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연휴 전날 퇴근길
긴 연휴나 명절 전날 혹은 12월 마지막 근무일엔, 이 보수적인 분위기의 회사에서는 퇴근 전에 인사하러 다니는 직원들로 북적북적댄다. 여기저기에서 "연휴 잘 보내세요.", "고향 잘 다녀오세요.", 혹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등등의 인사말과 그에 상응하는 덕담이 오간다. 사실, 평소엔 별말 없이 지내던 직원들인데, 당장 내일부터 회사를 나오지 않을 생각을 하니 다들 기분이 좋은 건지 아님 그냥 퇴근하기 멋쩍어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인사를 하고 나서 앞으로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잽싸게 퇴근을 한다. 이윽고 오후 4시가 넘어가니 직원들이 거의 다 빠져나간 사무실. 나 역시 먼저 퇴근한 직원들을 앞으로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서서히 퇴근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한편, 긴 연휴나 여름휴가를 앞두고 갑작스레 몸이 아파오는 경우가 간혹 있다. 아무래도 일이 많을 땐 스스로 긴장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뭔가 면역력이 유지된 느낌인데, 마음가짐이 풀어지는 연휴나 여름휴가 직전엔 몸이 그걸 어떻게 귀신같이 알고 바로 반응을 하는지, 정말 신기할 따름이다. 오늘도 퇴근 후 복도식 구축 아파트의 그 복도를 거의 끝까지 걸어서 집 앞에 다 왔는데, 거짓말처럼 그 순간에 갑자기 재채기가 났다. 그러고 나서 바로 코와 목에서 소식이 왔다. 아, 긴 연휴라서 문을 여는 병원이 많지 않을 텐데... 하는 우려가 들었지만 사실 그런 걱정보다도, 무언가 속에서 북받쳐오는 억울함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왜 하필? 긴 연휴를 앞두고 이렇게 갑자기 몸이 아파오는지에 대한 심각하고 격한 억울함. 이건 마치, 어제(10월 1일) 거의 벤치 멤버 수준의 후보 선수 두 명에게 투런 홈런 두 방을 맞고 실낱같은 정규리그 우승 희망이 산산조각 나는, 끝내기 역전패를 당한 한화 이글스의 골수팬처럼, 정말 말도 못 하게 분하고 억울한 기분과 흡사한 것 같다. 나 역시도 그 힘든 핍박을 받으며 오늘에서야 겨우 보고서 5건을 통과시켰는데, 왜 이렇게 갑작스레 몸에서 신호가 오는지... 게다가 상당히 귀찮다는 듯 왜 연휴 전에 이렇게 많은 기안문서(起案文書)들을 들고 오는지 도통 이해를 못 하겠다는 얼굴이었던 부문장(部門長)의 표정이 뇌리에 스치면서, 그동안 그 힘들게 야근했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라 그 불편함의 정도는 더욱 커지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작년 여름휴가 직전에도 그랬다. 조직 내부에서 내 편을 드는 게 아니라 우리 회사 직원도 아닌, 계열사 직원 편을 드는 바람에 그때 적잖은 충격을 먹고 그다음 날이었나... 코피를 엄청나게 쏟아서 응급실에 실려간 적도 있었다. 해외 주재원 시절에도 그와 비슷한 증상이 갑자기 발생해서 혼자서 코를 움켜쥐고 두루마리 휴지를 든 채 근처의 현지 병원 응급실로 택시를 타고 갔던 적이 있었는데, 당시 코피가 수돗물처럼 쏟아지자 현지 택시 기사가 정말 알아들을 수 없는 현지 언어로 격한 욕을 해댔던 게 첫 번째 충격이었고, 또 현지의 대형 종합병원 앞에서 나에게, 폭행을 가한 가해자가 누구냐, 보험 처리는 어떻게 되느냐 등등 과다출혈이 발생한 외국인 응급 환자를 아주 골로 가게 만든 게 두 번째 충격이었다. 아무튼 작년엔 2024 파리 올림픽 개막식이 시작하는 그날(아마도 금요일 밤에서 토요일 새벽 사이었을 거다.) 여름휴가가 시작되었는데, 그때 혼자 시름시름 앓으면서 양궁 경기를 봤던 것 같고, 과다출혈로 인한 빈혈 증상이 나아지질 않아 휴가 때 작정하고 갔던 대형마트에서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고객상담실 옆 벤치에서 약 한 시간 정도 안정을 찾다가 한낮에 술 한잔 걸치지 않은 상태로 대리 기사를 불러 집에 왔던 기억도 있다. 아무튼, 이번에도 긴 추석연휴를 코 앞에 두고 몸이 아파오는 것 같아 굉장히 억울하고 또 억울하다는 얘기.
반면, 이런 연휴나 명절 전에 회사에서 윗사람들은 정말 자비롭게 변한다. 마치 본인들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것처럼. 통상적으로 골치 아픈 문서를 가져가면 그냥 밑도 끝도 없이 짜증을 내거나 아니면 화난 사람처럼 반응을 보이는데, 오늘은 그래도 그런 무례한 반응은 전혀 없었다. 보고서의 내용이 별로이거나, 혹은 방향성이 본인의 생각과 맞지 않는 경우에는 보통 보고 시에 이런저런 지적질이 잔뜩 나오고, 혹여나 대면 보고가 아닌 이메일 보고를 했을 경우에는 어떤 근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일단 "대면 보고 바랍니다."라고 회신한 뒤 불러서 깨는데... 하지만 오늘은 긴 연휴 전날이어서 그랬는지, 아무튼 그에게선 별 말이 없었다. 단지, 귀찮다는 표정만이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버젓이 드러났을 뿐. 어쨌든 오늘 나는, 긴 추석연휴 직전에 그동안 묵혀둔 보고를, 그것도 무려 5건을 해치웠는데, 그러나 뭔가 속이 후련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억울한 건 비단 내 몸상태만이 아니었고, 그간 뭔가 석연치 않은, 진짜 억울한 일이 정말 많았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10월의 황금연휴가 시작되는 바로 전날이니까, 일단 꾹꾹 눌러서 참고 연휴를 지내기로 스스로 어렵게 어렵게 다짐한다. 비록 10월 10일에 반드시 출근을 해야 하는 일이 생겨서 연차를 쓰지 못해 장장(長長) 열흘간의 길고 긴 연휴를 만들어내진 못했지만 그래도 7일 연휴 후에 단 하루만 출근하면 어쨌든 또다시 주말이니까, 어쨌든 참기로 한다. 아까 사무실에서 나올 땐 앞으로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눈을 질끈 감고 퇴근했는데, 결국엔 다시 돌아갈 그곳. 나의 회사, 그리고 나의 자리. 일주일 간은 일단 모두 다 잊고 쉰 다음 10월 10일에 다시 봅시다! 잠시 동안만이라도 안녕(安寧)!, Good-bye(英)! Au revoir(佛)!, Adios(西)!, Addio(伊)!, Tschüss(獨)!, Güle güle(土)! 주1)
주1) 위의 한자 土는 터키(現 튀르키예)의 한자식 표기
토이기(土耳其)의 약자(略字)임.
(사진) 2025년 10월 달력
개천절과 추석연휴 그리고 한글날까지
환상적으로 이어진 황금연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