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절절 맞는 이야기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실바가 인터뷰한 이들의 인생이 나의 인생이라 생각 하며 책을 읽었다. 마치 거울을 들고 내 면면을 뜯어보는 기분이 들어 한번 잡은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커밍업쇼트 ‐ 불확실한 시대 성인이 되지 못하는 청년들 이야기>는 미국사회에서의 문화와 불평등을 연구하는 사회학자인 제니퍼 실바가 2008년에서 2010년까지 100명의 미국 노동 계급 청년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쓴 책이다. 인종과 성별, 계급이라는 층위와 신자유주의의 배경을 덧대어 포스트산업 노동계급 청년들이 성인이 되지 못하는 모습을 분석한다. 분명 국적, 성별, 인종이 다른 이들을 대상으로 10년 전에 진행된 인터뷰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보이는 삶은 2022년 한국에 사는 청년인 나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시공간의 차원을 넘어 느끼는 동질감이 묘한 안도감을 주기까지 하였다.
1장인 < 리스크 사회에서 성인이 된다는 것>에서는 밀레니얼 시대의 노동 계급 청년들의 자조와 한탄을 체험한다. 고등교육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발견하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 속에 학위까지 따고도, 부모세대가같은 나이대에 이루어낸 것들을 이루어내지 못한데서 오는 패배감의 화살은 어디로 향해야 하나. 실바는 성인기 이행 지표인 졸업, 결혼, 승진, 출산을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해보이는 어른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어른이라고서술할 수 있는지 다루었다. 밀레니얼 세대가 자기 탐험 과정을 위해 순응, 구조, 책임을 회피한다(30쪽)는 조롱과 마치 '자기에 집중'하기 위해 성인기를 유예시키고 있다는 식의 대중적, 학술적 시선의 전제에는 선택의 가능성을 놓는다. 성인기를 탐험으로 가득한 모험처럼 보는 관점에는 마치 청년들이 다양한 가능성과 기회에 둘러쌓여 있고 그들이 겪는 혼란과 불안은 수많은 선택 중 최고의 선택을 어떻게, 무엇으로 해야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 보고있다. 하지만 이는 '선택의 부재'를 무시하는 것이다. 노동 계급 청년들에게는 성인기로 가는 과정이 지연되는 것이 아니라 근원이 파괴되고 있다고 작가는 보았다.
결국 그 선택의 부재가 가리키는화살촉은 청년 자신을 향해 있음을 직감하면서.
실바에 의하면 이들(실바의 인터뷰이들이자 나를 포함한 밀레니얼 세대 노동 계급 청년들을 지칭한다. 한국에선 소위 MZ세대로 두루뭉술하게 집단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의 성인기는 인종, 계급, 젠더 등과 결부되어 극적으로 새로운 퍼즐(32쪽)을 맞춘다. 새롭게 형성된 노동 계급의 자아는 감정과 정신 건강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고 그 토대위에 자신의 서사를 세운다. 자조적인 이야기들을 거름처럼 묻어 둔 채 자신의 감정 층위에서 자아를 관리하고 계획하여 심리 변화를 꾀하는 식(35쪽)으로 자신의 존엄을 정의한다.과거 종교와 도덕 등이 전통적 자아 양식을 구조화한 반면, 그 자리를 대체한 치료 모델은 감정과 심리 발달에 집착하는 내향적인 자아를 정립한다(50쪽).감정 및 심리의 측면에서 치료 에토스가 마치 유행처럼 시류 속에 들어왔음은 한국사회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삶의 목적', '진정한 나로 살아가는 법'과 같은 문구가 범람하고 정신건강, 마음 다스리기와 같은 힐링의 분야는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오은영 박사와 같은 인물이 위인대접을 받고, 하물며 개의 마음까지도 알아차리는 강형욱 훈련사가 인기있는 이유, 죽고싶지만 떡볶이는 먹고싶다는 류의 에세이들이베스트셀러가 되는것도 어쩌면 심리, 감정적 성장에 집착하는 시대의 반영이지 않을까.
하지만 이러한 치료 에토스와 변형되는 자아의 서사마저 계급에 따라 획득 여부가 달라진다. 치료적 자아 서사를 성공적으로 창출하려면 언어 능력, 감정 표현, 물질 자원으로 구성된 연장세트tool kit가 필요하지만 노동계급에겐 그런 하비투스가 없다(62쪽)고 실바는 주장한다. 노동계급에겐 치료 언어와 표현은 경험해본 익숙한것도, 본인의 경제생활에 필요한 것도 아니다. 실바는 이러한 현상을 계급의 측면에서 단정해놓았지만 나는 이현상이 한국사회에 적용해보면 세대의 측면에서도 새로운 갈래가 되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 예시를 들자면, 나의 부모님은 실바가 말하는 블루칼라 노동 계급으로서 치료언어와 서사에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나는 대중문화의 흡수와 노동환경의 질적 개선 등 다양한 영향으로 인해 치료언어와 서사에 비교적 익숙한 편이다. 본인들보다 더 나은 계급으로 사회에서 살길 바라는 한국 부모님 세대 특유의 교육열(우리는 이걸자식사랑이라 포장하기도 한다)은 자식의 경제,사회적인 실질적 계급 이동을 달성시키는데 실패할지라도 적어도 자식의 사회적 민감성과 언어, 표현, 자아성찰과 같은 심리적 자원의 정교함을 높인다. 즉 경제적, 사회적 계급 상승은 실패했으나 문화적 하비투스(안목, 언어, 취향, 자아)의 영역은 넓어지고 깊어진 어른으로 자식이 성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개인적 측면에서도 불행에 맞닿기 쉬우며 결국 가족관계 안에서 부모님과 자식 사이에 생기는 하비투스의 차이로 또 다른 심리적 거리감을 생성한다. 계급도 감정도 꼭 물려받는것은 아니다. 간혹 계급은 물려받았지만 안목과 취향같은 문화자본은 습득을 넘어서는 경우도 있다. 수많은 외부적 요인들의 범람으로 인해 그것은 오늘날에 더욱 쉬워졌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불행이다. 본인이 사회로부터 획득해온 안목과 문화자본들. 그것들로부터 낯설다는 느낌을 받고 그것을 자식만큼 체감하지 않는 부모님 사이에서 한국의 청년들은 괴로워한다.
실바의 인터뷰 대상들 중 많은 이들이 가족과의 과거에서 병리적 사고를 가지고 그들을 성장시킨 어른들(부모, 교사)의 무지와 무관심을 비롯한 것들에서 받아온 고통을 감정적 치료로서 구원받으려 하지만, 한국에서는그 구원적 서사의 질감이 다를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패배감이나 개천에서 용나고도실거주지가 개천임에 갑갑함을 느끼는 허무주의 등은 이시대 한국사회에서볼 수 있는 다양한 청년들의 에토스이다. 이러한 서사 또한 병리적 사고와 치료적 에토스라는 단어로 묶어낼 수있지만 그것을 여과해보면 한국사회에서 부모‐자식의 관계 : 효심, 교육열(자식애) 등이 가지는 특수성이 어떻게 청년들을 어른으로 만들지 못하는지에 대한 한국사회에 맞는 K‐분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2장 < 현재라는 감옥에 갇힌 사람들> 에서는 성인기에 이르는 길을 막는 장애물인 동시에 그 상황을 타파할수 있는 것도 다시 교육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계층 상승을 원하는 노동 계급 청년들의 관점으로 돌아와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교육이다. 하지만 그 교육이 무엇에 대한 교육인지를 다시 찬찬히 살펴봐야 할 필요성을 실바는 언급한다. 그들은 체계의 규칙에익숙하지 않아 구조적인 불리함을 안고 시작하는데(99쪽) 제도자본(학위)을 경제자본으로 전환하는 법은 배우지 못한다. 이들의 사례만 봐도 교육을 노동 시장에서 활용하는 법을 아는
것이 학위 자체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103쪽). 결국 대학은 자본을 또 다른 자본으로 전환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이들에겐 등록금 대출이나 늘리는 임시처소가 될 뿐이다. 보르디외는 교육 체계가행위자들에게 제 정당성을 확신시키지만 그 배후에는 불평등을 재생산한다고 주장한다. 노동 계급 청년들이자기 삶을 규정하는 제도들에 맞닥뜨렸을 때 무력감과 어리둥절함을 느끼는 첫 장소가 교육기관이라는 것이 애석하게 느껴졌다.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시스템 속에서 교사 개인이 할 수 있는 역할의 최선이 무엇일까. 학자금지원 신청서를 적는 방법을 몰라 대학진학을 포기한 알리사와(169쪽), 자신이 adhd임을 부모와 교사 누구도 발견하지 못해 성인이 되어 스스로 알아냈다는 앰버의 인터뷰(168쪽)를 보며 교사로서 책임감이 무거워지는 것은캄캄한 어둠같은 시스템 속에서도 미약하게나마 전조등을 킬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자리가 교사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니카처럼 '자신의 삶과 관련되어 있는 구조적 불확실, 긴장, 실패를 자아라는 가장 내밀한 수준에서 해결하고 있는'(214쪽) 청년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녀가 예술대학에서 3만달러의 대출금을 부담하면서도 사진이라는 예술 영역을 선택한 것은, 그게 예술이 되었어야하는 것은 필연적인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예술은 그녀가 과거 삶을 지탱하게 했던 술과 약물과 같은, 모르핀과도 같은 분야이기 때문이다. 치료에토스로자신의 자아에 서사를 불어넣는 데 예술은 큰 몫을 한다. 예술교육을 하는 이의 관점에서 모니카의 인터뷰는 예술교육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불완전한 시대에 신자유주의는 개인을 자기만의 방으로 밀어넣고 그 것을 합리화 한다. 예술은 그렇게 가두어진 개인에게 일시적인 숨통이 될 수도 있다.(물론 거기서 그쳐선 안된다.) 더 나아가 예술은 개인이 그 벽을 부수고 나올 수 있는 창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3장 <불안한 친밀감들>에서는 리스크 사회 안에서 개인이 가지는 사적영역마저도 불안정성에 기대있음을말한다. 사랑, 결혼, 가족과 같은 분야마저도 협상의 대상이 되며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구슬이 되어 개인의불안함을 증대시킨다. 실직, 질병, 장애같은 경제적, 사회적 충격을 온전히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시대에 친밀함은 또 하나의 리스크가 되는 것이다(119쪽). 결혼이 기존의 부모세대로부터의 경제적, 장소적, 정서적 독립으로서 도피처가 되기도 하는데 실은 그 도피처가 또 다른 소외와 현실자각의 장소가 되버림으로써 결혼으로부터얻게 될 환상적 이익을 충족하지 못하고 이혼해버리거나 참고 사는 일은 너무도 흔하다. 커플들은 헌신과 영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개인적 욕망과 필요를 희생할지를 매일매일 판단해야 하며(138쪽) 결혼을 하지 않은 이들도 무언가에 "만족"할 바에는 혼자 남는 삶을 택한다. 생활 수준을 향상시킬 능력이 없는 이 때문에 자신이 확보한약간의 자율성마저 포기하지는 않으려는 것이다(125쪽). 이러한 인터뷰 내용들은 2000년대 미국 노동 계급의여성들이 가지는 결혼에 대한 개인적 하소연으로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확신컨대 이러한 한탄은 현재 한국의 결혼적령기라 불려지는 여성들(가임기여성지도가 나오는 나라에서 결혼적령기라는 단어는 비교적 교양있어보일 정도다) 이 모인 자리에서 최소 한번 이상은 나오는 이야기들이므로.
5장에서 언급하는 무드경제는 치료에토스와 더불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꼭 어울린다. 힘없는 노동 계급 청년들이 스스로의 행복에 책임이 있다고 느끼게 만들기(255쪽) 때문이다. 무드경제는 개인을 가장 믿을 수있는 대상이자 가장 불안한 리스크로 만든다. 신자유주의 문화 속에서 이러한 무드는 청년들이 사회보다 개인의 변화에 몰입하게 만들고 이는 사회적 단절을 만든다. 이러한 사회에선 통곡의 벽에서 벽에 대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오열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부여잡고 울지 않는 것이다. 공감해주지 못하는
벽(오늘날에 나는 이것을 sns에서도 쉽게 발견한다) 을 잡고 우는 이들이 현재에 인정의 부재를 겪는 이들의 상황과 똑같지 않을까.
김중식 시인의 <이탈한 자가 문득> 이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자기성찰의 궤도를 뱅뱅도는 밀레니얼 노동계급 청년들이 실바의 마지막 말처럼 존엄과 진보의 새로운 정의를 향해 이탈했으면 좋겠다.
치료에토스나 감정관리로 환원되는 발자욱을 따라 걷지만 말고 마음껏 폭발하듯 이탈하여 나아가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