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친절은 타인의 생각과 마음을 움직인다.
“한번 갔던 가게를 다시 찾는 이유는 그 집의 친절함이 마음에 들어서인 경우가 많지요. 유능하지만 무뚝뚝한 의사보다 함께 걱정하는 친절한 의사를 더 찾게 됩니다.”
송정림 작가의 ⌜착해져라, 내 마음⌟중에 나오는 이 문장을 읽는데 문득 한 사람이 떠오른다. 동내 내과의 오 원장님이 바로 그분인데 10년 가까이 정기적으로 혈압약을 처방받아오고 있다.
얌전한 외모의 오 원장님은 첫 만남부터 인상적이었다. 혈압조절의 기본적인 지식뿐 아니라 웃으며 살아요. 뭐든 기분 좋게 하면 됩니다. 같은 응원의 말도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 한 명의 환자에게 이 정도까지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에 놀라웠다. 진료를 마치고 나오는데 “제가 너무 수다스러웠죠.”라고 했다.
의사의 수다는 환자에게 약이 된다. 환자의 질환에 직접 관여하기보단 환자가 의사와 충분히 소통했다고 느끼는 데서 오는 안정감이 환자에게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인데 첫 진료를 마치고 나오는데 바로 그런 감정이 들었다. 가짜 약을 주어도 의사에 대한 믿음이 환자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치료에 효과를 가져온다는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가 바로 이런 것인가 싶었다.
기분이 묘했다. 전문가의 엄격함, 동네 지인의 친근함 같은 몇 가지 감정이 겹쳐졌다. 그동안 경험했던 의사들은 “술 담배 줄이고 운동 열심히 하세요.” 같이 마지막 멘트까지 비슷했는데 확실히 오 원장님은 결이 다른 친절함이 느껴졌다. 첫 진료 이후 커피믹스를 완전히 끊었고 무절제했던 밀가루 음식도 많이 조절하고 있다. 고마운 일이었다. 의사의 수다가 만들어낸 환자의 변화였다.
한 번은 고등학생인 딸이 배가 아파 동네 소아청소년과 의원을 찾은 적이 있었다. 작은 눈에 피부가 하얀 의사 선생님은 그리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고뇌하는 지식인 같은 스타일이었다. 차분한 성격에 말도 조근조근하게 하였다. 진료가 시작되고 질문이 이어졌다. 이윽고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배를 여기저기 눌러보는데 예상했던 답변이 나오질 않는다.
“여기 누르면 조금 아플거야”
“아뇨 안 아픈데요”
“그럼 여긴 안 아플거야”
“아아아 아파요.”
이런 식으로 정반대로 가고 있었다. 나는 이 상황을 대충 알 것 같았다. 신경이 예민한 아이는 시험이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으면 종종 배가 아프다고 했다. 그때도 시험 기간이 다가오는 시기였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은 안경알 너머로 작은 눈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시 아이에게 몇 번의 질문이 이어졌고 고개를 갸웃하던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아버님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한마디에 무한신뢰가 생겨버렸다. 정확한 소견은 아니었지만 훌륭한 소견이었다. 환자의 증상을 이렇게 담담히 모르겠다고 말할 수 있는 의사가 얼마나 있을까? 차라리 고마웠다. 적당히 포장할 수도 있었을 텐데 타협하지 않는 의사의 양심과 진한 친절함이 느껴졌다. 약을 처방받긴 했지만, 시험이 끝나고 아이의 복통은 사라졌다.
환자에게 의사는 엄마보다 더 절대적인 존재이다. 그러니 의사의 친절에서 비롯된 안정감은 환자의 치료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타인의 생각과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한사람이 내뿜는 세상을 향한 친절이다. 우리가 친절을 진지하게 실천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친절은 마음속 가장 멋진 부분을 우리의 주변과 조금씩 나누는 것이다. 우리 동네에는 똑똑한 의사보다 한 수 위인 친절한 의사들이 있다. 두 분 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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