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보팅의 향연, 풀스택 마케터 낭만 있잖아.
/
우리 조직은 나 이전에 마케터가 없었는데(정확히는 모두 나가 떨어졌다) 첫 회의에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마케팅은 콘텐츠든 퍼포먼스든 결국 AARRR. A(acqusition)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A의 당위성이 없거나(서비스가 좋으면 사는거 아냐?) 일부는 A만 마케팅(PR 해요, 트래픽만 올려줘요)이라 생각했다. 중간 과정이 없으니 무슨 말을 해도 결국 끝과 끝에 있는 조직원들을 전혀 설득할 수 없었던 거다. 사실 그때 포기하는게 옳은 선택이었을지도. 근데 그냥 이 회사가 좋았다. BI가 네이비인게 좋았고 그냥 사람들이 좋았다. 여태는 환경을 옮겼지만, 이번엔 나를 바꾸고 싶었다. 그래서 회사 맞춤 마케터로 피보팅했다.
이름하여 짠돌이 마케터. 모든 것은 전환율이 1순위. 모수가 적더라도 진성만 남길 수 있는 방법을 택했고 모든 비용 투여는 small test 이후에 결정했다. 가설과 근거가 없으면 과감히 드랍했고, 재미있는 콘텐츠를 하고 싶을 땐 무조건 가내수공업으로 돌렸다. TVc, PPL 등 수많은 유혹이 있어도 눈을 흐렸다. 그렇게 3년쯤이 지나니, 가끔 나도 재밌는거 하고 싶다는 욕구불만에 시달리긴 하지만, 이 조직 사람들에게 '마케팅은 효과가 확실해'라는 신뢰를 받았고, 소중한 팀원 4명을 얻어냈다. 그렇게 입사부터 지금까지 월 GMV 660% 성장을 경험하고 있다.
/
1) 경영 비전공 : 고집이 없다
"이게 마케팅이야." "이게 전략이야"처럼 정석을 모르다보니 겉멋 없이 진짜 뭘 할지 밑바닥부터 고민하는 것 같다. 그리고 코에 걸면 코걸이, 뭐든 팔면 마케팅이라고. 보통 부서마다 뭐만 하면 다 마케팅 일이라고 던지는데...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할 수 있다. 왜냐면 뭐가 정석인지 모르니까! 그래서 UT하라 하면 나가고 전단지도 돌리고, 고객 여정도 직접 녹화해서 보다 보니 좀 더 우리 서비스의 고객에 대해 구체적인 인사이트가 생기고 페르소나 잡기가 더 쉬웠던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짜증나지만, 맞다.. 결국 사업은 다 마케팅이다.
2) 인문학 + 심리학 : 사람이 궁금하다
독일제 소설이나 영화나 다 그렇다. 사람 심리가 이렇게 복잡하고 난해하다고? 아마 인간에 대해 제일 심도 있게 분석하는 나라가 아닐까.. 여기에 심리학까지 얹으니 소비자 행동마다 재밌고, 테스트 설계한 것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오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심리학 실험을 하고 싶은 자, 마케팅으로 오라! 업무 만족도 최상을 경험할 수 있으리.
3) 디자인 찍먹 : 오히려 디자인에 대한 욕심을 내려둔다
몇개월 해보니 알 수 있었다. 이건 내가 할줄 안다고 까불 수 있는, 훈수 가능 영역이 아니구나. '디자이너는 신이구나!' 그래서 디자인 퀄리티에 대해 감히 얘기하기 보다 그냥 의도만 전달하고 알아서 잘 해줍쇼 하는 편인데 이게 확실히 리소스와 시간을 아낄 수 있는 일 같다. 물론 아직도 여기에는 정답을 모르겠다.
4) 콘텐츠 기획 경험 : 맷집과 체력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하다. 콘텐츠 대행사 시절 맨날 오지에 들어가고 발톱 깨지며 뛰어다녀 촬영하고. 기획서 빠꾸가 일상이라 새벽 1시에 퇴근 하다보니 저절로 멘탈이 강해졌다. 이 회사에서 멘탈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데.. 그럴 때마다 솔직히 이정도로 뭐가? 싶음. 다들 대행사에서 굴러봐야.. 아는 그런 아픔이랄까.
5) 뭐든 재밌어 : 개발도 데이터도 다 할래
코드짜는 개발자들 모습이 멋있어서 개발 수업을 들어봤다. 물론, 꾸준히는 안들었지만. python 도 보고 sql 도 보고 개론 수업만 열심히다. 이렇게 관심사가 튀니 주워듣는게 생기고 개발자들과 말을 할 수 있는(대화가 통한다고는 안했다) 기초 지식이 생겼다! 요즘에 배운건, 개발자에게 일 시키는 법 :
ㄴ 000 해주세요! (X) > 그게 안되는 이유와 리스크에 대해 100가지 말함.
ㄴ 000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O) > 할 수 있는 해결책을 알려줌 (!)
이들은 다른 종족이다. 문제를 가장 안정적이고 정확히 해결하기 하는데만 관심이 있을 뿐...
/
부족한 점 : 앞으로 레벨업 하고 싶은 스택
쓰다보니까 주제가 없어졌지만, 아무튼 풀스택 마케터가 되기 위해 아래 내용을 올해엔 채워보려 한다.
1) 데이터 공부를 제대로 해보고 싶다.
: 현재는 추출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분석만 하고 있는데, 직접 추출하는 것을 연습 중. 일단 논리적 사고가 진짜 중요한 것 같아서 논리학 공부도 해보고 싶고, SQL 말고 Python으로 전처리도 하고, 휘황찬란한 그래프도 그려보고 싶다. 단기 목표는 마케팅 유입부터 시작하는 풀퍼널 DB 전처리 샘플을 만들고, 이거를 looker studio랑 연결해서 마케팅팀만의 대시보드를 완전 내손으로 만드는 것.
2) 신사업 전략을 해보고 싶다.
: 마케팅도 마케팅인데 사업 전략이 너무 재밌다. 시장 분석하고 경쟁사 조사하고 우리 자원으로 침투할 수 있는 영역을 예측하는 일, 너무 짜릿해. 완전 신사업이 아니더라도 서비스 내 신규 기능으로 찍먹은 꼭 해보고 싶음.
3) 전공 타이틀이 필요할까?
: 결국 마케팅이든 사업기획이든 여기서 꾸준하려면, MBA라도 해야하는게 아닐까 고민이 되는 요즘. 그런데 또 국내 MBA 는 네트워크일 뿐이고 할거면 미국가라는 말씀도 많이 들어서 사실 회의적이다. 대신 경영과 스타트업 관련 책 10권만 딱 읽어보고 고민하자!
이 글의 결론은 이렇다.
1) 요즘은 스페셜리스트를 원한다지만, 제너럴리스트도 살만 하다
2) 그리고 뭔지 모르고 쫓더라고 확신만 있으면 어떻게든 풀린다
3) 마케터에게는 약간의 산만함과 낭만이 도움이 되는 듯도 하다
4) 일단 많이 알고 많이 궁금해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