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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소풍

가을날 오후 낙산공원에서

by freejazz


그 해 가을 어느 토요일 늦은 오후,

제가 응원하는 팀이 2승을 선점(先占) 했음에도

다음 경기에서 힘없이 2패를 한 뒤,

어이없게 3연패(連敗)에 몰리기 직전의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5차전 경기를

TV 중계로 지켜보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3연패가 현실화되려 하자 우린,

누가 먼저인지도 모를 정도로 동시에

"도저히 안 되겠다, 나가자..."라고 말한 뒤

mp3 플레이어를 지참해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땐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mp3 플레이어에서 라디오를 들을 수 있었거든요.

아마 그때 저는 프로야구 중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중간중간 라디오 방송에 귀를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의 준우승(準優勝)엔

그 해(2007년)에도, 또 올해(2025년)에도

"믿음"의 야구를 시전(始展) 하시는

우리의 "달" 감독님이 계셨네요.

그래서 그때 우린 그날 그냥 "달"도 아닌,

큰 보름달을 보러 집을 나섰죠.

그렇게 저도, 프로야구 골수팬으로서

그 무시무시한 준우승의 쓰라림은

충분히 많이 겪었습니다.

물론, 올해에는 너무나도 많은 기대를 했던

한화 이글스의 팬들에겐,

하루가 지난 오늘까지도

떨쳐내기 어려운 악몽(惡夢)이겠지만요.

아무튼 이제 야구 얘기는 접도록 하고요.


그날 늦은 오후에 우린,

동대문에서 동묘(東廟) 근처까지 걸어가서

동묘 앞 슈퍼마켓에서 간식거리를 구입한 뒤

낙산공원行 마을버스에 올라탔습니다.

그리고, 친절한 기사아저씨 덕분에

일몰 시간을 딱 맞출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한양도성(漢陽都城)이 된,

서울 성곽(城郭)에 걸터앉아

우리는 진한 맥주를 마시며

반대편 한성대 방면에서

부끄럽게 솟아오르던

환한 보름달을 보았는데요.

그런 도심의 저녁 풍경이

너무나도 정겹게 느껴졌습니다.


한편, 그때 낙산공원에서

mp3로 듣던 라디오 방송을 끈 뒤

高음질 CD Player에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끼고

같이 들었던 포근한 가을 음악 역시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영화 "Once"의 OST와 "꽃별"의 해금연주,

그리고 해질 무렵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던

노라 존스의 감미로운 보컬.

이윽고 어둑 컴컴해진 낙산공원에서

이화동을 지나 대학로 거리로 내려올 땐

언제나 그랬듯

문화(文化)의 향기(香氣)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동숭동으로 내려오는 길에 만났던

추억의 소극장들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린 동숭동에서 혜화동까지,

그리고 혜화동 로터리에서 명륜동까지

천천히 같이 걸었습니다.

그 길은 참 걷기 좋은 길이었죠.

그러다 우린 성균관대 입구의

먹자골목으로 들어가

주(飯酒)를 곁들인,

뜻했던 저녁식사로 배고픔을 달랬네요.


아, 그리고 대학로에 가면 항상 Jazz가 있었습니다.

저녁식사 후 우린

대학로 한복판에 있던 "천년동안도"에서

기분 좋은 재즈 연주를 들으며,

보드카(Vodka)가 섞인 칵테일 한잔을 마셨는데요.

대학 졸업 직전, 두 번째 유럽 배낭여행을 갔을 때

프랑스 파리의 소르본 대학 앞에서 사 왔던

어린 왕자 엽서에 볼펜으로 몇 글자를 적어

저는 그 애에게 수줍게 내밀기도 했습니다.

재즈 공연이 끝난 뒤엔

제법 쌀쌀해진 날씨였지만,

저는 그녀와 헤어지기 싫어

샛노랗게 물들어가던

가을나무 밑에서

같이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는데,

말없이 가을을 비춰주던

마로니에 공원의 하얀 조명이

거기에 서 있던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 주기도 했습니다.


예술은

삶을

예술보다

흥미롭게

하는


대학로엔 여전히 꿈과 낭만이 있었습니다.



때는, 2007년 10월 27일,

가을이 익어가던 토요일 늦은 오후부터 밤까지,

추억이 깃든 대학로에서.

지금은 제 아내가 된,

그때부터 너무나 소중했던 그녀와의

가을 데이트였습니다.

비록 야구는 패배(敗北)했을지라도

우리의 인생 여정(旅程)은 계속되니까요.





#.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벌써 18년 전이네요.

당시엔, 대학로와 동대문,

그리고 동묘 앞과 창신동에서 낙산공원을 경유하는

마을버스(아마도 03번이었을 겁니다.)가 있어서

낙산(駱山) 정상까지 손쉽게 올라올 수 있었습니다.

물론, 낙산은 아주 얕은 산이라서,

흥인지문(興仁之門)부터 성곽길을 올라도,

동소문(東小門)인 혜화문(惠化門)까지

거리가 약 2km 정도밖에 되지 않고요.

또, 낙산 자체의 높이도 125m여서

산을 오르는 게 등산이라기보다는

가벼운 하이킹의 느낌 정도입니다.

한편, 지금은 성곽에 올라가는 게 불법이고,

저 또한 문화유산을 아끼는,

관광업계에 약간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이 되어

당연히 그러진 않지만,

그 당시에만 해도, 신발을 벗고 성곽에 올라앉아

간식을 나눠 먹거나 지는 해를 보면서 담소를 나누는

연인(戀人)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우리가 즐겨 보던 드라마에서도

그런 장면이 등장했었죠.

2004년에 방영했던, 김래원과 윤소이 주연의

"사랑한다 말해줘"가 아마도 이 낙산공원을

대중들에게 가장 먼저 알렸던 드라마 같은데요.

그런 낙산 공원은,

제가 지금도 가끔씩

비교적 붐비지 않는 일요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혼자 지하철을 타고 찾아가는,

서울에서 몇 안 되는, 제가 너무나도 아끼는,

그런 저만의 장소입니다.

아기자기하게 흐르는 것 같은,

낙산의 성곽길을 오르면

도심의 높은 빌딩과 대학로 거리가 보이고

또 낮게 들어선 집들 위로는

멀리 북한산도 펼쳐집니다.

이 동네에 가면 현실에서도 추억이 흐릅니다.


다만, 이곳이

넷플릭스의 "K-Pop 데몬 헌터스"를 통해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우리만의 낙산공원이

세계인의 낙산공원이 된 것 같아

다소 아쉬운 마음도 있긴 한데요.

하지만 그래도 저는,

이곳 낙산공원이

저만의 장소로, 또 우리만의 장소로

계속 남아주었으면 하는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진 1) 언제나 정겨운, 낙산공원길



(사진 2) 낙산공원의 야경은 아름다움 그 자체



(사진 3) 2004년 2월부터 4월까지 방영됐던 드라마,

"사랑한다 말해줘" (김래원, 윤소이 주연)에서

이곳 낙산공원이 자주 등장했고,

배우들이 성곽에 걸터앉아서 대화하는 장면

많이 나왔습니다.



(사진 4) 지금은 없어진, 대학로의 대표 재즈 클럽

이정식 밴드가 자주 나오던, 천년동안도!



(사진 5) 마로니에 공원에 있던 표지판.

예술은, 삶을 예술보다 더 흥미롭게 하는 것



(사진 6) 노란 은행잎이 가득한,

마로니에 공원의 가을 풍경



(사진 7) 2002년부터 2007년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언제나 내게 따뜻한 음악을 들려주던,

나의 영원한 뮤즈(Muse), 노라 존스



(사진 8) 크로스 오버 해금 연주자, 꽃별.

그날 낙산공원에서 듣던 음악은,

"Fly Fly Fly" 앨범에 수록된,

"Dear."라는 연주곡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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