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눈으로 책읽기
저는 ‘철학은 우리 삶에 유용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물론 철학 개념이나 철학자의 생각법을 공부하여 쓸모있게 활용할 수는 있겠지만, 저는 그저 유용한지 유용하지 않은지를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는 학문 고유의 영역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즉, 쓸모없지만 가치가 있는 철학도 있습니다). 철학이 삶에 유용하다고 말하는 건, 완전 거짓말은 아니지만 일부러 다른 사실(유용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숨김으로써 거짓을 말하는 걸로 보이기도 합니다(거짓말이 아닌 거짓… 말. 진실을 얘기하지만 모든 진실을 털어놓지는 않음으로써 상대가 오해하도록 유도하는 화법).
곧 있으면 추석이죠. 만약 철학을 전공했다면, 친척 어르신들이 이런 말을 날릴지도 모릅니다. “그거 배워서 어디다 써먹냐?” 어떤 사람들은 이런 꼰대짓에 대항하여 철학의 쓸모를 어떻게든 증명하려고 애쓰는데요. 참… 안쓰럽습니다. 차라리 펀쿨섹좌 고이즈미 신지로처럼 당당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써먹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철학을 하기 때문에 철학을 전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철학이니까….”
저의 바람과는 다르게 시중에는 철학의 쓸모를 조명하려는 책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중에서 몇몇 책은 문제가 심각합니다. 단순히 자기 주장을 그럴 듯하게 포장하기 위해 철학 개념을 사용하고(허세를 부리고), 그러면서 그 개념을 왜곡시켜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며, 더 나아가 그저 ‘쉬운 철학책’을 쓴다는 미명 아래 더 사려 깊은 고민과 분석이 필요한 문제들을 너무 가볍게 다루기도 합니다. 1절만 하지, 2절, 3절로도 모자라 아예 뇌절을 해버리는 거죠(이 글에서 자세히 설명하진 않겠습니다만,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가 딱 그런 책이었습니다).
『이제라도 삶을 고쳐 쓸 수 있다면』이 좋았던 이유는 저자가 그렇게 뇌절하지 않고 차분하게 글을 풀어나갔기 때문입니다. “이제라도 삶을 고쳐 쓸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분명 후회가 가득한 삶을 살아왔을 텐데요. 프롤로그에서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의 삶은 잘못되지 않았다”라고 건네는 저자의 말에 살짝쿵 위로를 받기도 했습니다. 다만 저는 심성이 뒤틀려서 그런지 ‘위로는 고맙지만, 그래도 객관적으로(?) 내 삶은 잘못된 거 같은데’라는 생각도 들었지만요.
“후회.
굳이 이 책을 잡고 펼치게 된 인연은 이 감정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목소리를 빌리자면 후회스럽더라도 그 과거는 당신의 탓이 아니고 주관적인 느낌일 뿐이다. 주변 지인들을 냉정히 돌아보자. 특별히 잘못된 누군가가 보이는가? 남들이 당신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삶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상 당신 자신밖에 없다.
오히려 지금껏 포기하지 않고 살아왔음에, 미숙함으로 넘어졌어도 다시 일어났음에, 수모와 서러움을 견뎌냈음에, 그 과정에서 흘려야 마땅했을 눈물을 참았음에 이 말을 건네주고 싶다.” (6쪽)
굳이 이 책의 단점을 꼽자면 이렇습니다. 이미 이와 비슷한 철학책이 너무 많다는 것(그래서 저는 좀 지루했습니다. 중간중간 저자 고유의 경험이 서술되어 지루함이 심하진 않았지만), 실제로 삶을 고쳐 쓰는 데에 유용한 구체적인 조언을 해주진 않는다는 것(뭐, 철학이 반드시 쓸모있지는 않으니까요), 중간중간 좀더 깊게 얘기할 만한 주제들이 너무 짧게 다뤄졌다는 것(개인적으로 반박하고 싶은 부분도 조금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철학 입문서들을 여럿 읽어봤고, 자기계발을 위해 명확한 도움이 필요하며, 삶의 문제들을 더 심층적으로 고민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이 책이 그닥 ‘유용’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단점을 쓰면서 글을 마무리하려니까 영~ 기분이 거시기하네요. 이 책 좋은 책입니다(급 포장…. 이 리뷰는 웨일북의 지원을 받아 작성됐습니다. 이 정도면 앞광고 제대로 했다).
#한줄평 마~ 마~ 무난무난~.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철학책(☆☆★★★)
저자의 글 내용이 좋은지 나쁜지를 떠나서, 편집자의 관점으로 이 ‘책’을 보면 군데군데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차례 페이지 디자인은 가독성이 떨어졌고, 동양 철학자의 문헌을 인용할 때는 번역문과 함께 원문(한문)도 적었는데 서양 철학자를 인용할 때는 원문(영어든 독일어든)이 없었고, 중간중간 ‘것’이 너무 많이 쓰여서 문장이 깔끔하지 않고…. 딱히 중대한 결함은 아니므로 하나하나 세세하게 지적하기는 좀 그렇고, 짚고 넘어갈 만한 지점 한 가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요즘 우리 집 아이와 함께하는 취미 활동이 있다. 시를 낭송하고 유튜브에 올리는 것. 교육 차원에서 시도했는데 내가 선창하고 아이가 따라 하다 보니 덩달아 낭송에 참여하게 됐다.”
문장에 오탈자가 있진 않습니다. 저는 단지 여기서 왜 ‘따라 하다’에 띄어쓰기가 되어 있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저에겐 ‘따라하다’라고 한 단어로 쓰는 게 더 자연스럽거든요.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라하다’라는 단어가 실리지 않았으니까 띄운 걸까요? 국립국어원에서는 ‘따르다’와 ‘하다’가 각각의 단어이므로 띄어 적는다고 하네요.
어… 그럼 ‘따라가다’는 어떤가요? 이건 한 단어로 인정되어 사전에도 실려 있습니다. 엥? ‘따르다’와 ‘가다’도 각각의 단어일 텐데 왜 여기선 붙이죠? 찾아보니 ‘따라오다’도 한 단어인데요? ‘따라붙다’도 그렇고! ‘따라잡다’는 또 어떻게 설명하시려고?!
여기서 ‘어휴, 한국어 띄어쓰기는 너무 어려워!’라고 생각하면 하수입니다. 띄어쓰기 원칙은 의외로(?) 간단한데요. ‘은/는, 을/를’ 같은 조사를 제외한 모든 단어를 그냥 띄우면 됩니다. 문제는 어떤 말이 과연 한 단어인지 아닌지 여부죠(‘따라하다’는 한 단어고 ‘따라 하다’는 두 단어). 답을 찾기 위해 국어사전에 검색해보는 건 좋지만, 사전이 모든 답을 알려주리라 기대하면 곤란합니다.
사전은 표준어 규정집이 아닙니다. 붙여 쓴 ‘따라가다’는 사전에 등재되어 있으니까 맞는 말, ‘따라하다’는 사전에 없으니까 틀린 말(띄어 적어야 하는 말)이 되진 않습니다. 국어사전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대중, 즉 언중들의 단어 용례를 담아놓은 정보집입니다(말 그대로 ‘사전’이죠). 결국 한 단어인지 두 단어인지 결정하는 건 한국어 사용자인 우리들의 몫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근본을 따져보죠. 말이란 소통의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내 생각에 ‘따라하다’를 한 단어로 보는 게 자연스러우며 내 말을 듣는 상대방도 그걸 자연스럽게 느낄 것으로 판단되면(그래서 소통에 지장이 안 생긴다면), 띄우기보다는 붙여 써야 합니다. 진정으로 어려워해야 할 대상은 한낱 띄어쓰기가 아닙니다. 과연 내가 자연스럽다고 느낀 표현을 남도 똑같이 느낄까요? ‘어휴, 다른 사람과 대화하기는 너무 어려워!’
『이제라도 삶을 고쳐 쓸 수 있다면』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서, 저라면 위 문장을 ‘내가 선창하고 아이가 따라하다 보니’라고 교정했을 겁니다. ‘내가’라는 표현이 ‘아이가’에 대응되고 ‘선창하고’가 ‘따라하다’에 대응되며 좀더 운율이 살아나서 물 흐르듯 읽히기 때문이죠(편집자에게 교정은 단순히 고친다는 게 아니라 이렇게 고치면 어떨까 저자에게 제안한다는 뜻입니다). 이 책의 편집자가 무슨 생각으로 ‘따라 하다’라고 띄웠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단순히 ‘국어사전에는 ‘따라하다’가 없던데요?’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했다면… (한숨).
“일반인들은 사전이 제공하는 정보의 일방적인 수용자에 머물지 몰라도, 출판편집자들은… 앞으로 만들어질 사전에 담길 정보의 근거를 생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기존 사전에 갇혀 그 정보를 맹종할 게 아니라, 기존 사전을 충분히 참고하되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전의 개정 방향을 선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역할에 걸맞은 성실성과 예민함, 책임감이 요구되지요.”(『한판 붙자, 맞춤법!』, 54쪽)
앞서 국어사전이란 언중들의 단어 용례를 담아놓은 정보집이라고 했는데요. 그럼 사전을 편찬하는 전문 연구자들은 그 용례를 어디서 찾을까요? 바로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출판하는 편집자는 특정 단어를 사용할지 말지, 쓴다면 어떻게 쓸지 더 날카롭고 영민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저자와 독자가 책으로 소통할 때 (눈에 띄지 않게) 중재자 역할을 하는 편집자는 그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글을 쓰는 저자도 그걸 읽는 독자도 잘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사전을 찾아보곤 합니다. 편집자가 예민한 시선으로 오늘날의 언어 현실을 포착하여 책에 반영하고 연구자가 그 책을 바탕으로 ‘표준적인’ 말들을 잘 정리한다면, 저자와 독자에게 훨씬 유익한 표준국어대사전이 만들어질 겁니다. 웬만한 독자가 아니고서야 편집자가 이런 대단한(?) 일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설령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편집자는 묵묵히 제 할 일을 해야겠죠. 단순히 책 하나 잘 만드는 것을 넘어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게 세상을 ‘편집’하는 사람, 그것이 편집자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