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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니정 Jan 20. 2024

페낭 사람들은 페낭을 떠날 생각이 없다

말레이시아 페낭으로 본 대한민국 부산

우리나라 사람들이 말레이시아에 대해 보통 들어본 것은 '코타키나발루' 정도이다. '코타키나발루는 한국인이 먹여 살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인 여행객이 많은 곳이다. 가보면 생각보다 도시적인 분위기와 인프라에 단순 관광지가 아니라 메이저 도시 중 하나겠구나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말레이시아 로컬들의 인식은 좀 다르다. 이곳 사람들에게 코타키나발루는 우리나라로 치면 '제주도' 정도 느낌이 될 것 같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제주도라고 하면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지라는 인식이 있지만 그런 것 치고 의외로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나 역시 한 번도 안 가봤다.)


코타키나발루도 여기 로컬들에게는 딱 이 정도 느낌인 것 같다. '한 번쯤 가봐야지!'라고 생각은 하지만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이 더 많은 듯한 그런 인상이다. (실제로 주변 로컬 친구들을 보면 가본 적 없다는 사람이 절반 이상이다.)  



그렇다면 이곳 로컬들에게 있어 말레이시아 최고의 도시는 어디일까? 단연 쿠알라룸푸르로 (Kuala Lumpur)와 페낭 (Penang)이다. 쿠알라룸푸르, 줄여서 케이엘 (KL)로 불여지는 이곳은 말레이시아의 수도이므로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이다. 페낭은 말레이시아의 제2의 도시로 바다를 접하고 있어 딱 부산 느낌이다.(인구가 두 번째로 많은 것은 아니다.)


행정의 중심이 케이엘 (KL)이라면 인간사와 문화유산의 상징성은 페낭이라는 이미지가 있다는 점에서도 서울, 부산과 흡사하다.  


이번 글의 주제는 바로 이곳, 페낭 (Penang)이다. 페낭이 왜 말레이시아 최고의 도시인지 (수도가 아님에도), 왜 세계적인 이민지로 각광받아왔는지 소개하고자 한다 (사실 나 혼자만 알고 있고 싶어서 비밀로 해왔지만). 단순히 널리 알려져 있는 페낭의 장점들을 열거하기보단 그 장점들에 대해 내가 직접 경험한 주관을 중심으로 설명하겠다.



첫째, 삶의 속도가 느리다.

페낭은 제2의 도시이지만 수도인 케이엘 (KL)에 비해 인구가 훨씬 적어서 그런지 기본적으로 여유로운 분위기가 있다. 나는 이 나른한 분위기를 만끽하면서 동네 한 바퀴 산책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조금만 부지런히 걸어가면 바다도 볼 수 있다.


내가 물리적으로 지나가고 있는 이 공간에는 여백이 많지만 내 영혼의 공간은 꽉꽉 채워지는 듯한 특유의 느낌이 있다. 


Penang Georgetown Street (from 'Adventrues with Family')


둘째, 사람들이 합리적인 동시에 따뜻하다.

부산사람들과 똑 닮았다. 겉으로는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대화를 해보면 속정이 깊다. 도움을 요청하면 최대한 잘해주려고 하는 게 느껴진다. 로컬 시장을 가면 상인들이 물건을 하나, 둘씩 더 넣어주는 경우가 흔하다. 외국인인걸 알게 되면 그걸 이용하려고 하기보다 오히려 다른 좋은 것들을 소개해주려고 한다. (속이려 들지 않는다.)


이곳 사람들은 딱 정해진 시간 동안만 노동하고 필요한 만큼만 거두어가는 삶에 만족한다. 이곳 식당들의 영업시간이 그 좋은 예다. 프랜차이즈를 제외하고는 많은 로컬식당들이 비교적 짧은 영업시간을 가진다. 물론 그 시간 동안에는 성심을 다해 고객을 서빙 (Serving)한다.


회사 근처에 내가 자주 가는 치킨라이스집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가 끝이다. 그마저도 10시에 딱 오픈하는 게 아니라 설렁설렁 한 10시 15분은 되어서야 여는데 그래놓고 끝나는 3시에는 칼같이 퇴근한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휴일이 금, 토 이틀이라는 점이다. 한국인 입장에서 보면,


"식당을 한다는 사람이 휴일을 일주일에 이틀이나 쉬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금요일과 토요일에 쉰다고?"  


'취미생활로 장사를 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음에는 의문점이었고 이 식당만 이러는 줄 알았다. 근데 아니나 다를까 다른 곳도 그랬다. 근처에 완탄누들집은 금토일 오전 7시부터 오후 2시까지만 영업한다. 자주 가는 돼지내장국숫집은 일요일만 쉬지만 오전 6시부터 10시까지만 영업한다.




근데 알고 보니 이마저도 기준이 있는 게 아니었다. 그날의 주인들 마음대로다. '이야, 오늘 기분 좋다!' 싶으면 더 길게 하고, '비 오네. 일찍 들어가야지!' 하면 덜 한다.


처음에는 이러한 이들의 사고방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여기 사람들은 책임감이나 서비스정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된 것은 이곳에서의 가게 주인과 고객과의 관계는 철저하게 대등하다는 사실이다. 즉 판매자와 구매자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에 완전히 부합하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객중심'을 표방하면서 기본적으로 '손님은 왕이다.'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다. 그로 인해 각종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갑질' 사건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그러한 갑질의 기본 작동 원리는 '돈을 쓰는 내가 너 보다 더 위에 있다.'라는 우월의식이 기저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안 되는 일은 없으며 돈에 따라 너와 나의 계급이 정해진다.'는 마인드가 깊숙이 뿌리 박혀 있는 것이다.


그런 나에게 (혹은 우리에게) 이곳 상인들과 고객들의 대등한 관계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판매자는 본인이 필요한 만큼의 재화만 얻으면 되고, 구매자 또한 본인이 필요한 만큼의 서비스만 받으면 된다. 


그러니까 서로 역할이 다를 뿐인 것이지 누가 더 위라거나 아래라거나 그런 거 없다.




마지막은 잘 알려져 있듯 외적인 생활 인프라가 준수하다는 점이다.

먼저 치안이 훌륭하다. 물론 우리나라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수도인 케이엘 (KL)이 이런저런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에 비하면 훨씬 안전한 편이다. 이것에 대하여 최근에 로컬 친구들에게 들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있다. 나는 화교가 90프로 이상인 현지 교회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친구들의 대부분이 중국인이다.


"우리 페낭이 안전한 이유는 중국인 거주자 비율이 절반 이상이기 때문이야! 인종 비율이 다양해질수록, 중국인이 적어질수록 그 지역에는 갈등이 많아. 케이엘 (KL)을 봐봐."


(나쁜 의도 없이 한 말인지는 알지만)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좀 얼떨떨했다. 아닌 게 아니라 확실히 이곳 미디어를 보면 인종이 다양한 케이엘이나 말레이계, 인도계로 이루어진 지역에서 각종 사건사고가 많이 벌어지는 그런 느낌은 있다.


실제로 중국계 인구 비율 자체가 20프로 정도이니 머릿수로 소수에 속하고, 평균소득 또한 말레이나 인디언 가정보다 훨씬 높기 때문에 사건사고가 적어 보이는 면은 있다. 하지만 외국인인 내 눈에는 (친구들에게는 미안한지만) 중국인들도 별반 다를 것 없이 보인다. 


그냥 하늘 아래 똑같은 한 인간, 한 인종일 뿐이지 어느 쪽이 더 민족성이 우수하다 아니다 말할 수 없다.


'조화로운 다인종 다문화 국가'를 실현한 나라로 인식해 왔던 나의 기대와는 달리 로컬들의 관점이 상당히 구분적이라는 점이 생소하게 다가왔다.



치안 외에 외적인 인프라도 잘 되어있다. 보행자 친화적이지는 않지만 거리는 깨끗한 편에 속한다. 높은 건물이 거의 없고 개인 자택이 많아 자신들의 입맛대로 리모델링한 경우가 많다. 내가 사는 페낭의 조지타운 (Georgetown)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곳으로 올드타운의 모습을 고유하게 유지하고 있는 건축물들이 많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그린 벽화들도 즐비하여 보는 즐거움이 있다.


그리고 페낭 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음식이다. 페낭은 'Malaysia's food heaven'이라는 칭호가 붙을 정도로 다양한 미식문화를 가지고 있다. 중국음식, 말레이음식, 인디언음식 등 다양한 문화의 음식이 각각 별개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퓨전' 형태로 제공된다. 식문화만을 볼 때는 또 '조화로운 다인종 다문화 국가'라는 말에 부합하는 것 같아 나를 다시금 헷갈리게 만든다. 이 나라 대체 뭘까?


물가가 오르고 있다지만 여전히 안정적이다. 인플레이션은 국가 전체의 문제이기 때문에 피할 도리가 없다. 그래도 페낭의 경우 케이엘이나 조호바루, 코타키나발루와 같은 여타 도시들에 비해 비교적 안정적인 물가를 유지하고 있다.


Various Penang food (from 'Girl Eat World')


말레이시아 페낭으로 본 대한민국 부산

이렇게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지낼수록 내 고향인 부산과 똑 닮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나는 부산 토박이다. 부산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살고 있다. 부산은 우리나라의 '제2의 수도'라는 역사적 의의뿐만 아니라 인구 규모며 사회 기반 인프라 면에서도 그 위상을 지켜왔다. 사람들이 정이 많고 물가가 안정되어 있다는 점도 페낭과 같다. 가장 살기 좋은 도시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부산이 죽어가고 있다. 나고 자란 내 고향이 죽어가고 있다.


얼마 전 부산에 관한 한 다큐를 보았다. 현재 부산은 인구가 가파르게 줄고 있어 곧 300만 조차도 붕괴될 위기에 처해있다. 그나마 남아있는 인구도 절반 가까이가 노령인구이다.


즉 청년이 없다. 부산의 청년들은 부산을 떠나고 있다.  


원인은 결국 또 일자리다. 청년들이 마땅히 일할 자리가 없다. 대기업이나 글로벌 기업들의 브랜치가 들어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내부 채용이다. 본사에서 일하다가 발령을 받아 온 사람들로 이미 채워진다. 조선업과 무역업이 메인인 도시이지만 업계 자체의 불확실성이 크고, 험하고 경직된 분위기라는 이미지가 있어 청년들이 기피한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지도 모를 막대한 스트레스에 비해 그에 대한 대우는 충분치 못할 것이라는 인식이 있는 것이다. 우리 청년들은 바보가 아니다.     


Busan Gamcheon Village (from 'Flickr')


그렇기 때문에 나는 페낭이 너무 부럽다. 페낭과 부산은 위에 설명했듯 거의 모든 면에서 흡사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양질의 일자리가 있느냐 없느냐라는 점이다. 


페낭에는 글로벌 기업들의 생산 공장이 많은 것뿐만 아니라 Intel, Dell, Keysight 등과 같이 글로벌 IT 기업들도 상당수 들어와 있다. 또 규모가 큰 BPO의 본사가 있기 때문에 일반 행정직에 있어서도 일자리 수요가 꾸준히 발생한다. (현재 내가 다니는 곳이다.) 조건도 괜찮다. BPO 업계는 대개 로컬 평균 이상의 셀러리를 제공한다. 페낭에서는 이러한 BPO의 수가 늘어나려는 추세에 있다.


즉 IT 인력과 같이 전문 기술 인력뿐만 아니라 문과나 서비스를 전공한 일반 인력도 충분히 괜찮은 조건의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생태계가 마련되어 있다.


그래서 이곳 로컬들은 대부분 페낭을 떠날 생각이 없다. 사람들 정 많고, 인프라 잘 돼있고, 물가 안정적이고, 일자리까지 꾸준히 있으니 굳이 수도권으로 갈 이유가 없다.     




이러한 로컬들의 인식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하나 있다. 최근에 내가 몸 담고 있는 프로젝트가 갑작스러운 프로젝트 종료를 선언하면서 거의 80명 가까운 인원들이 새 둥지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경영진 쪽에서는 수도인 케이엘에 있는 지점으로 이직하기를 희망하는 인원들을 조사하기 위해 리스트를 받았다.


결과는 극명했다. 나와 같은 외국인들은 대부분이 'Yes'라고 답한 반면, 로컬들의 대부분은 'No'라고 답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위와 같은 장점들이 골고루 갖춰져 있는 자신들의 고향을 떠날 필요를 못 느낀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단순히 자신들의 고향땅에 대한 깊은 애정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활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일자리가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는 안정감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글을 맺으려고 하는데 씁쓸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다. 내 고향땅인 부산을 생각하면 말이다. 나는 누구보다도 내 고향 부산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가족들과 친구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지난 날들, 내 삶의 희로애락의 그 모든 기억들은 그곳에 습작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꼭 내가 배신한 기분도 든다. 그렇게 애정 있다고 말하면서 이게 웬걸? 나는 말레이시아까지 왜 와야 했을까?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핑계 (혹은 사실) 댈 수밖에 없다.


"아, 그게... 부산은 다 좋은데 일자리가 없어요. 그래서 항상 불안해요."


친구들끼리 모이면 모두가 한 입으로 하는 말이 있다.


"부산에 일자리 있었으면 절대 부산 안 떠난다. 서울 살아보니 더 느낀다. 우리 고향만 한 데가 없다."  


부디 나의 고향땅인 부산이 청년들에게 안정된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곳이 되기를 염원한다.

이곳 말레이시아의 페낭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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