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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술북스 May 05. 2021

잠재적 가해자 프레임이 기분 나쁜 이유

내가 당했던 성폭력의 경험을 회상하며

우리는 성폭력을 고발하는 여성들에 대해 법이 얼마나 무관심한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폭행을 당했다는 사실 자체를 증명해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이 폭행받아 마땅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까지 증명해야 하는 부담이 오롯이 여성에게 지워진다. (『시크: 여성, 인종, 아름다움, 자본주의에 관한 여덟 편의 글』 209쪽)

#미투

고등학생일 때였다. 나는 한 방에 6명에서 최대 12명까지 우글우글 모여 살던 남자 기숙사에서 지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여럿이 뭉쳐서 한 사람의 바지를 팬티까지 강제로 벗기는 ‘놀이’가 유행했다. 누가 벗김을 당할 타깃이 될지는 순간순간의 분위기가 결정했다. 잠깐의 어색한 침묵, 눈짓으로 통하는 무언의 메시지, 그러곤 갑작스럽게 타깃에게 몰려들어 팔다리를 붙잡고 바지를 벗긴다.


모두가 그 유행을 따르진 않았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당하는 쪽은 대체로 약자였다. 한 친구는 바지가 벗겨지는 것을 넘어 강제로 야동을 보게 됐다. 발기가 되는지 함 보자며 누군가가 야동을 튼 것이다. 당연히 저항했고, 발기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게 웃음거리가 돼서 한동안 그 친구의 별명은 ‘발부’가 되었다(발기부전이라는 뜻이다).


타깃이 내가 되었을 때, 조금 독특한 ‘전략’을 사용했다. 저항해봤자 소용없으며 오히려 더 놀림거리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달은 나는 온몸에 힘을 쫙 빼고 일체 대항하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이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 전략이 통했던 걸까? 집단으로 린치를 가하던 가해자들은 죄책감이 들었는지 놀이를 금방 끝냈다. 무기력하게 있는 나의 바지를 벗기고 있노라니 “너무 강간하는 것 같잖아”라는 말을 하면서 그랬다.


지금 돌이켜보면 대단히 위험한 전략이었다. ‘피해자답지 않은’ 행동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에게 가해자 혹은 방관자들이 “저항하지 않았으니까 너도 사실은 즐겼던 거 아니냐”라는 말을 지껄이지 않는가? 물론 지옥 같은 시간을 빠르게 보내고 상황을 종료시키고자 무저항을 택할 수는 있겠지만, 그 선택은 추후에 객관적으로 피해를 입증하고자 할 때 의외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피해를 고발한 피해자가 진짜 피해자인지 아닌지를 ‘피해자다움’으로 판단하곤 한다. 좀… 부당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힘들다?! 뭐, 이런 하소연을 하려고 남성이 당한 성폭력의 사례를 꺼낸 건 아니다. 한 가지 인정하고 넘어가자면, 섹스를 하든 손만 잡고 자든 B대면데이트를 하든 남녀 간에 성적인 관계를 맺는 장에서 여성은 분명 매우 불리한 위치에 있다. 성범죄에서 피해자는 대체로 여성이고, 반대로 가해자는 대체로 남성이라는 사실에서 그 점이 드러난다. 


국가통계포털 사이트에 들어가서 「경찰청범죄통계」라는 자료를 찾아봤다. 2019년 ‘피해자 성별·연령별’ 통계에서 1만 7120건의 강제추행 피해 사례 중 89퍼센트에 달하는 1만 5303건이 여성이었다. 반면 ‘범죄자 범행시 성별 연령’ 통계에서는 1만 7892명의 강제추행 범죄자 중 약 96퍼센트에 달하는 1만 7234명이 남성이었다. 이 격차는 언제 봐도 숨이 막힐 만큼 압도적이다.


세상의 모든 남자가 가해자고 모든 여자가 피해자는 아니지만, 어떤 성적 침해가 일어났을 때 남자가 가해자이고 여자가 피해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해도 그것이 성급한 일반화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잠재적’이라는 말은 모두를 그 가능성 안으로 끌어들인다. 여성은 잠재적 피해자로서 자신이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빠지고,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로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가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는다.


그냥 의심받아서 기분 나쁜 거잖아? 잠재적 가해자 프레임에 대한 ‘일부’ 남성들의 분노를 이렇게 단순하게 해석하는 건 그들을 너무 바보 취급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야, 의심을 받아서 기부니가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좀더 깊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 있지 않을까? 남성들의 집단적 분노는 단순한 감정 배출을 넘어선 적극적인 저항으로 보인다. 잠재적 가해자라는 의심이 곧이곧대로 ‘진짜 가해자!’라는 확증으로 넘어가는 상황을 경계하는 것이다.


의심에서 확증으로의 논리적 비약은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한 오해 또는 그것의 오용에서 비롯된다.  「미투 운동이 극복해야 할 ‘피해자 중심주의’」(원출처는 계간 『문학동네』 2018년 여름 통권 95호)라는 글에서 이에 관한 내용을 상세히 확인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 권김현영은 피해자 중심주의가 “피해자의 주관적 감정에 지나치게 독점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오용”되었다고 지적한다.


https://wspaper.org/recommendation/21449


나는 피해자 중심주의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고 본다. 특히 권력의 격차로 인해 발생하는 성폭력이나 학교폭력 등의 사건에서는 피해자의 관점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1991년 미국 연방항소법원에서는 어느 성범죄 사건을 “합리적 여성 관점”으로 판결하면서 이렇게 설명했다(성범죄 피해자는 압도적으로 여성이 많기에, 여성 관점을 택한 이 판결은 곧 피해자 중심주의를 적용한 사례다).


여성들이 압도적으로 강간과 성추행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여성은 성적 언행에 대해 우려해야 할 동기가 더 강하다. 경미한 성희롱을 당한 여성은 그 희롱 행위가 폭력적인 성추행의 전조인지를 걱정해도 놀랍지 않다. 남성이 성추행의 피해자가 되는 건 드물기 때문에 여성이 인지할지 모르는 폭력의 위협이나 사회적 배경을 충분히 체감하지 못한 상황에서 성적 언행을 평가할 것이다. (「미투 운동이 극복해야 할 ‘피해자 중심주의’」)


그런데 피해자 중심주의가 ‘피해자 절대주의’로 잘못 이용될 때, 가해자로 의심받는 남성은 무력해진다. 명확한 물증이 남기 어려운 성범죄의 특성상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려면 정황 증거와 피해자 여성의 진술에 크게 의존해야만 하는데, 피해자 절대주의는 “여성의 주관적 경험에 진실의 권위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결국 상대가 의심스럽다는 여성의 말 한마디만으로도 남성은 항변의 여지 없이 가해자로 확정된다. “피해자의 눈물이 증거입니다”라는 밈은 그러한 상황을 조롱하며 등장했다.


피해자 절대주의가 여성에게 마냥 좋지만은 않다. 피해자의 진술이 객관적으로 평가받지 못하고 지나치게 유리하게 받아들여진다면 여성이 진짜 피해를 입었는지의 여부가 그 사람의 피해자다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만약 여성이 피해자답지 않거나 자칫 ‘폭행을 당할 만한’ 행동을 했다면, 상황은 매우 불리해진다.


폭행 당할 만한 행동? 2020년 여성가족부에서는 전국의 만 19세 이상 64세 이하 성인 약 1만 명을 대상으로 한 「2019년 성폭력 안전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그렇다’(매우 또는 약간)와 ‘그렇지 않다’(별로 또는 전혀)로 구분하여 성폭력에 대한 인식을 묻는 문항에서 ‘성폭력은 노출이 심한 옷차림 때문에 일어난다’와 ‘피해자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성폭행을 당했다면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있다’에 그렇다고 답한 비율은 각각 52.3퍼센트와 37.0퍼센트였다.


잘못된 인식이다. 설령 무슨 짓을 하더라도 성폭행을 당해 마땅한 경우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피해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 여기서 성범죄 피해자 혹은 ‘피해호소인’ 여성은 이중으로 부담을 안게 된다. 여성은 자신이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 자체뿐 아니라 자신이 폭행받아 마땅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까지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피해자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기’ 역시 성폭행 가해자들이 많이 쓰는 방식이다. …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조작된 진술들의 힘은 강력했다. 평소 침실에 들어오는 이상한 여자, 내 남자를 유혹하는 엽기적인 여자라는 주장은 일부 대중 사이에서 아주 치명적인 정보처럼, 사건의 핵심을 쥔 사실인 양 회자했다. (『김지은입니다: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 172쪽)


잠재적 가해자 프레임은 ‘피해자다움’의 미러링이다. 이 프레임에서 남성은 이중으로 부담을 안는다. 성범죄 가해자 혹은 ‘결백호소인’ 남성은 단순히 자기가 다른 사람을 성폭행하지 않았음을(가해자가 아님을) 보여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누군가를 폭행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는) 사실까지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이게 정말 내 잘못이야? 남성 역시 자신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보겠지만, 만약 자신의 결백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 억울함이 가득 찬다면 비판의 화살을 내부에서 외부로 돌릴 것이다. 성폭력 안전실태조사에서 ‘성폭력 피해 신고자들 중에는 상대에 대한 분노나 보복심 때문에 성폭력을 거짓으로 신고하는 사람도 있다’라는 항목에 ‘그렇다’고 답한 비율이 39.9퍼센트나 됐다. 즉, 남성은 고발자인 여성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미러링은 역지사지를 체험시켜 상대의 행동 변화를 유도하는 고도의 전략이지만,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다. 미러링을 당한 상대는 자신이 당한 것으로부터 거꾸로 상대가 기존에 받았던 피해를 다시 헤아리는 복잡한 사고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상대는 단순히 보복을 당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라는 복수극의 뻔한 클리셰가 현실에서 재현된다. 오늘날 남녀 갈등이 증폭되는 이유다. 상황이 좀 나아지도록, 프레임에서 벗어나면 좋겠다. 우선 남녀 사이 성적 관계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물론 현재 여성에게 매우 불리하게 기울어져 있는 건 사실이다. 평등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성이 좀더 안전해지는 한편으로, 남성이 성폭력을 당한 사례들이 좀더 많이 보고되어야 하지 않을까? (오해의 여지가 있어 덧붙이자면, 남자도 성폭력을 더 많이 당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사내아이들이 다 그렇지 뭐’라면서 얼버무려지던 피해 사실이 더욱 폭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나의 경험을 다시 떠올려보면, 내 바지가 벗겨진 이유는 내가 남자이기 때문 혹은 날 가해한 ‘친구들’이 남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핵심은 남고생들의 약육강식 세계관 속 나와 그들 사이 힘의 차이에 있다. 나는 약자라서 당했고, 그들은 강자라서 가했다. 미투 운동은 대부분 여성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데(여성이 대체로 약자이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그것이 여성의 전유물은 아니다. 정확히 말해서 미투는 권력 격차를 극복하여 약자가 활용할 수 있는 도구다.


잠재적 가해자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또 한 가지 방법은 역설적이지만 그걸 정면으로 받아내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잠재적’이라는 말은 피해와 가해의 가능성 안으로 모두를 끌어들이기 때문에, 사실상 여기서 완벽하게 탈출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괜히 발뺌하면 상황은 더 불리해진다. 뭔가 찔리는 게 있으니까 가능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 나는 잠재적 가해자가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가해자는 아니야.” 프레임에 담대하게 대응하자. ‘반(反)페미니즘의 선봉장’으로서 2030 남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조던 피터슨 아저씨의 말을 빌리자면,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서라.” 여성이 피해 입증의 책임을 지면서 피해자다움에까지 예속되는 것이 부당하다면, 마찬가지로 남성에게 가해자다운 사람이 아님을 보이라고 요구하는 것 역시 부당하다.


애초에 ‘잠재적 가해자가 맞다/아니다’로 싸울 필요가 없다. 논쟁의 장은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맞다/아니다’로 옮겨가야 한다. 이를테면 성범죄 재판에서 피해자의 진술에 의존해야 할 때 피해를 어떻게 입증해야 하는지, 무엇을 기준으로 유무죄를 정할지를 논의해야 할 것이다. 한겨레에 올라온 「‘동의 중심’ 강간죄 개정, 유죄추정·무고로 이어질까?」라는 기사는 숙고할 만한 논점을 제공한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85692.html#csidx0964035e90fef9bb34607e035384755


글을 마치기 전에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더 주의사항을 이야기하자면, 논의의 장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을 내세우는 건 조심할 필요가 있다. 본래 이 원칙은 “국민에 봉사해야 할 국가가 자신의 주인인 국민을 법적 절차 없이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지, 국가의 주인인 국민들에게 적용되는 원리가 아니다”(「미투 운동이 극복해야 할 ‘피해자 중심주의’」). 국가 권력 앞에서 무력해지는 개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이 원칙 역시 피해자 중심주의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시민은 국가폭력의 잠재적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보통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받은 남성들이 ‘무죄추정의 원칙’을 외치는데,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유무죄가 확실히 가려지기 전까지 자신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고 ‘중립기어’를 박아달라는 것이다. 무조건(무지성) 중립이 과연 바람직한지는 논외로 치더라도, 만약 다른 사람들이 중립기어를 박기를 원한다면 내로남불이 되지 않도록 남성 본인도 중립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성폭력 피해를 주장하는 여성을 다짜고짜 ‘무고죄’로 역고소하는 것이야말로 한참 중립을 벗어난 행동이다. 무고죄가 있다고 확실하게 증명 가능한 경우가 아니라면, 여성 역시 ‘무죄’로 추정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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