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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나딘 Mar 03. 2021

그들의 세 손가락!

   

미얀마의 쿠데타 소식이 매일 뉴스에 올라옵니다. 군부의 실탄 사격으로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이 죽거나 위중한 상태라고 합니다. 총상을 입고도 힘겹게 펼친 청년의 세 손가락은 형언할 수 없는 울림을 전합니다.      

미얀마의 쿠데타는 점진적으로 민주주의로 정권이 이양되는 과정에서 군부가 권력을 유지하고가 일으켰습니다. 2015년 미얀마 총선거에서 아웅산수찌가 이끄는 국민민주연맹이 과반수를 넘는 의석수를 차지하게 되자 군부는 이른 아침 지도부를 급습했습니다. 미얀마 군의 참모총장인 민 아웅 흘라잉에게 모든 권력이 이양되었고, 중앙정부의 각료 일부가 해임되고 새로 임명되었습니다. 쿠데타 이틀째엔 인터넷이 차단되었고, 시내에는 장갑차가 등장했습니다. 외부와의 모든 소통을 차단하고 시민들을 고립시켜 무력으로 제압하겠다는 계산이었겠지요. 한국 영화 <택시>가 떠오르는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요?     


미얀마의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안고 비폭력 저항 시위를 펼치고 있습니다. 미얀마 시민들은 1962년과 1988년 쿠데타 당시 유혈 탄압을 당했던 경험이 있기에 폭력을 지양하고 불복종의 뜻은 전하는 방식으로 군부 쿠데타에 반하는 평화적인 시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의 뜻을 방해하려는 군대의 시도도 지속적으로 자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일부 시민을 매수하여 무차별 폭력을 가하게 한다거나, 군대의 무력 진압에 빌미를 제공하려는 계략인 것 같습니다. 최근 홍콩에서의 시위도 평화적인 그들의 움직임에 폭력배들을 고용하여 유사한 사례가 발생했었다는 기사를 본 것 같네요. 아마 예전 광주에서도 이 같은 패악은 빈번했을 것입니다.    

고립된 장소에서의 위와 같은 폭력사태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행위, 또 인간의 생존권이나 최소한의 권리조차 유린당하는 조직적인 횡포는 오늘날 휴대폰 하나로 전 세계로 전달됩니다. 

미얀마에서도 Z세대로 불리는 젊은 층의 빠른 SNS 활동은 사회운동에 관심이 없을 것이라는 편견이 있던 어른들에게 청년들도 자신의 팔에 혈액형을 쓰고 죽음을 무릅쓰고 평화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휴대폰의 기능이 발달하기 전에는 타지의 전쟁과 같은 상황이 신문이나 TV 뉴스에 사진으로 보도되었지요. 그 사진 한 장이 미국에서는 반 전쟁 시위를 야기하기도 했고, 아프리카에 도움의 손길이 닿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 난민들의 힘겨운 사투를 전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진을 퓰리처상이라는 명칭으로 접하고 기억할 것입니다. 매일 접하는 뉴스 속 이미지들은 하나의 사건으로 스쳐가고, 특정 이미지는 퓰리처상이라는 명칭으로 그것만의 아우라를 지니게 됩니다. 제가 오늘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 사진이 지닌 모순입니다.      

미얀마의 사태를 접하고, 그들의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도 굽히지 않는 자유에 대한 갈망은 세 손가락 경례로 대변됩니다. 그럼에도 그런 이미지를 보는 ‘나’는 상대적 안정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전쟁사진이나 위기를 포착한 사진이 지닌 모순입니다. 자신들의 상황을 알리고 국제기구 및 세계인들의 관심을 구하는 위기의 순간이 담긴 이미지는 상대적으로 소파나 책상에 앉아서 ‘안전하게’ 휴대폰 속 이미지를 손가락으로 넘기는 ‘나’를 발견하게 합니다.      

후잉 콩 우트가 찍은 <전쟁의 공포>(1973) / 로이터 통신의 김경훈 기자가 찍은 캐러밴에 속한 모녀 사진

로이터 통신의 김경훈 기자가 찍은 ‘캐러밴’ 모녀의 순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저귀를 찬 두 딸과 엄마가 멕시코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넘어가려던 순간 경비대원의 진압에 대피하는 찰나를 찍은 사진은 그 순간의 다급함과 두려움, 공포와 갑갑함이 모두 전해집니다.

1973년 베트남 전쟁 당시 네이팜탄의 폭격을 맞아 마을 전체가 불바다가 된 상태에서 겁에 질린 소녀가 벌거벗은 채 뛰쳐나오는 사진도 맥을 같이 합니다.      

이 사진은 모두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 무력에 의해 무고한 시민이나 어린이들이 피해를 입는 경우, 자신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건 사투를 타인의 시선에 의해 포획된 이미지입니다. 이 모든 사진들은 결국 죽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사악함을 동시에 연상시키지요. 그래서 기자나 현지에서 저항하는 시민들은 자신들의 상황을 이미지에 싣고, 그 이미지가 지닌 힘을 믿고 세계에 전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사진은 안타깝지만 모순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낯선 장소의 소식을 전하는 이와 같은 사진들이 전해진 곳에 유사한 감정이나 어떤 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공감을 받기 어렵습니다. 손가락으로 쓱 넘겨질 뿐인 것이지요. 어떠한 여론이 형성되어 도움을 주기 위한 운동이 펼쳐지려면 위험을 알리는 사진에 ‘공감’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진은 도덕심을 고취할 수 있지만 새로운 도덕적 잣대를 생성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역시 ‘공감’이 필요한 이유겠지요.     

미얀마의 쿠데타를 알리는 뉴스와 여러 사설, 그리고 그곳에 거주하는 시민들이 전하는 메시지들은 너무 가슴이 아프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의자 위의 제게 무력감을 안겨줍니다. 또 동시에 지금 한국이 그래도 안전하다는 사실에 감사한 것도 사실입니다. 퓰리처상 전시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우리는 너무나 많이 고통받는 사진들에 노출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그 고통이 ‘공감’을 야기하는데 어쩌면 더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과 얼마 전 광주에서의 일들이 우리에게 교훈을 주듯이 타지에서의 관심과 지지가 그들에게 많은 힘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 좋겠네요.      


그들의 세 손가락은 ‘선거, 민주주의, 자유’를 상징합니다. 오늘 우리는 두 번째 손가락으로 가볍게 이들의 이야기를 넘겨버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퓰리처상 사진전시가 예술의 전당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타국에서의 가슴아픈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마음의 자세로 다녀오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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