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소개로 처음 뵙는 분께 나를 연구원이라고 소개했더니, 아직도 직접 실험을 하시냐고 묻는 거였다. 나는 웃으면서 이젠 손도 떨리고 눈도 잘 안 보여서 못한다고 위트 섞인 답변을 드렸다. 그러면서 명함을 드렸더니 아차 싶었다는 표정으로 "연구소장님이시군요" 하면서 조직을 이끄시느라 고생 많으시겠다는 격려의 말씀을 건네오셨다.
문득 커리어 성장에 대해 생각해 봤다. 내가 관리자가 되지 않고 지금까지 직접 실험하는 연구원이었다면 어땠을까? 물론 어느 정도 성과도 내고 회사에 적지 않은 기여도 했을 것이다. 한때 마이더스의 손으로 불릴 정도로 어려운 실험도 척척 해내던 시절이 있었다. 실험을 잘해서 좋은 데이터를 내게 되자 어느새 관리자로 변할 것을 조직으로부터 요구받았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훌륭한 석세서 (successor)를 내세워 동등 이상의 실험 역량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회사 입장에서는 실무를 아주 잘하는 인재를 발견했을 때 그 능력을 더 크고 중요한 분야에 쓰고자 한다. 더 높은 수준에서 전체를 지휘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회사에서 볼 땐 인재 양성이고 개인 입장에선 성장이다. 그렇게 계속 역량을 보여주면 급기야 자신의 전문성과 전혀 관련 없는 분야의 조직을 맡기도 한다. 완전한 고위 관리자 레벨이 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어떤 분야에서 인정을 받고 성과를 내고 있다면 곧 그 분야를 떠나 더 상위 레벨의 일을 맡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을 실무자로만 쓰기엔 아까우니 관리자가 되어 당신처럼 훌륭한 실무자를 많이 양성해 주시고 당신은 새로운 전략을 세워주세요."라고 회사가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큰 그림이 실무자들에겐 자칫 혼란을 줄 수도 있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불려 가서 전략, 기획 업무를 맡으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뭘 잘 못 했나? 하고 오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실무 전문가를 지향하는 사람에게 적성을 따지지 않고 큰 그림에 맞추라고 하는 것은 자칫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이러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당사자는 성장의 의미를 새기고 평소에 준비해야 하며, 조직은 큰 그림의 배경을 당사자에게 잘 설명해야 한다. 예전 직장에서 신입 임원 교육 때 들었던 강의 내용이 생각난다. "애벌레가 몸집을 효율적으로 잘 불렸길래 이제 나비가 되어 더 높이 더 멀리 보라고 승진을 시켰더니 계속 몸집만 불리다가 결국 새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는 예를 들며, 이경우는 절대 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개인의 성장은 조직의 양성 방향과 일치할 때 극대화되며,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 윈윈 할 수 있다. 덩치 큰 애벌레가 될 것인가? 나비가 되어 날아갈 것인가? 개인의 결심과 조직과의 교감이 필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