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회사에서 접하는 무미건조한 지식 전달의 글이 아닌 사람 냄새가 나는 글을 읽고 싶어 집 근처 서점으로 향했다. 서점에서는 화려한 표지의 다양한 책들이 예쁘게 배치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열심히 책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초록색의 무언가가 나의 눈에 띄었다. 2022년 여름 한참 유행하던 드라마의 키워드인 해방일지란 단어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생 빨치산의 단원으로 '빨갱이'란 얼룩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로 인해 무채색을 가진 가족들은 아버지의 빨간색으로 인하여 빨간색이라는 죄가 씌여졌고, 삶에 많은 제약과 어려움을 겪어왔다.
하지만, 세월의 풍파를 겪으면서 아버지의 빨간색은 점점 흐려져 갔다. 아버지는 지리산 아래 고즈넉한 집에서 더 이상 빨간색의 헥맹가가 아닌 인간 고상욱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아버지의 많은 지인들을 만나면서 내가 알지 못했던 수많은 얼굴을 가진 아버지를 알게 되었다. 불안전하고 불공평한 세상의 혁명을 꿈꾸던 아버지는 지리산 자락의 작은 마을에서 그저 엄마의 남편이고, 아버지고, 친구고 이웃이었다.
"마침내 재가 된 아버지가 유골함에 담겨 나왔다. 아버지는 아직 따스했다." (p249)
"나는 작은 봉지에 나눠 온 아버지의 유골을 한 줌 집어 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유골은 밀가루처럼 매끄럽지는 않았고, 만지면 뽀드득 소리가 날 것 같았다." (p257)
결국, 아버지의 굴곡진 인생 중에 마지막까지 남은 아버지의 얼굴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혁명가가 아닌 인간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이로써, 난 아버지의 진정한 해방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한때 그랬었다. 나 자신의 주관으로 똘똘 뭉쳐 세상에서 내가 제일 옳고, 맞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나의 화려한 전성기였고, 끓어오르는 열정과 옹졸하고 편협한 생각을 가진 부끄러운 내가 있었다. 나도 짧지 않은 세월을 지내면서 뾰족한 부분은 무뎌지고, 둔해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던 중, 이 책을 만나면서 점점 더 인간미 넘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나 자신의 해방일지를 꿈꾸어 본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가 등장한다. 평생 서울에서 표준말을 쓰면서 살아온 나에게는 읽으면서 피식피식 웃음을 주는 개그 프로를 보는 느낌으로 한숨에 읽을 수 있었다.
일상에 지쳐있고, 삶의 본질을 고민하고 계시는 분들께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책이 주는 구수함과 소소한 재미는 단순함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게 해 줄 것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