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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인 Jan 09. 2021

다름을 인정하는 것

고통스러웠지만 평온함이 찾아왔다.

녀석은 달랐다


녀석의 첫 돌을 축하하고 일과 육아 사이에서 정신없이 살았다. 또래에 애들은 말이 늘어가는데 녀석은 과묵했다. 어머니는 늦된 아이라고 때 되면 다 말을 하게 된다고 했고, 지인들은 지인의 사촌도 5살 때까지 말을 못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수다쟁이가 되었다는 등의 말을 해주었다. 그렇지? 그렇겠지.. 뭐 이런 맘으로 내가 첫 애라 너무 예민한 건가 하며 걱정과 불안은 한편에 밀어 두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다른 아기들과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커져 갔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언어 발달이 느린 것이었고 엄마가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눈 맞춤이 안 되는 것이었다. 특히 내가 안아주려고 하면 몸을 비틀면서 품에서 빠져나가 버렸다. 이상했다. 용기를 내서 떨리는 마음으로 검색을 해봤다. 아이가 보이는 모습이 자폐성 장애 체크리스트와 많은 부분이 겹쳤다. 병원을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큰 도시의 정신과에 전화를 해서 아이에 대해서 설명을 하니 36개월이 되기 전에는 검사할 수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바보같이 더 알아보지 않고 그냥 그 말을 받아들였다.(그때 내가 사는 지역에 소아정신과가 없었다.)


36개월이 되기만 기다렸다. 그 사이 녀석에게 동생이 생겼다. 동생을 낳고 출산휴가 중에 녀석은 36개월이 되었고 나는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유사 자폐인 것 같다고 했고 아직 확정적으로 진단할 수 없다고 했다. 자폐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일본인 의사가 쓴 유사자폐에 관한 책이 있었는데 어린 시절 양방향 소통이 안 되는 TV를 많이 보여주거나 언어적 자극을 주지 않으면 타고난 기질이 내성적이고 순한 아기의 경우에 유사자폐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하였다. 나의 상황과 책에서 말한 상황이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 녀석을 낮에 시어머니에게 맡겼었는데 어머니는 아이에게 TV를 보여주고 부업을 하셨다. 처음에는 눈물이 나고 어머니가 원망스러웠지만 어머니 탓을 할 수는 없었다. 나도 일에 지쳐 아이를 씻기고 먹이는 일에는 신경을 썼지만 언어적 자극을 얼마나 줬었는지 그게 충분했는지 자신이 없었다. 죄책감이 들었고 어찌해야 할지 막막해서 울기만 했다. 사무실은 여전히 바빴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으며 남편의 벌이는 적었다.


어린이집에 가다

시어머니에게 유사자폐라는 것을 설명하기는 어려웠고 탓을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제 녀석이 많이 컸으니 어린이집에 보내야겠다고 말씀드리고 어린이집을 보냈다. 많이 섭섭해하셨다.


녀석이 어린이집을 다니고 며칠 만에 녀석을 데리러 갔더니 녀석 얼굴 전체에  양 손, 열개의 손가락으로 얼굴 위에서 아래로 긁은 손톱자국이 나 있었다. 매일 보던 TV를 못 보고 할머니와 있을 때처럼 녀석 맘대로 할 수 없어서였던 것 같다.  녀석은 순둥이여서 외부로 폭력성을 드러내지 못하니 스스로 자해를 해버린 것이었다.


녀석의 환경을 개선해야 했다. 거실에 있던 TV를 지인에게 주었다.  나는 무엇을 하든 말로 녀석에게 다 설명을 하였다. '엄마는 지금 김치찌개를 끓이고 있어. 배추김치를 칼로 쏭쏭 썰어서 보글보글 끓는 물에 넣을 거야'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일을 쉴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쉴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에 와서 가장 후회가 되는 결정이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함께 시간을 보내주고 책을 읽어줬더라면 녀석이 더 좋아졌을 텐데 그때는 당장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생각에 일을 놓을 수가 없었다.


언어치료를 시작했다


우리는  지방 소도시에 살고 있다.  그 당시에는 장애인복지관이 하나 있었고 언어치료실은 없었고 정신과도 한 군데뿐이었다. 지금은 언어치료실이 생겼다고 들었다. 남편이 저녁에 하는 일을 했어서 낮에 녀석을 복지관에서 치료를 받게 했다. 녀석은 새로운 일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거부하거나 거칠게 행동하지는 않아서 TV 없이 지내는 생활에도 점차 익숙해져 갔다. 치료 선생님과도 잘 지냈다. 하지만 말이 느는 것 같지가 않았다.  책에서는 유사자폐는 환경을 바꾸고 언어 자극을 주면 좋아진다고 했는데 녀석은 말이 느는 게 느껴지지 않았다. 후천적인 게 아니고 선천적인 자폐일까? 그렇다면 좋아지기 어렵다고 했는데...... 걱정이 커져갔다. 좀 더 환경을 개선해야 했다.


남편은 밤에 일을 하고 나는 낮에 일을 하니 생활이 불규칙하고 녀석들에게 좋은 환경을 주기가 어려웠다. 둘 중 한 명이 일을 쉬는 것으로 결정했다.  밤에 일하는 생활이 길어가니 남편은 많이 지쳐 있었다. 우리 부부는 남편의 가게를 정리하고 취업시험 준비를 하면서 녀석을 돌보기로 결정하였다.  


그때까지는 마음 한편에 불안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이가 선천적인 장애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환경을 개선하면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녀석은 나이를 먹어가는데 말을 못 하니 저녁마다 녀석을 보다가 우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래, 우리 아이는 장애를 가졌어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고 본격적으로 치료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애 치료에 대한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하여 장애등록을 하기로 했다.  장애등록을 하기로 결정을 했을 때 나는 녀석은 조금 늦될 뿐이니 장애등급이 안 나올 거라고, 치료비 충당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자폐성 장애는 1급에서 3급까지 있는데 내 예상과 달리 녀석은 2급 판정을 받았다.


그때 나는 녀석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아이는 장애가 아니고 좀 늦고 있는 것뿐이라고, 환경을 개선하고 치료를 하면 금방 '정상'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야 나는 부모가 아이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치료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결정적 시기? 민감한 시기!

자폐성 장애 2급이라니......

퇴근하고 집에 와서 잠자리에 누우면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녀석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다는, 이미 언어 습득의 시기를 놓쳐버렸다는 부정적인 생각만 자꾸 들었다. 복지관에 가면  볼 수 있었던 청소년이 되어서도 의사소통에 문제로 치료를 받는 경우처럼 녀석이 나아지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점점 커져갔다.


가정 시간에 인간이 태어나서 발달하는 것에 대해서 배울 때 '결정적 시기'라는 말을 들어봤던 것 같다.

인간이 성장할 때 언어능력, 대근육을 쓰는 능력, 소근육을 쓰는 능력 등 사람이 성장하면서 필요한 능력들이 발달하게 되는 데는 그 능력마다 중요한 시기가 있어서 그 시기를 놓치면 그 능력을 습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결정적 시기'라는 개념이 나의 불안을 점점 크게 했었다. 나는 녀석이 또래처럼 말을 하지 못 한다는 것이 가장 걱정이었다. 혹시나  언어능력의 습득에 있어서 결정적 시기를 놓쳐 버린 것이 아닌지가 가장 걱정되었다.


결정적 시기라는 개념이 "민감한 시기"라는 말로 변경되었다.  언어능력을 획득하는데 중요한, 민감한 시기가 있지만 그 시기가 지나더라도 뇌에 언어적 자극을 준다면 발달은 어느 수준까지는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고 들었다.  책에서 이 내용을 만났을 때 나는 깜깜한 밤에 숲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작은 불빛이 멀리서 반짝 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녀석에게 언어적 자극을 주는 노력을 한다면 녀석이 언어능력을 획득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중요한 것은 녀석이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녀석이 가진 어려움을 파악하고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인데 나는 녀석의 장애를 인정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시간과 감정을 소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녀석이 장애를 지녔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니 고통스러웠던 마음이 오히려 편안해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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