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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관 Jul 21. 2022

파이란을 다시 보면 알게 되는 것들

ㅣ마음의 서랍을 열어보면 또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다.



2001년 영화 파이란이 개봉했다. 삼류 양아치 강재와 돈을 벌기 위해 중국에서 건너온 파이란의 절절한 사랑을 그린 멜로 영화이다. 개봉 당시만 해도 줄거리보다는 중국 배우 장백지의 출연이 더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영화를 보았지만 주제가 던지는 아련한 여운보다는 조직의 보스 용식으로 나오는 손병호 배우의 카리스마 밖에는 별로 기억에 남는 것이 없었다. 멜로에 무지했던 30대의 감성이었다.     


2019년, 거의 20여 년이 지난 시점에 파이란을 다시 보았다. 그런데 영화의 많은 부분이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단 한 번 만난 적 없는 두 사람의 사랑을 이렇게까지 절절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사랑을 주제로 한 영화 가운데 단연 최고라고 생각되었다. 아마 이 영화를 다시 보지 않았다면 30대의 기억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이 영화의 진면목을 알게 된 것에 안도감까지 느껴졌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유년시절의 경험을 마치 그것을 다 아는 것처럼 결정하고 살아간다. 음악이나 영화, 책은 물론이고 음식이나 장소에 대한 기억도 약간의 경험으로 정리되어 버린다. 그렇게 차곡차곡 정리된 감정들은 마음의 서랍에 들어가 그대로 굳어버린다. 하지만 그 서랍을 다시 열어보게 된다면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다.     


13살, 수학여행에서 보았던 경주 불국사의 느낌과 마흔이 넘어 다시 느끼는 불국사에 대한 느낌은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사람의 감정은 이렇게 시간의 흐름에 지배를 받는다. 하지만 기억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선입견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낸다. 마음의 서랍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나이를 먹게 되면 내게 우호적인 사람만 만나게 되고 늘 비슷한 수준의 비슷한 주제로 대화가 이루어진다. 감성이나 비판의 기능이 사라지고 동질감에서 오는 안정감에 기대어 살아간다.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이 있다. 사실 이게 가장 안 좋다. 좀 더 유연한 자세로 살아야 한다. 관계의 어색함이나 이질감 때문에 서로를 외면하는 순간이 온다면 “아직은 만날 때가 아니야.”라고 생각하면 그뿐이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상대를 나무란다거나 상처를 줄 필요는 없다.    


 

파이란


내가 상처받을 이유도 없지만 내 존재가 상대에게 상처가 되어서도 안 된다. 유년의 기억과 경험은 소중하다. 하지만 이런 유년의 정보만으로 삶을 판단하기엔 너무 허술한 부분이 많은 게 인생이다. 어린 시절 짧은 경험으로 전부 안다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배우 손병호는 파이란 이전에 소소하게 몇 작품에서 얼굴을 보이긴 했지만 2001년 개봉한 파이란이 배우로서 캐릭터를 완성한 사실상 그의 데뷔작이라 할 수 있다. 2019년에 파이란을 다시 보고 강재와 파이란의 절절한 사랑에 격하게 공감했지만, 카리스마 넘치던 손병호의 연기 또한 너무나 강렬한 영화였다. 파이란을 모르는 세대라면 꼭 한번 찾아보길 권한다. 나에게 감사하게 될 것이다.  




# 냉정한 평가는 좋은 글의 밑거름이 됩니다. 가감없는 댓글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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