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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술북스 Aug 11. 2020

단 한 문장만으로도 책의 품격은 떨어진다

편집자의 눈으로 책읽기

안광복, 『나는 이 질문이 불편하다』, 어크로스, 2019.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미래를 꿈꾸는 것은 정신병 초기 증세다.     


아인슈타인의 명언으로 알려진 문구지만, 진짜로 그가 이런 말을 했는지 의심스럽다. 여러 명사의 어록을 정리해놓은 위키인용집(wikiquote)에 '아인슈타인'을 검색하면 이 명언의 원문(영문)을 확인할 수 있다("The definition of insanity is doing the same thing over and over and expecting different results"). 위키인용집에서는 이를 아인슈타인의 명언으로 잘못 알려진(misattributed) 말이라고 하며, 진짜 유래를 '익명의 약물 중독자들(Narcotics Anonymous; NA)'이라는 비영리 단체가 1981년에 발간한 책에서 찾는다. 실제로 『익명의 약물 중독자들: 기초 교과서(Narcotics Anonymous: Basic Text)』의 제6판(2008년 출간)에는 이러한 문장이 있다.


[번역] "… 적어도 이는 중독으로 인한 광기의 한 단면이다. 마약 한 알을 얻기 위해 매춘을 하는 마약 중독자는 그저 의사에게 거짓말을 하는 중독자보다 더 많은 대가를 치르는 듯하다. 하지만 둘 다 결국에는 자신의 질병[중독]에 대한 대가를 목숨으로 치르게 된다. 광기란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원문] "… This is at least part of the insanity of addiction. The price may seem higher for the addict who prostitutes for a fix than it is for the addict who merely lies to a doctor. Ultimately both pay for their disease with their lives. Insanity is repeating the same mistakes and expecting different results." (23쪽)

(영알못이라 번역이 서툰 점 양해해주세요. ㅠㅠ)


그러니까 약물 중독자를 계도하기 위해 쓰인 말이 어느샌가 아인슈타인의 명언으로 둔갑한 것이다. 대충 검은 바탕에 유명한 사람 사진을 넣고 흰 글씨로 멋들어지게 쓰면 뭔가 명언처럼 보인다고 하던데…. 이렇게 왜곡된 명언이 농담으로 나온다면 그냥 웃어넘기겠지만, 만약 누군가를 교육하기 위해 쓰인다면 그렇게 가르치려 드는 사람의 자격을 의심할 것이다. 정확한 팩트를 파악하지 못한 채 그저 유명인사의 '권위'에 기대는 모습으로 보이니까.

 

그런데 철학교사 안광복 저자가 쓴 철학 교양서 『나는 이 질문이 불편하다』는 서문에서 아인슈타인의 그 가짜 명언을 인용한다. 익숙함을 깨는 변화는 힘들고 버겁지만 낯선 목소리를 만났을 때 우리의 두뇌는 비로소 나태함에서 깨어난다며, 저자는 그 명언을 바탕으로 자신이 왜 이 책을 썼는지 이야기한다. 우욱;; 책을 펼치자마자 이 저자와 책 내용에 대한 기대감, 신뢰 등등이 확 떨어졌다. 저자가 쓴 글의 사실관계 오류를 교정하는 것 또한 편집자의 역할인데… 안타깝기도 하고 화도 난다.


아……


이 책이 나를 화나게 하는 이유는(이 책의 품격을 확 떨어뜨리는 요인은) 단순히 저자가 거짓된 문구를 인용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문구에 은밀하게 담긴 '정신병 혐오'가 더욱 심각한 문제다.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미래를 꿈꾸는 것은 정신병 초기 증세다"라는 말은 진보하지 않는(발전하지 않는; 달라지지 않는) 태도를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규정하고 그걸 정신병에 빗대고 있다.


'바람직하지 못한 것≒정신병'이라는 은유는 사실 곰곰이 따져보면 대단히 이상하다. 이 문구에 '정신병' 대신 다른 병이나 증상을 넣어서 생각해보자.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미래를 꿈꾸는 것은 심장병 초기 증세다. 또는 고혈압 초기 증세다." 넘나 어색하지 않은가? 그런데 만약 '정신병'을 넣었을 때는 어색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정신병≒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라는 은유가 사회 전반에 퍼져서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인식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오늘날 많은 사람이 겪는 대표적인 정신병으로 '우울증, 공황장애, 조현병'을 꼽는다. 대중매체를 통해 이 세 가지 병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어느 정도 알려졌으며, 나도 세 가지 병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한번은 조현병에 걸린 아내를 간병하던 분을 만났다. 그분은 아내가 스스로 조현병에 걸렸음을 인정하지 않아서 약을 먹거나 병원에 가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혹시 아내분이 조현병을 '수치스러운 병'으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 하고 추측했다(특히 우리나라에서는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보도 등으로 인해 조현병이 범죄와 연관된 위험하고 무서운 병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정신병자, 아니 정신병 환자들에게(슬프게도 '정신병자'라는 말 역시 욕설로 쓰인다) '정신병≒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라는 은유는 대단히 폭력적이다. 그저 치료의 대상이거나 혹은 관리의 대상인 질병이 바람직하지 못한 것, 개인의 흠결, 도덕적 타락 등으로 자연스럽게 비유됨으로써 실제 환자들은 이 사회에서 대단히 부끄럽고 잘못된 존재로 취급받게 된다(그리고 환자 스스로 자신을 그렇게 인식하도록 만든다).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10만 부 기념 특별판), 창비, 2020.


오늘날 정신병과 더불어, 암, 에이즈, (뭉뚱그려서) 장애 등등이 이렇게 모욕적으로 은유되고 있다. 강릉원주대학교 다문화학과의 김지혜 교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자신이 무심코 '결정장애'라는 말을 내뱉었던 일화를 회상한다.

  

"혐오표현에 관한 토론회가 있던 날이었다. … 토론자로 함께한 나는 토론 중에 이 결정장애라는 말을 썼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 모두 결단을 내리자는 말을 하던 와중이었다. 토론회가 끝나고 식사를 하러 가는 버스 안에서, 참석자 중 한분이 나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왜 결정장애라는 말을 쓰셨어요?"

짧은 한마디였다. 그건 질문이 아니었다. 나의 잘못을, 더 정확하게는 혐오표현을 하지 말자던 사람이 결정장애라는 말을 사용하는 모순을 지적한 것이었다. … 

결정장애라는 말이 왜 문제인지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장애인 인권운동을 하는 활동가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그는 우리가 일상에서 얼마나 습관적으로 장애라는 말을 비하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무언가에 '장애'를 붙이는 건 '부족함' '열등함'을 의미하고, 그런 관념 속에서 '장애인'은 늘 부족하고 열등한 존재로 여겨진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한동안 멍해진 기분으로 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5~6쪽)     


아주 꽉 막힌 답답한 상황에 처했을 때 흔히 '암 걸린다'라는 말을 쓴다. 나도 한때는 아무 생각 없이 그 말을 자주 쓰다가 언젠가부터 쓰지 않게 됐는데, 아마도 엄마가 진짜로 암에 걸려서 항암치료를 받게 된 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암 투병으로 괴로워하고 있는데, 그저 나의 답답함을 표출하기 위한 (표현의) 도구로 그 사람의 고통을 함부로 가져다 쓸 수는 없었다.

   

다행히 엄마의 암은 초기에 발견됐고, 지금은 완치됐다. 하지만 엄마가 다 나았다고 해서 내가 이제부터 다시 '암 걸릴 것 같아!'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암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최근에는 아빠의 신장에서 [암으로 인한] 혈전이 발견되어 신장 한쪽을 전부 제거하는 수술을 했다…. 암에 걸린 것은 당신의 잘못이나 문제가 아니다. 암은 누구나 걸릴 수 있는, 유전자 돌연변이에 의한 세포의 무제한 증식을 말한다).


예롱, 『지하철에서 옆자리에 흑인이 앉았다』, 뿌리와이파리, 2019.


한편, 최근에 의정부고등학교의 학생들이 관짝소년단 분장을 해서 논란이 됐다. 관짝소년단은 가나의 춤추는 상여꾼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엄숙하고 슬픈 분위기의 일반적인 장례식과 달리 가나의 장례식에서는 즐겁게 춤을 추는 문화가 있었고, 상여꾼들이 경쾌하게 춤추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 전 세계로 퍼져 큰 반응을 얻었다.


이번 논란에서는 특히 학생들이 얼굴을 검게 칠한 것이 북미 사회에서 백인이 흑인처럼 보이기 위해 어두운 피부로 분장하는 인종차별적 행위(블랙페이스)와 연관되어 문제가 됐다.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는 가나 출신 흑인 연예인 샘 오취리는 SNS를 통해 불쾌감을 드러냈다. 한쪽에서는 '인종차별이다'라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패러디일 뿐이다'라고 하며 논쟁이 붙었다. 관짝소년단이 현재 전 세계적인 밈이 되었고 의정부고에서 그동안 코스프레 졸업사진을 찍어왔음을 생각해보면, 그 학생들에게 딱히 흑인을 비하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샘 오취리가 어째서 이에 민감하게(누군가는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반응했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BBC 코리아의 어느 영상 인터뷰에서 콩고 출신 방송인 라비가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흑역사'란 말이 나왔어요. '흑역사?', 나는 그 말이 차별하는 말인 줄 알고. '검다'라는 그런 인종에 관한, 저희 피부색이 그러니까, 그런 말이 나오면 바로 쳐다보게 돼요." 부끄러운 과거의 경험(기억)을 흔히 '흑역사'라고 한다. 나도 평소에 종종 쓰는 말이다. 인종차별적 의도는 단 1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흑인에게는 '검다'라는 말만 있어도 이게 차별인가 하고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지내는 흑인들은 각종 비하와 모욕에 시달린다. 한국인 여성 작가 예롱이 가나에서 온 흑인 남자친구와 사귀며 겪었던 일들을 그려낸 만화 『지하철에서 옆자리에 흑인이 앉았다』를 보면 정말 기가 막힌 인종차별 사례들을 확인할 수 있다. 무례하게 빤히 쳐다보기("아빠! 저기 까만 사람 있어!"), 꼬불꼬불한 머리 대놓고 만지기("너무 신기하다~"), 무조건 가난할 거라고 판단해 동정하기("아프리카에도 스마트폰이 있어?"), 생식기가 정말로 큰지 묻고 성희롱하기("내 아내랑 섹스해줬으면 좋겠는데…"), 흑인은 집안에 받아들일 수 없다며 결혼 반대("아이고~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등등. 이런 일을 일상적으로 밥 먹듯이 겪는 흑인에게는, 비록 차별할 의도가 전혀 없더라도 자신의 검은 피부색과 연관된 행위가 불쾌하게 느껴질 수 있다. 여기서 그 행위가 잘못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보다 중요한 건 애초에 흑인이 자연스럽게 차별당하는 상황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이 질문이 불편하다』에서 초장부터 나타난 정신병 혐오도 그렇다. 안광복 저자가 정말로 누군가를 비하할 의도로 아인슈타인의 가짜 명언을 인용한 것 같지는 않다(그의 선량함을 믿는다). 하지만 저자가 아무 생각 없이 정신병을 바람직하지 못한 것의 은유로 차용함으로써(편집자가 아무런 교정도 하지 않음으로써) 실제 정신병 환자들이 자연스럽게 멸시받는 상황에 손을 얹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선량한 차별). 단순한 졸업사진 하나가 사회에 큰 논란을 가져오듯이 단 한 문장만으로도 책의 품격이 떨어질 수 있다. 『나는 이 질문이 불편하다』는 그럭저럭 재밌고 유익한 철학책이다. 저자(혹은 편집자)가 조금만 더 신경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참고자료


Wikiquote-Albert Einstein

https://en.wikiquote.org/wiki/Albert_Einstein     


Wikiquote-Narcotics Anonymous

https://en.wikiquote.org/wiki/Narcotics_Anonymous     


Wikipedia-Narcotics Anonymous

https://en.wikipedia.org/wiki/Narcotics_Anonymous     


아인슈타인의 가짜 명언에 관해 조사한 블로그

http://coldstar.egloos.com/7457437     


「범죄자들 때문에 누명 쓴 조현병… 국내 환자 30여만 명」, <한국경제>, 2020.7.17.

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2007106332i     


「관짝춤, 관짝밈 만들어낸 '관짝소년단'의 근황은?」, <BBC News 코리아>, 2020.5.5.

https://youtu.be/5IACfsdm3hM     


「샘 오취리 "흑인분장 불쾌"… 의정부고 졸업사진 '관짝소년단' 의견 분분 [종합]」, <한국경제>, 2020.8.7.

https://www.hankyung.com/entertainment/article/202008072569H     


「조나단, 한현민, 라비 '흑형'이란 말에 상처 받는 이유」, <BBC News 코리아>, 2019.9.4.

https://youtu.be/QnTPdBMLzOo     


수전 손택, 이재원 옮김, 『은유로서의 질병』, 이후, 2002.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창비, 2019.     


예롱, 『지하철에서 옆자리에 흑인이 앉았다』, 뿌리와이파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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