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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로롱 Oct 22. 2023

10년

 큰아들의 뇌종양 항암 치료가 끝난 지 10년 하고 6개월이 지났다. 정기검사를 받기 위해 병원에 갔는데 담당의사는 10년이 넘었으니 이제는 걱정하지 말고 2~3년에 한 번씩 검사받으면 된다고 한다. 6개월마다 마음을 졸였는데 이제는 2년에 한 번만 그러면 되는 것이다. 내게 10년이란 시간은 ‘혹시나 재발하지 않을까, 큰아들이 먼저 죽는다면 그 고통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하는 불안과 두려움의 시간이었다.


 전화기에서 들리던 아내의 울음 섞인 떨리는 목소리 “여보, 병원에 와봐야겠어. 정환이 머릿속에 혹이 …….” 전화를 끊고 탕비실 구석에 쪼그려 앉아 떨리는 마음을 한참 동안 진정시켜야 했다. 그날 저녁 아들이 좋아하는 식당에 가서 쇠고기를 구워 주며 치료만 잘 받으면 나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다시 이 식당에서 아들과 같이 식사할 날이 있을까’하는 생각에 눈물 반, 소주 반을 마셨다. 수술실에 들어가는 아들의 손을 잡으며 끝내 눈물을 터트렸고 수술실 앞 전광판을 보며 기다렸던 시간, 항암 치료를 위해 입원했을 때 순서를 기다리며 뽑은 번호표로 아들의 회복을 기원하며 접은 종이학(아직도 지갑 안에 부적처럼 넣고 다닌다), 병원에 가기 위해 한겨울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큰아들과 같이 기차를 기다리던 일, 큰아들이 25살이 되던 해에 나는 지금 죽어도 되니 내 남은 시간을 아들에게 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일 등 그때의 일들을 생각하면 10년이 지난 지금도 방금 일어난 일처럼 몸서리친다.


 10년이란 시간을 어떻게 지낼 수 있었을까. 일상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암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으로 내가 흔들리면 큰아들은 더 큰 두려움을 가질 것 같아 ‘낫는데 오래 걸리는 병’으로 치료와 관리를 잘하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아들이 치료를 자포자기하지 않도록 다독였다. 불안과 두려움이 문득문득 생겼지만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 더 크게 자주 웃었다. 아들이 우울하거나 힘든 표정을 하고 있으면 같이 운동하거나 동네를 산책했다.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 읽고 있는 책에 대한 이야기, 걸을 때는 자세를 어떻게 하면서 걸어야 하는지 등 평범한 대화를 했다. 그러나 아들의 작은 마음의 동요에도 온 신경이 곧추섰다. 나보다 아들이 먼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떨쳐내기 어려웠다. 한밤중에도 자다 일어나 아들의 잠든 모습을 보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버스를 타고 출근하다가 아들 또래의 건강한 학생들을 보면 눈물이 났다.


 그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큰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취직하여 벌써 직장인 4년 차가 되었다. 나는 퇴직하여 제2의 인생을 준비한다며 대학에 다니고 있고 중학교 1학년이었던 작은아들은 제대하고 올해 대학교 4학년 졸업반이다. 우리 가족은 큰아들이 병원에 다녔던 일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내는 아내 대로, 나는 나 대로, 큰아들은 큰아들 대로, 작은아들은 작은아들 대로 고통의 시간이었다. 너무 힘든 시간이었고 말하면 지금의 행복이 없어질 것 같기 때문이다. 10년이 지난 지금 아들의 건강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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