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는 되감기버튼이 없다 <백남준의 장례식>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저는 자랑스러운 한국의 아티스트, 백남준을 꼽을 것입니다.
미디어아트의 창시자인 백남준(Nam Jun Paik, 1932-2006)
예술가의 역할은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라고 그가 말했던 대로,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더 많은 예술을 향유하고 경험하고 소통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는 그것을 더욱 발전시켰죠.
다재다능한 비디오 신디사이저를 이용해 우리는 텔레비전 수상기 캔버스를
레오나르도처럼 정확하게, 르느와르처럼 다채롭게, 피카소처럼 자유롭게, 몬드리안처럼 심오하게 폴록만큼 난폭하게 아스퍼 존스처럼 서정적으로 만든다.
1984년 백남준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퍼포먼스 위성중계를 기획하고 전 세계로 생중계하였습니다.
1949년 조지 오웰은 자신의 소설 < 1984>를 통해 매스미디어와 통신이 발달하는 1984년을 암울하게 그려내며 감시와 통제로 인해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인류의 미래를 암시했습니다.
하지만 백남준은 이 미디어의 발달은 오히려 경계를 없애고 더 많은 예술을 함께 즐길 수 있음을 예견했고 그것을 증명해내기 위해 파리, 뉴욕 등 4개국 방송국이 협력한 TV 위성쇼를 기획했습니다. 조지오웰 당신은 틀렸다고.
음악, 무용, 미술, 코미디, 패션쇼 등 다양한 영역의 100여 명의 예술가들이 이 위성쇼에 참여했고 이 화면은 1984년 1월 1월 뉴욕·파리·베를린·서울 등지에 생중계됐으며 약 2500만 명이 시청했습니다.
쌍방향 소통을 보여주기 위해 백남준은 녹화가 아닌 생방송을 기획했고 전 세계 시청자들은 다른 시공간에서 같은 예술을 즐겼습니다. 우리가 전혀 예측치 못했던 어쩌면 코로나 시대의 공연을 백남준은 그때 미리 통찰하고 있었죠.
그의 인터뷰입니다. 본인이 예측한 미래의 예술에 대한 확신과 성공적인 퍼포먼스를 만들어냈다는 자신감이 느껴지는 위트 있는 인터뷰입니다. 얼마나 뿌듯하면 염라대왕한테 말할 것이라고 인터뷰를 했을까요?
미디어아트뿐 아니라 다양한 퍼포먼스를 통해 예술의 영역을 넓혀갔던 백남준은 그의 장례식마저도 하나의 퍼포먼스처럼 남았습니다.
2006년 뉴욕에서 그가 떠나던 날, 수많은 조문객이 그를 찾았고 그의 부인인 시게코 구보다와 그를 사랑했던 많은 명사들, 예술가들이 그를 떠나보냈습니다. 존 레넌의 부인 오노 요코, 지난해 세상을 떠난 대지예술의 거장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 무용가 머스 커닝행 등 많은 이들이 그와의 마지막을 함께 했고 그를 추모하며 추모사를 낭독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생전에 펼쳤던 퍼포먼스,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른 이 기념비적인 퍼포먼스가 진행되었습니다. 넥타이를 자르며 사람들은 그의 삶과 예술을 기억했습니다.
사람들의 웃음 뒤에는 분명 더 큰 슬픔이 있었을지언정, 그들은 백남준의 유쾌하고도 엉뚱한 이 퍼포먼스를 재현하면서 눈물보다는 웃음으로 그를 추모하였습니다.
장례식조차도 하나의 예술처럼, 퍼포먼스처럼 만들어버린 백남준을 보며, 나의 장례식도 저러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죽음은 참으로 남겨진 자들에게 가혹한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일 겁니다.
백남준 역시 예측할 수 없었던 뉴욕 출장에서의 건강악화로 인한 죽음.
늘 예술에 도전하고 새로운 시도를 만들어낸 이 위대한 예술가의 삶은 그 끝을 모두에게 예술로 기억되게 만들었습니다. 많은 어록을 남긴 그가 한 말 중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인생에는 되감기 버튼이 없다.
There is no rewind for life.
미래를 사유하고 통찰한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는 그 예술을 만들어내기 위해
수만 번의 되감기 버튼을 눌렀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가 알아낸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인생에는 되감기 버튼이 없다는 것.
되감기 버튼이 없는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갔던 백남준은 필히 멀리 떠나는 길에 염라대왕에게 자신의 위성쇼를 자랑했음이 틀림없습니다.
백남준의 장례식을 보며 저도 저의 장례식이 밝은 분위기였음 좋겠다 언젠가 생각했습니다.
가장 가까웠던 오빠의 장례식에서, 우리 모두는 오빠를 위해 모였지만 오빠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젊은 사람 장례식에 이렇게 사람이 많이 오냐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좋은 사람이었던 오빠가.
어색함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호스트였던 오빠가 없었어요.
기억의 조작인지 망각인지 오빠의 장례식은 그렇게 내 머릿속에서 슬퍼하는 우리 가족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하는 오빠의 사람들과 그것을 풀어줘야 한다는 나의 억지웃음 정도로만 남았습니다.
오빠의 장례식을 보며, 장례식의 주인공은 어쩌면 오빠가 아니라, 그의 떠남을 슬퍼해주러 온 감사한 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빠는 우리가 너무 슬프지 않았으면 바랬을 것 같습니다.
저는 유쾌한 호스트가 되고 싶습니다.
너를 만나면 밝은 에너지가 있어서 좋아:)라고 말해주는 나의 사람들이 장례식장에서 그 에너지를 느껴주길 바라요. 그게 내가 나의 장례식을 기획하는 이유입니다. (저는 제 장례식에 틀어놓은 배경음악도 선정해놓았습니다. 어딘가에 숨겨놓았어요.) 백남준의 장례식이, 그의 말이 저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넥타이는 멜뿐만 아니라 자를 수도 있으며,
피아노는 연주뿐 아니라 두들겨 부술 수도 있다.
백남준
모든 것에는 정답이 없고,
인생에는 되감기 버튼이 없으니 오늘 하루는 항상,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 라는 마음으로 살아가지요:)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즐겁게, 행복하게.
아니면 뭐 슬픈 날도 있는 거죠.
안되면.. 죽기밖에 더하냐 이런 맘으로 조금은 편안하게, 여유 있게. 단순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