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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주 10시간전

거짓말이 다 나쁘지는 않아요.

아저씨는 내게 뻥을 친 거였어.

코로나가 창궐하기 직전 지인 가족과 우리 가족은 제주도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1월이었다. 코로나가 대유행을 시작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그때

우리는 배를 타고 제주도향했다.

오후 늦게 부산 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했고 어둑어둑 해질 무렵 배는 오색 빛 북항 대교 아래를 지나며 여행의 시작을 알렸다.

여객선 내부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타이타닉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 옆에 있었으면 금상첨화였지만 잭 대신 살찐 용이 있었다.(남편이 용입니다.)

아침 일찍 제주도에 도착 후 영실코스로 한라산을 등반하는 것이 첫날 일정이었다.


배를 타고 가는 여행은 처음이었다.

우리 가족이 사용할 객실 문을 열자 정갈한 이층 침대 두 개와 밖을 볼 수 있는 작은 창이 있었다. 밤바다의 검은 물결이 윤기 나는 머릿결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창 너머 검은 밤바다는 매력적이었다.

함께 간 지인 가족들과 준비해 간 음식으로 막걸리를 몇 잔 마셨다. 그래 술이 빠지기 힘든 밤이었다. 취기가 오른 나는 풍선처럼 하늘로 오를 듯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술이 약하다는 것을 아는 남편이 술도 깰 겸 피로도 풀 겸 사우나를 권했다. 난생처음 여객선 안 목욕탕을 경험하게 되었다.

뜨거운 탕 속에 몸을 넣고 창문으로 바다를 보고 있으니 이곳이 인간계인지 선계인지도 모를 정도로 기분이 묘하고 좋았다. 거기다 취기까지 올라 있었으니 세상 행복도 그런 행복이 없었다.

목욕을 마치고 객실로 돌아간 후 배 안에서 처음으로 하룻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나를 깨운 건 제주의 신선한 공기도 여행 첫날의 셀렘도 아니었다.

구토를 동반한 깨질 듯한 두통, 바로 숙취였다.

나는 술을 잘 못 마신다. 마시라면 마실 수 있다. 하지만 소량의 술에도 지옥 같은 숙취를 경험하는 터라 나이가 들면서 저절로 술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날의 막걸리 몇 잔이 내게는 과음이었던 모양이다.

집을 떠나 여행을 할 때는 더 몸을 귀하게 여겨야 하는데 기분이 좋아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내 두통과 상관없이 배는 제주도에 도착했고 우리 일행은 렌터카를 빌려 바로 한라산 영실 코스 입구로 갔다.

금방이라도 토사물이 나올 듯한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한 걸음씩 산을 올랐다.

고통의 신음이 나도 몰래 입 밖으로 나왔다. 여기까지 왔으니 계획 대로 등산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숙취의 고통은 나를 자동으로 전쟁터 부상병 신세로 만들었다.

 "난 틀렸어. 동지들이라도 어서 올라가 승전보를 올려주오."

뭔 소린지..  여하튼 나는 그 길로 산을 내려와 렌터카에서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결국 숙취로 인해 제 기능을 못하는 내 체력이 임계치에 다다랐다 느끼는 순간

나는 차가운 나무 난간을 잡고 간신히 섰다.

그리고 마치 위험한 국경을 넘는 피난민처럼 일행들에게 온전치 못한 나를 버리라는 듯 장렬히 말했다.  

"안될 것 같아. 나 더 못 가겠어."

라며 도리도리 뱅뱅을 시작했다.

정말 다시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때는 한라산이고 뭐고 내게 중요치 않았다.


그때였다. 나와 반대 방향에서 내려오던 한 남자 등산객이 내 말을 었던 모양이었다.

"다 왔는데 다시 내려가시려고요?"


"다 왔다고?"

난 한라산이 처음이었고 그 등산객 말을 찰떡같이 믿었다. 한라산이 이렇게 낮은 산이었던가?

영실 코스는 좀 짧고 쉽다 들었던 터라

그 등산객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있으면 목표한 정상에 도착한다니 좀 더 힘내 보자는 심정으로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영실 등산로는 길이 5.8km, 2시간 30분이 소요되는 코스로, 한라산 코스 중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구간으로 꼽힌다. 차로 등산로 앞, 1280m 고지까지 올라갈 수 있다. 백록담 밑에 남벽 분기점까지 가는 영실탐방로는 그나마 수월하게 오를 수 있어 초보자들에게도 추천하는 코스다.  
출처 Visit jeju


하지만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고

그 등산객의 말이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돌아갈 수 없는 지점까지

와버린 상태였다. 

꾸역꾸역 올랐다. 구토 1회 급똥 1회도 피할 수 없었고 퇴로도 없었다.

오르는 길 밖에 다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국 정상에 도달했다.



선의의 거짓말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다.

선의의 거짓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보통 의도와 목적에 초점을 맞춘다.

반대의 경우는 결과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기에 선의의 거짓말로 만에 하나 불행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우려한다.


하지만 어떤 선한 거짓말은 희망 닮아 있다.

그때 그 등산객이 "아직 한참 남았어요."라고

했다면 나는 분명 포기하고 내려왔을 수도 있다.

누군가 아무 말하지 않았어도 포기하고 내려왔을 수도 있다.


눈 쌓인 정상까지 가는 동안 보았던 많은 한라산의 풍경들을 보지 못했다면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 같았다.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처음 보던 다양한 식물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땅과는 다른 생경하고 신비로운 산 위의 겨울 풍경을 잊을 수 없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에는 두꺼운 눈이 쌓여 있었다. 정상에는 사방이 흰 병풍을 쳐 놓은 듯했고 눈 장판이 깔린 듯했다. 다 흰 눈이었다.

내가 사는 남쪽 지역에서

눈이란 10년 주기로 볼까 말까 하는 희귀 날씨템이다. 준비해 간 발열 음식들을 먹고 아이들은 눈 구경을 실컷 했다. 

누워 뒹굴고 눈 위에서 버둥거리기도 하며 즐거워했다.

함께 간 가족, 지인들과 아직도 그날 기억들을 추억 거리로 소환하곤 한다.

그리고 그 등산객의 한마디 역시 늘 회자되는 이야깃거리이다.


 모든 것이 스치듯 만난 한 등산객의 사소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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