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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술북스 Jul 30. 2021

당신 인생의 첫 번째 책을 기억하시나요?

이 마을에서는 잘 익은 보리이삭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늑대가 달린다’고 말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광경이 보리밭 속을 늑대가 달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바람이 너무 강해 보리이삭이 쓰러지는 것을 ‘늑대에게 밟혔다’고 하고, 흉작일 때는 ‘늑대에게 먹혔다’고 말한다. 근사한 표현이긴 하지만, 억울한 부분도 있는 것이 옥의 티다 싶다. ……

동쪽으로 치솟은 산 때문에 마을의 하늘 위를 지나는 구름은 대개 북쪽을 향해 흘러간다. 구름이 흘러가는 그 끝. 북쪽의 고향을 떠올리며 한숨짓는다. 시선을 하늘에서 보리밭으로 되돌리니, 코끝에서 움직이는 자랑스러운 꼬리가 눈에 들어왔다. 할 일도 없고 하여 꼬리털을 다듬기 시작한다. 가을하늘은 높다랗고 아주 맑았다. 올해도 또 추수철이 다가왔다. 보리밭을, 수많은 늑대가 달리고 있었다.

(『늑대와 향신료 1』 12~13쪽.)


태어나서 처음으로 읽은 책이 무엇인가요? 첫사랑, 첫키스 등등 이러한 첫 경험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곤 합니다. 마찬가지로 제 머릿속에는 첫 독서의 추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아주 어릴 적에 부모님이 ‘읽어주던’ 동화책이나 선생님이 억지로 ‘읽도록 강요한’ 청소년 교양도서 따위를 제외하고, 제가 주체적으로 ‘읽고 싶어서’ 손에 집어 든 책은 바로 댄 브라운의 소설 『디셉션 포인트』(북스캔, 2006)입니다.


당시 중학교 2학년생이었던 저는 나이에 걸맞게 중2병을 앓았습니다. 책을 읽으면 교양 있어 보인다는 착각에 빠져서, “디셉션 포인트”라는 뭔가 있어 보이는 제목에 끌리게 됐습니다. 디셉션(deception)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는데 말이죠. 정말 재밌게 읽었고, 한동안 댄 브라운 작가에게 빠져서 『천사와 악마』, 『디지털 포트리스』, 『다빈치 코드』 등등을 읽고 다녔습니다.


소설만 읽었던 것은 아닙니다. 좀더 멋있어 보이기 위해 쓸데없이 두꺼운 책을 옆구리에 끼고 학교 복도를 어슬렁거리기도 했습니다. 『만들어진 신』(김영사, 2007)은 단순명료한 디자인에 604쪽이나 되는 두께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별로 중딩이 읽을 것 같지 않은 이 책을 읽으며, ‘후후후… 나는 너희들과 달리 어른스럽고 지적이고 우아하다’ 이따구 마음을 은연중에 품었죠. 지금 돌이켜보면 이불이 남아나지 않을 만큼 부끄러운 생각이네요.


저의 중2력을 한층 더 끌어올린 촉매제는 바로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투니버스에서 방영하던 <개구리 중사 케로로>를 즐겨 봤는데, ‘쿠루루’라는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던 저는 이 캐릭터 특유의 웃음소리인 ‘끄끄끄…’를 일상에서 따라하기도 했습니다. 으악! 과거의 ‘나’야, 제발 쪽팔리는 짓 좀 그만해! 애니 오타쿠가 아닌 일반인 친구들이 이런 저를 어떻게 바라봤을지 떠올리면 정말이지 소름이 돋습니다. <개구리 중사 케로로>말고도 <블리치>, <은혼>, <클라나드> 등등을 판도라TV라는 사이트를 통해 (불법적인 루트로) 시청했습니다. 그중에서 제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명작은 바로 <늑대와 향신료>입니다.


정말 감명깊게 본 이 애니메이션에는 원작 라이트노벨이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저는 부리나케 서점으로 향했습니다. 당시에 제가 책에 관심이 있든 없든, 아빠는 자주 광화문 교보문고에 저를 데리고 다녔는데요. 아빠가 저에게 ‘같이 서점에 가자’고 제안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제가 아빠에게 ‘서점에 데려다줘’라고 부탁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교보문고의 서가에는 책 『늑대와 향신료』  1~5권이 꽂혀 있던 걸로 기억합니다. 생각보다 권수가 많은데 일단 1권만 사서 읽어보고 생각할까 고민했지만, 아빠는 굳이 귀찮게 다시 사러 올 필요가 있겠냐고 하면서 다섯 권을 전부 사주셨습니다.


책 『늑대와 향신료』는 애니 <늑대와 향신료>보다 훨씬 재밌었습니다. 이럴 수가! 저는 다른 콘텐츠가 아닌, 오직 ‘책’으로만 느낄 수 있는 재미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애니도 OST나 다채로운 장면 등 여러 시청각 요소가 즐거움을 안겨주었지만, 책은 그저 미색 바탕에 검정 글씨가 빼곡히 나열되어 있을 뿐인데도 애니보다 훨씬 풍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해주었죠. 특히 치밀하고 논리적인 이야기 전개, 인물 간에 주고받는 대화에서 드러나는 내적·외적 갈등 묘사는 애니에선 잘 드러나지 않았던 책 고유의 강점이었습니다.

 

저는 지금 출판편집자로서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늑대와 향신료』를 읽지 않았다면, 편집자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재미있는 책이 있다’ 정도는 알아도 ’책 읽기는 (다른 무엇보다도) 재밌다’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테니까요. 독서의 참맛을 알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제 인생의 진정한 첫 책은 『늑대와 향신료 1』(학산문화사, 2007)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늑대와 향신료』를 쓴 하세쿠라 이스나 작가님의 생일은 12월 27일입니다. 어? 나도 이때 태어났는데! 게다가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고 합니다. 헐? 나도 물리학과 들어갔는데!! 소오오오오오오름!!!! 어쩌면 이 작가님은 나를 편집자로 만들어주기 위해 태어났을지도? Q.E.D. 평행이론 증명종료. 흠터레스팅……(네, 그냥 쌉소리 한번 해봤습니다).


슬슬 글을 마칠 때가 됐으니 ‘수미상관’이라는 클리셰 기법을 사용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첫 번째 책을 기억하시나요? 좀더 넓게 생각해서, 각자의 인생책을 한번 떠올려보면 좋겠습니다. 흔히들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이라 하여, 글을 잘 지으려면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다다다’의 일환으로, 책을 통해 삶을 반추해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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