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눈으로 책읽기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많은 사람이 힘들어하는 가운데, 출판계에는 남몰래(?) 미소를 짓는 사람들이 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 사람들. 도서 시장에서는 무엇보다 경제·경영 분야의 약진이 눈에 띈다. 독자들은 코로나19 때문에 찾아온 세계경제의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하고자 했다. 2020년 교보문고 상반기 도서 판매 동향을 살펴보니, 경제·경영 분야의 전체 판매가 전년 대비 24.4퍼센트 올랐으며 특히 주식·증권 관련 책은 3월 149.7퍼센트, 4월 156.3퍼센트로 최고조를 기록했다.
『코로나 경제 전쟁: 바이러스가 바꿔놓을 뉴노멀 경제학』도 잘나가는 책 중 하나다. 4월 10일에 초판 1쇄를 찍고 바로 다음 달인 5월 6일에 초판 14쇄를 찍었다. 괴물 같은 책이다. 매경출판 편집팀장의 말에 따르면 “한 달여 만에 약 3만 부”가 팔렸다. 이와 비교해서, 최근에 나는 2018년에 찍은 인문서 1쇄 1500부를 2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다 털고 2쇄의 제작발주서를 넣었다. [3만 부/1달] vs [1500부/2년]. 책을 잘 팔지 못한 게 자랑은 아니지만, 이 정도 격차면 부러움을 넘어 자괴감이 들 정도다.
어쨌든 잘 팔렸다는 건 편집자(기획자)가 트렌드를 명민하게 파악했다는 뜻. 시장경쟁에서 완패했음을 겸허히 인정하고 한 수 가르침을 받겠다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 실망했다. 『코로나 경제 전쟁』은 잘 팔릴 필요가 없는 책이었다. 다음 문장을 보자.
“필러2(은행의 자본적정성에 따라 구분한 바젤Ⅱ의 3대 필라 중 하나)와 손실보전완충자본(CCB)이 규정한 수준보다 낮은 자본으로 은행이 운영될 수 있도록 최소 자본규정을 임시로 낮춘다.” (217쪽)
이게 무슨 소리야! 이 책은 폴 크루그먼, 제이슨 퍼먼 같은 유명한 경제학자들의 제언을 담았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위기를 극복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을 시행해야 하는가? 여러 짧은 리포트를 한데 모아놓은 이 책은 경알못(경제학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이런저런 경제학 지식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진 않는다. 이 책은 경제학자, 경제정책 입안자, 주식·증권 분석가 같은 전문가를 위한 책이다.
위 문장을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는 경잘알(경제학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나 같은 경알못은 딱히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이다. 물론 내용이 어렵다고 무조건 읽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것저것 모르는 단어를 검색해가며 차근차근 책을 읽으니 조금은 공부가 됐다. 기업을 대상으로한 감가상각 정책이 어떤 효과가 있는지, 히스테리시스(hysteresis)가 무엇인지 등등.
그런데 ‘공부’가 목적이라면, 이보다 더 나은 책이 많다. 바이러스의 실체를 알고 싶다면 『바이러스 쇼크』(2판; 매일경제신문사, 2020)를, 뉴노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싶다면 『우리는 바이러스와 살아간다』(생각의힘, 2020)를, 경제전망을 예측하고 싶다면 『세계미래보고서 2035-2055』(교보문고, 2020)를 읽는 게 좋겠다.
『코로나 경제 전쟁』은 CEPR(Centre for Economic Policy Research, 경제정책연구센터)에서 발행한 전자책 두 종을 편역한 것이다. CEPR은 주로 유럽 대학교에 기반을 둔 1500명 이상의 경제학자들로 구성된 비영리 법인이며, 두 전자책(pdf) 모두 무료로 다운로드받을 수 있다(만약 경제 전문가라면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읽기 전에 이미 원서를 읽지 않았을까?).
『Mitigating the COVID Economic Crisis: Act Fast and Do Whatever It Takes』(2020.3.18.)
https://voxeu.org/content/mitigating-covid-economic-crisis-act-fast-and-do-whatever-it-takes
『Economics in the Time of COVID-19』(2020.3.6.)
https://voxeu.org/content/economics-time-covid-19
https://cepr.org/sites/default/files/news/COVID-19.pdf
원서와 비교해보니 번역서의 괘씸한 점이 눈에 밟힌다. 사소한 걸 먼저 따지자면, “경제 전쟁”이라는 단어가 너무 공격적이다(어그로를 끈다). 국가 간의 ‘무역 전쟁’을 연상케 하지만 책에서는 지금의 세계적인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초국적 협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코로나 경제 전쟁”은 다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는 낚시성 제목이다. 원서 제목이 ‘코로나 경제위기 완화시키기’ ‘코로나19 시대의 경제학’으로 좀 순한데, 출판사에서는 이런 제목을 그대로 쓰면 책이 잘 안 팔릴까 봐 걱정했던 모양이다.
제목에 살짝 양념을 치는 정도는 이해하고 용인할 수 있다. 낚시라고 폄하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독자 한 명에게라도 더 가닿기 위한 노력이라고 칭찬해줄 수도 있다. 아무리 좋은 내용을 담더라도 독자가 읽지 않으면 책은 쓸모없는 종이뭉치일 뿐이다(타는 쓰레기). 독자가 읽을 마음이 생기도록 매운맛을 첨가하는 거야 요리사(편집자)의 재량이라고 생각한다(물론 독자 중에는 나처럼 매운맛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진짜로 괘씸한 점은 본래 원서에 있던 참고문헌(References) 목록을 번역서에서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글을 쓸 때 참고한(인용한) 문헌이 실제로 있음에도 그 목록을 적지 않으면, 그 글은 ‘표절’이 된다. 한국학술단체총연합회 연구윤리지침(2009.9.)에서는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일반적 지식이 아닌 타인의 아이디어나 저작물을 적절한 출처표시 없이 자신의 것처럼 부당하게 사용하는 학문적 부정행위”를 표절로 정의한다. ‘적절한 출처표시’의 한 방법이 참고문헌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다. 원서에 잘 작성돼 있는 목록을 번역서에서 빼버리는 짓은 원저작자들을 비윤리적인 표절자로 만들어버리는 파렴치한 행위다.
학술연구에서는 표절과 상반된 개념으로 ‘인용’이 사용된다. 논의를 더욱 풍성하게 하고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저자는 다른 사람들의 저작물을 인용하여 글을 쓴다(나도 학자는 아니지만 그렇게 한다). 이는 자신의 생각을 그저 주관적인 영역에 머물게 하지 않고 좀더 객관적으로 만든다. 다양한 자료를 참고함으로써 ‘그건 그냥 너 혼자만의 생각이잖아!(뇌피셜이잖아!)’라는 반박에 대항할 수 있게 된다.
『코로나 경제 전쟁』에서는 왜 굳이 참고문헌 목록을 없앴을까? 편집자라면 참고문헌의 중요성을 모를 리 없겠지만, 사실 대부분의 독자는 책 속의 참고문헌 페이지를 잘 거들떠보지 않는다(나도 그렇다).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딱히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저자가 어련히 알아서 잘 설명하겠지), 되려 쓸데없이(?) 페이지를 차지해서 책을 두껍게 만들기도 한다.
이 책은 224쪽의 얇고 가벼운 책이다. 아니, 그렇게 보이도록 디자인되어 있지만 사실 글은 꽤 많은 편이다. 책 사이즈가 큰데 글씨 크기는 작으며 1쪽에 문장이 무려 26행 들어간다. 요즘은 작은 판형에 큰 글씨로 1쪽에 20~21행 정도를 넣는 게 유행이다. 책에 아무리 행수가 많아도 보통은 24행을 넘지 않는다. 이 책이 페이지에 글을 꽉꽉 담은 이유는 책 두께를 줄여서 독자가 책을 집었을 때의 부담감을 줄이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너무 두꺼운 책은 보통 읽기가 꺼려지니 말이다.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굳이 페이지를 차지하는 참고문헌 목록 역시 없애버린 것은 아닐까?
(혹은 마감이 급해서, 귀찮아서, 참고문헌 목록을 빼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도 책을 편집하면서 참고문헌과 색인 페이지를 정리하는 일이 가장 귀찮고 지루하다. ‘어차피 사람들이 잘 읽지도 않는데…’ 작업하는 데에 많은 노동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독자의 편의를 고려해서 참고문헌 목록을 뺐다…라고 용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 책에 어울리는 대상독자는 경제 전문가다. 일반 독자는 대부분 참고문헌 페이지를 안 보고 넘기겠지만 전문가는 좀 다르다. 글을 읽기 전 참고문헌 목록을 살펴보며 글의 신뢰성과 학술적 경향(학자의 성향)을 판단할 수 있다. 글을 읽은 후 참고문헌 목록을 살펴보며 다양한 자료들을 추가로 찾아볼 수도 있다. 전문가를 위한 글이라면 더더욱 참고문헌에 신경썼어야 했다.
그나저나 제목이 어떻고 참고문헌이 어떻고……, 뭐가 중요한가. 『코로나 경제 전쟁』은 잘 팔렸다. 분명 가르침을 받고자 책을 읽었던 것 같은데, 다 읽고 나니 어째 씁쓸함만 남는다. 어째서일까? 내가 편집자로서 양심을 갖고 지적한 문제들이 책 판매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만든 책이 1쇄도 다 못 털어내고 창고에 쌓여 있기 때문일까(남부끄럽지 않게 잘 편집했는지는 의문이지만 내용은 정말 좋은 책인데…, 못난 편집자를 둔 저자에게 증말 미안하다아아아ㅠㅠ).
#한줄평 괘씸한 책(★★☆☆☆)
참고자료
「서점가 달구는 `코로나 경제전쟁`」, <매일경제>, 2020.5.26.
http://vip.mk.co.kr/news/view/21/20/1798128.html
「2020년 상반기 베스트셀러 분야별 동향」, <교보문고>
http://www.kyobobook.co.kr/event/2020/firstBest.jsp
「코로나가 바꾼 서점가…방문객 줄고 온라인 매출 쑥」, <동아일보>, 2020.6.8.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200608/101407340/1
이인재, 『연구윤리의 이해와 실천』, 동문사, 2015.
「펜데믹 시대의 책」, 『출판문화』 651호, 2020.4., 37~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