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프라이드호가 용기포 신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백령도’라고 쓰인 하얀색 지명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지역에서는 이렇게 지명을 나타내는 것을 본 기억이 없으므로 섬에 들어온 것을 환영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 속에 또 다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들어올 때는 네 맘대로지만, 나갈 때는 하늘의 뜻대로’라는 뜻이 하얀 글자 뒤에 숨어 있었다. 예정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북위 37.52도에 있는 백령도는 남한에서 갈 수 있는 가장 북쪽 섬이다. 바다 건너 북한 황해도 용연군은 17km, 중국 산동반도는 195km 떨어져 있다. 백령도와 인천의 거리는 228km나 되어 중국보다 멀다. 예전에는 인천에서 백령도까지 뱃길은 열 시간 이상 걸렸다. 고속여객선이 취항한 이후 네 시간으로 줄었지만, 바닷길은 여전히 멀고 험하다. 그래서인지 배에 오르기도 전에 멀미약을 먹거나 챙기는 친구가 대부분이었다. 우리나라 최북단에 있는 백령도가 어떻게 우리 땅이 됐을까 싶을 정도로 북한과 가깝게 있어 늘 긴장감이 도는 곳이다.
비가 내린다는 기상예보와 달리 구름만 끼어 있었다. 마중 나온 가이드가 안내하는 대로 여객터미널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버스에 올랐다. 우리 일행 열세 명과 일본인 남자 한 명, 우리보다 연배인 부부를 포함해 모두 열여섯 명이 자리를 잡았다. 버스에 오른 지 십 분도 안 돼 가이드 겸 운전사인 김 반장에 이끌려 진촌에 있는 허름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점심 한 끼 식사로는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1박 2일 여행하러 와서 네 끼를 여기에서 해결하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단체 카톡방에 백령도 여행 참가자를 모집한다는 공지가 떴을 때, 난 갈 마음도 관심도 없었다. 뭣 모르고 오는 외지인을 호락호락 들여보내거나 내보내지 않는 곳임을 알고 있었고, 십여 년 전에 이미 다녀온 곳이기 때문이었다. 군 복무 시절엔 그곳에 있는 시설을 관리하는 담당자, 회사 다닐 때는 통신 시설을 운영하는 기관 책임자로 일했다. 하루면 끝낼 수 있는 일로 직원 출장을 보내도 배편이 고르지 않아 보통 일주일이 지나야 돌아오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심한 경우 보름 동안이나 발이 묶여 나오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백령도 상황을 이용하여 일상에서 벗어나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싶어 출장을 시도했던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직장 상사는 오래 자리를 비워 둘 수 없다는 이유로 끝내 출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삼십 년이 지난 지금, 배편도 늘고 배 성능도 좋아졌기 때문에 오랜 친구들과 섬을 여행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바쁜 회사 일을 뒤로하고, 며칠씩 발이 묶일지도 모르는 곳으로 간다는 것이 선뜻 내키지 않았다. 열 명도 채워지지 않은 참가자를 보면서 따라나서야 할 마땅한 구실도 찾을 수 없었다. 귀한 시간을 내면서까지 마음 졸이며 여행할 이유도 없었다. 여유로운 시간이 많아 색다른 경험을 하고자 했다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백령도 여행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단톡방에 계속 올라오는 친구의 참가 권유를 난 차갑게 외면했다.
“ 너~내 친구지?”
전장군이라 불리는 친구의 전화였다. 출발 날짜는 다가오는데 참가자는 아홉 명에서 좀처럼 늘지 않고 그대로 있던 때였다. 그다음 말이 무엇인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명단에 넣어, 갈게”
“ 열 명 채웠다”
이번 여행의 총무를 맡은 전장군의 환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목소리에서 간절함을 느꼈기 때문에 차마 갈 수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 많은 친구 중에 제일 먼저 나에게 전화했든 마지막이었든 상관없이 백령도 여행에 따라나서기로 마음먹었다.
백령도 여행 참가를 말해놓고, 실제로는 날씨 때문에 갈 수 없게 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던 나에게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영상 이십 도를 오르내리던 날씨는 출발 당일부터 비가 오면서 기온이 십도 아래로 내려간다는 예보였다. 사월엔 날씨 변화가 심해 배의 출항이 매끄럽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던 내가 바라던 바였다. 여행경비를 송금하고 나서도 여행 준비도 갈 마음도 먹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내가 바라고, 예상한 대로 상황은 맞아 돌아가고 있었다. 단톡방에는 출발 전날 오후에 출항 여부를 알려준다는 메시지가 올라왔다. 여행이 취소될 것으로 예상했다. 간다고 해도 당일 인천항 대합실에서 두어 시간 앉아 있다가 되돌아올 것으로 생각했다. 정상 출항을 알리는 톡을 받은 늦은 오후부터 여행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비에 대비하여 우위와 우산, 1박 2일에 필요한 속옷과 양말, 약품을 준비했다. 비가 온다는 예보에도 배가 뜬다는 것은 다음 날 올 때도 문제없이 배가 뜰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설사 지연된다고 해도 하루 정도일 거라고 확신했다.
8시 30분 인천항을 출발해서 백령도로 가는 코리아프라이드호에 올랐다. 바람도 물결도 잔잔하고, 하늘은 흐렸다, 넓은 배 안 의자는 거의 반 이상이 비어있었다. 단체 여행객도 눈에 띄지 않았다. 옆에 앉은 친구는 배가 별 탈 없이 운항하여 반드시 내일 돌아와야 중요한 일을 처리할 수 있다고 하소연했다. 사정이 생겨 못 간다는 자신을 윽박질러 배를 타게 했다고 전장군의 횡포를 나에게 일러바쳤다. 개인적인 사정을 이야기하자면 나도 마찬가지였다. 관계기관에서 회사 실사를 나온다고 한 날이 돌아오는 날 바로 다음 날이었다. 이왕 가기로 한 것, 이미 배는 떠나고 있는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즐기자는 마음으로 자리를 옮겨 널찍한 좌석에서 눈을 붙였다.
순두부찌개로 점심을 때우고 밖으로 나오자 빗방울이 떨어졌다. 우산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식당에서 가까운 심청각으로 이동했다. 심청이 몸을 내 던진 인당수는 백령도 북서쪽 두무진 앞 바다라고 안내 책자에는 씌어 있었다. 우리가 방문한 심청각은 두무진에서 동쪽으로 한참 떨어진 백령도 북쪽 해안에 자리 잡고 있다. 백령도가 심청전의 배경이었음을 알리기 위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자리를 잡은 듯했다. 이 층으로 지은 건물 내부에는 그림과 인형으로 심청전을 재현해 놓았다. 세금을 들여서 이런 것까지 만들어야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건물은 번듯한데 진열품이 조악하고, 억지스러워 눈길이 가지 않았다. 가이드가 우리에게 준 시간의 반의반도 쓰지 않고 차에 올랐다. 이런 것을 두고 주마간산이라고 하지 않던가.
서쪽으로 얼마 가지 않아 작은 포구가 나타났다. 사자바위라는 작은 돌섬이 보였다. 태풍으로 바위 일부가 사라져 이구아나 바위로 바뀌었다는 김반장의 우스갯소리를 뒤로 하고, 확인 도장 받고 돌아오듯 사진 한 장 찍고 버스에 올랐다.
백령도 여행의 꽃이라 불리는 두무진을 향해 버스는 달리기 시작했다. 두무진이 가까워질수록 차창에 부딪히는 빗방울이 굵어졌다. 우산을 쓰지 않으면 걸어 다닐 수도, 구경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이렇게 비가 내리면 유람선 관광을 할 수 없어 두무진 주변 산책으로 일정을 변경해야 할 것 같다고 김반장 안내방송이 나왔다. 방송이 나오자마자 애초 일정표에 있는 계획대로 유람선 관광을 진행하자는 회장의 말이 튀어나왔다. 잠시 후, 김반장은 해상 유람선 운항이 기상 때문에 어려운 데 자신이 사정해서 어렵게 배가 뜨게 되었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비록 비는 내리지만, 일정표에도 있고 바람도 없는데 운행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 보였다. 관광객이 많지 않아 수입이 별로 없으므로 유람선 측이 핑계를 대고 있다는 의심이 들었다. 공치사를 늘어놓는 김반장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이 바닥에서 힘 좀 쓰는 사람이라고 자랑하고 싶은 게 확실했다.
김반장은 가는 길에 있는 장촌포구 인근 바다에 솟아있는 용틀임 바위로 우리를 안내했다. 백령도 서쪽에 있는 볼거리를 오늘 하루 모두 들러보려는 속셈 같았다. 용이 몸을 뒤틀며 승천하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했다. 몰아치는 파도와 바람을 이겨 내고 살아남은 해안절벽 일부가 뾰족하고 구불구불 뒤틀어진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바다에 접한 주변 풍경을 보는 둥 마는 둥 서둘러 사진만 찍고 버스에 올랐다. 날씨가 좋았다면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내리는 비와 함께 안개가 서서히 섬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곳만 봄이 제대로 온 것일까.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산자락에는 연분홍 진달래가 활짝 피어 있었다. 길가에 있는 벚나무의 꽃눈도 부풀어만 있을 뿐 보름 정도가 지나야 필 것 같았다. 진달래와 벚꽃이 예년과 달리, 거의 동시에 핀 것이 올봄 집 주변 풍경이었다. 꽃이 피는 순서도, 지역 차이도 사라지게 만들어 버린 날씨는 지구온난화가 원인이라는 말 한마디에 당연한 듯 받아들였다. 이렇게 미쳐 날뛰는 날씨가 이곳에선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수도권보다 북쪽에 자리 잡고 있고, 바다에 둘러싸여 있어 기온 변화가 심하게 나타나지 않는 지형적인 특성 탓이다.
비가 오면서 기온이 내려가고 있었다. 습도가 높은 탓에 얼굴에 부딪히는 비바람이 차가웠다. 우산으로 비와 바람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십여 년 전, 직장 여직원이 선물해 준 연두색 우의를 꺼내 입었다. 그동안 입을 기회가 없어 장롱 깊이 넣어 두기만 하다가 이번에 챙겨왔다. 삼십 대였던 그 여직원도 이젠 오십 대가 되어 이런 우의를 입고 산에 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비에 젖은 바닥이 미끄럽다고 조심하라는 김반장의 말에 고양이 걸음으로 유람선에 올랐다. 배가 포구를 벗어나자 창밖에 너른 바다가 나타났다. 바다와 하늘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사방은 온통 뿌옇게 변해있었다. 여러 장군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하는 모습 같다고 해서 두무진이라고 했단다. 기묘한 바위가 바다에 펼쳐져 있는 모습이 거제의 해금강과 같아 서해의 해금강이라고도 불린다고 했다. 어느 곳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라, 자신의 이름 그대로 두무진이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려 보였다. 약 10억 년 전 쌓인 모래와 자갈이 굳어져 사암이 된 후, 높은 압력과 온도에 의해 규암으로 변해 퇴적 당시의 구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두무진은 그 당시의 환경을 유추할 수 있는 곳이라는 학술 가치를 떠나 모습 자체가 경이로웠다.
10억 년에서 백 년이라는 시간은 우리의 삶에서 눈 깜짝할 시간만큼 짧다는 것, 우리의 존재가 세상에서 먼지와 같다는 것을 두무진은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바다에 널려 있는 바위들을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선미에는 몸이 젖든 말든, 우산이 바람에 뒤집히든 말든 새로운 풍경이 나타날 때마다 사람들이 연신 들락거렸다. 모두가 풍경에 사로잡혀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사람이 많지 않아 누리는 호사였다. 날씨가 좋고, 관광객이 많았다면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해안선을 따라 30분 정도 가던 유람선은 뱃머리를 돌려 두무진 포구로 향했다.
유람선에 내려 저녁 만찬이 준비된 횟집으로 가고 있을 때였다. 핸드폰에 문자가 날라왔다. 당연히 회사 일과 관련 문자라고 생각했다.
‘4/5(인천행)13:30분 코리아프라이드호는 해상의 기상악화로 운항이 통제되었습니다. 예매하신 표는 4/6(인천행)13:30분 코리아프라이드호로 자동 순연처리 되오며 순연처리 시 좌석이 변경되오니 이용에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고려고속훼리’
두 개의 4자가 붙은 4월 4일이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갔다. 인천항을 떠날 때부터 배 창밖으로 보이던 회색 하늘과 두 개의 4자에서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우리를 감싸고 있었음을 알지 못했다. 날짜에 숨겨진 불길한 기운이 어김없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날은 재수 없는 날짜라고 누가 나서서 여행 중단이나 연기를 말해야 했다. 하루를 댕겼더라면, 아니면 하루를 미루었더라면 이렇게 섬에 갇히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배가 인천항을 떠날 때부터 이미 이런 사태를 알고 있는 사람마냥 모두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당연히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재밌는 여행 옵션 중 하나를 선택한 것처럼 보였다. 나 또한 그랬다. 내일 떠나면 못 보고 가는 것이 많아 아쉬워하며 발길을 쉽게 떼지 못했을 터였다. 예정보다 늘어난 반나절 동안 백령도 곳곳을 느긋하게 볼 수 있으리라. 김반장은 여유롭게 백령도 곳곳을 볼 수 있게 되어서 좋다고 우리를 위로했다.
우럭, 해삼, 노래미 같은 백령도 자연산 횟감으로 차려진 저녁을 누구 하나 불안해하지 않고 즐기기 시작했다. 오는 배 안에서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던 친구도 일정을 미뤘는지 웃는 얼굴이었다. 저녁이 마무리될 무렵, 한잔 술로 열기가 오른 저녁 자리를 빌려 김반장은 마술쇼로 한층 더 분위기를 달구었다. 관광수요가 많지 않은 비수기에는 이런 이벤트를 통해서 수입을 충당하고 있는 듯했다.
장산곶이 회색 바다 너머로 희미하게 보였다. 비가 오는 탓에 땅거미가 일찍 깔리고 있었다. 북한 땅을 마주 보고 있어도 긴장감은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었다. 한적한 포구에 자리 잡은 평화로운 마을일 뿐이었다. 오가는 사람도, 문을 연 횟집도 거의 없어 적막했다. 요즘이 단체 관광객이 들어오지 않는 계절이라서 한적하다는 김반장의 말을 흘려들었는데, 그 말의 의미를 실제로 느끼기까지 반나절이 걸리지 않은 셈이었다.
배와 횟집이 어우러진 풍경이 예전에 왔던 곳처럼 눈에 익었다. 어릴 때 놀던 화수부두나 소래 포구의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일까.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인천과 황해도라는 지명도 이곳을 낯설지 않게 하는 데 한몫했다. 그렇다고 해도 친구들 말처럼 이곳을 다시 방문할 매력을 찾을 수 없었다. 다른 곳에선 볼 수 없는 풍경이 여러 개 있다고 해도 다시 오고 싶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불안감과 살아 있는 동안 가봐야 할 곳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