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맑음 Dec 22. 2020

명품조연(上)

슬라임과 고블린, 단편소설


 나는 배우다. 누군가가 나를 죽이면, 온 힘을 다해 죽은 척을 하면 된다. 그와 동시에 그들이 가져갈 수 있는, 전리품에 해당하는 무언가를 떨어트려 준다. 완벽한 연기가 끝나고 나면 감독이 나를 데려간다. 약간의 스탠바이 후, 감독이 나를 찾으면 다시 나오면 된다. 반복해서 죽은 척, 대기, 죽은 척. 이게 내 일과다. 나는, 게임 세계에서 연기하며 사는, 슬라임이다.      


“스탠바이-!”     


 GM이라고 적힌 모자를 쓰고 있는 감독이 우리를 부르면, 대기하던 슬라임들이 화면으로 줄지어 나간다. 맵에 일렬로 선 채 초원을 뛰어다니는 연기를 하고, 가끔은 지나가는 유저들을 툭툭 건드리기도 하고. 유저들이 우리를 무찌르면 전리품을 떨어트려 준 후 유저들의 화면 뒤로 빠지면 된다. 아마 그들에겐 본인들이 물리쳐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화면 뒤의 대기실로 이동해 몇 팀이 교체될 때까지 기다린다. 이 행위를 계속 반복하면 된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은 쉬는 날이다. 몬스터역할을 하는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패치’를 하는 날 다 같이 쉴 수 있다. 한데 모여 간단한 회식을 한다. 패치를 하는 날은 신입들이 많이 들어오는 날이다. 새로운 부서, 새로운 맵이 생길 때도 있고 새로운 몬스터가 생길 때도 있다. 우리는 초보자 마을에 모여있기에 새로운 몬스터를 볼 수는 없다.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고참들은 바로 이 초보자 마을에 모여있으니까. 회식 자리에 도착했더니, 다들 나를 반겨준다. 슬라임 테이블로 갔다. 물컹거리는 액체들이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90도로 인사하려 노력한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15기 슬라임입니다.”     


 큰 소리로 인사하는 아이들을 보며 생각했다. 귀엽네. 나도 저렇게 파릇파릇할 때가 있었는데. 이 게임이 만들어진 지 벌써 15년이 됐구나. 1기인 나에게 깍듯이 인사하는 15기들의 인사를 받아주며 한 마리 한 마리 눈을 맞췄다. 이런 회식 자리에 빠지지 않는 것이 내가 지금까지도 좋은 선배로 불리는 이유다. 나는 여기서 후배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니까.      


 “내일부터 바로 출근이지? 뭐, 궁금한 건 없나?”     


 다들 눈치를 보고 있다. 질문을 정말 해도 되나, 하는 눈빛들이다. 나는 웃으며 어서 이야기해 보라고 했다. 지금이 아니면 대답 해주지 않을 거라고 하니, 한 슬라임이 용기 내 질문한다.     

 

 “...인, 인턴 때, 어려웠던 점이 있습니다.”      


 “오호, 요새도 테스트 서버에서 있다가 오는 애들이 있네. 다른 몬스터들은 그렇지 않던데, 슬라임만은 테스트 서버에서 인턴 기간을 보내지. 세월이 지나도 슬라임이 사랑받는 이유야. 우리가 없으면 초보자들 밸런스도 진작에 붕괴됐을거야. 그래, 뭐가 어려웠지?”     


 긴장했는지 땀을 뻘뻘 흘리는 슬라임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질문한 슬라임의 말을 기다렸다.    

  

 “초보 유저들의 비위를 맞추는 건 이제 잘하겠습니다. 기본 검은 두 번, 목도는 세 번, 몽둥이는 두 번 정도 맞고 죽은 척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가끔, 초보자가 아닌 유저들이 와서 저희를 죽이면 어떻게 반응하면 됩니까? 허세를 부리려고 친구를 데려와서 화려한 스킬들을 쓰는 게 정말 꼴사나워서….”     


 “자네 지금, 비위를 맞춘다고 했나? 게다가…. 꼴사납다니?”     


 순간 정적이 흐른다. 내가 말을 끊고 정색을 하자 15기 슬라임은 당황한 듯 죄송합니다, 를 연발한다.      


 ”하하…. 젊은 친구들은 따라가질 못하겠어. 정말 하면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네.”    

 

 슬라임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싸해지자 옆의 고블린 테이블까지 우리 테이블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을 내리깔고 바닥만 보는 슬라임들에게 호탕하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아하하, 농담이야, 농담. 너무 군기가 바싹들 들어있길래 장난 좀 쳐봤어. 시대가 어느 시댄데 나를 그렇게 대해? 편하게 대해, 편하게.”     


 슬라임들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나를 따라 웃었다. 귀여운 것들.    

  

 “그래도 비위를 맞춰준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오만한 생각이야.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는 거지. 최선을 다해 연기하며 초보자들이 게임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 하는 게 우리 역할이야. 우리가 없으면, 유저들도 없어. 때로는 우리가 그들을 빛내게 해주는 사람들이란 것에 자부심을 가지는 게 어때?”   

  

 “시정하겠습니다!”     


 질문한 슬라임이 대답하고, 나의 말에 필기하는 슬라임들까지 생겼다. 이럴 때는 예전 이야기를 해주면 애들이 또 좋아하지.      


 “5년 차가 됐을 때, 다른 부서로 발령 난 적이 있지. 유저가 2차 전직을 하기 전, 나를 물리쳐야 전직을 할 수 있는 보스 슬라임 역할로 배정받았지. 나에게 죽는 유저들도 많고, 나를 죽이려고 다 같이 파티를 해서 찾아오는 유저들도 많았지. 어찌나 안쓰럽던지. 그때가 슬라임 생에 최고의 전성기라고 나는 생각해. 지금은 다른 5년 차 슬라임들, 8기 슬라임들이 그 역할을 맡고 있고 나는 나이를 먹었기에 여기로 다시 좌천됐지만, 이쯤 되면 이제 초보 유저들이 귀엽게 느껴지지. 이제, 나이를 먹으니 반응속도도 바로바로 나오지 않아 여기가 편하기도 하고.”


 슬라임들은 눈을 반짝이며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가끔 초보자가 아닌 유저들이 우리를 보러 올 때도 있어. 동료들에게 이만큼 강해진 자신을 보여주고 싶겠지. 굳이 화려한 스킬을 사용해 맵 전체의 슬라임들을 한꺼번에 죽이고, 내가 이렇게 강하다는 데 쾌감을 느끼지. 우리는 그런 유저들의 자존감을 올려주는 아주 중요한 역할이야.”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는 15기 슬라임들 사이에서 다른 슬라임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저, 저도 인턴 때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신규 스킬이 출시됐을 때, 어떤 한 유저가 저희가 있는 곳에 와서 맵 전체에 스킬을 쓰는 바람에 다들 당황했다가……. 늦게 반응한 적이 있습니다. 유저게시판에 글이 안 올라와서 망정이지, 올라왔으면 그 맵에 있던 슬라임들이 전부 잘릴 뻔했어요. 선배님, 저희는 늘 긴장한 상태로 있어야 하는 건가요?”     


 “항상 긴장하는 마음가짐. 좋은 자세야. 그러나 보통 초보자가 아닌데 초보자 마을에 우리를 보러 오는 유저들은 두 유형으로 나뉘지. 그냥 지나가거나, 굳이 화려한 스킬로 맵 전체의 슬라임을 사라지게 하는 유형. 나도 한때는 가만히 있다가 깜짝깜짝 놀라 죽은 척에 딜레이가 걸린 적이 있었어. 유저게시판에 슬라임의 반응이 늦다고 올라오면 우리는 잘리는 게 아닐까 걱정 한 적도 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화려한 스킬에 게임이 못 따라간다고 생각해 괜찮다네. 그들은 슬라임을 문제 삼지 않아.”     


 웅성거리며 내 말을 받아적는 슬라임들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우리는 주연인 유저들을 빛나게 하는 ‘명품조연’이라는 사실을 늘 잊지 말자고.”     


- 中편으로 계속 -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