야, 다 너 때문에 온 거야.
너 포스팅거리 만들어주려고."

​뭐??
아놔....진짜 못살아!

(당일치기 왕복 6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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