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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맑음 Dec 22. 2020

명품조연(中)

슬라임과 고블린, 단편소설

 자리가 무르익으며 술잔을 부딪쳤다. 옆에 앉은 고블린들 테이블은 빠르게 술과 안주를 치워나갔다. 아무 대화도 없이, 술만 마신다. 신입인 15기 고블린들도 축 쳐져 있다. 술자리가 이러면 쓰나. 분위기를 환기하려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고블린들도 들으란 듯 크게 말했다.      


 “예전에는 우리도 잘나가던 시절이 있었는데 말이야. 그땐 나름 주연이었다고.”     


 내 예상대로다. 슬라임들뿐만 아니라 고블린들 역시 나를 쳐다본다. 오픈베타 출시 때부터 함께한 몬스터는 몇 없으니, 관심이 갈 수밖에.      


 “나 때는 말이야, 초기 오픈베타 시절에는 우리의 능력치가 꽤 높았다구. 초보자 마을에서도 유저들이 힘을 모아 나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지. 유저중에 ‘뽀대간zl’라고 알고 있나?”     


 “혹, 혹시 이 게임 랭킹 1위 말씀하시는 겁니까? 공식 홈페이지에도 늘 1위 자리에 있지 않습니까!!”


“처음 게임이 출시되기 전 오픈베타 때부터 함께 한, 역사의 산증인 같은 유저 아닙니까!”


“저는 시, 실제로 한 번 보는 게 소원입니다!!” 


“뽀대간zl의 손에 한 번만이라도 죽어 볼 수 있다면…….”


“선배님은 그분을 본 적이 있습니까?!”     


 취기가 조금 오른 15기 슬라임들은 아까보다 긴장이 풀린 채 흥분해서 서로 앞서 대답했다. 고블린 테이블을 힐끔 보니, 작게 웅성거리는 속삭임이 들린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오픈 베타도 물론 함께했지. 그 유저가 13년 전, 처음 발간한 가이드북이 절찬리에 팔린 것을 알지? 그때는 몬스터가 많이 없어서 뽀대간zl 대부분의 스킬 사용 화면에 내가 등장하지. 그때는 나도 파릇파릇해서, 다른 동기 슬라임들보다 제일 연기가 뛰어났으니까. 스크린샷을 찍는 타이밍에 맞춰 죽는 연기를 하고, 다음 스크린샷 버튼을 누를 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적당한 순간을 찾아 아이템을 드롭했지. 감독이 그 당시에 나를 계속 썼던 이유야. 그때 후배 슬라임들이 나에게 사인을 받겠다고 얼마나 난리가 났었던지….”     


 “선배님! 존경합니다!”


 “같이 술을 마시다니 영광입니다! 뽀대간zl는 어떤 유저였나요?”


 “그때 선배님은 어떤 마음으로 연기를 하신 건가요?”


 “나름의 주연이 아닌, 완전한 주연이었군요. 자랑스럽습니다, 선배님!”     


 멋쩍게 웃으며 하나하나 답을 해주고 있었는데, 한 슬라임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에게 물어봤다. 


 “선배님, 저는 슬라임으로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주연이 되고 싶다는 꿈이 있습니다. 이제 슬라임은 주연은커녕 조연으로도 안쳐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암담했지만요. 저는 시대를 잘못 태어난 것 같아 그저 선배님이 부럽습니다.”     


 웅성거리는 슬라임들과 고블린들은 이야기를 들으며 내 눈치를 보고 있다. 어쩌면 내가 시대를 잘 태어났으니 조연이라도 해봤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으니. 다들 슬라임으로서 자부심을 품자고 한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하는 후배는 매년 허다했다. 이럴 때 나는 이런 대답을 하곤 했다. 


 “자네들은 내가 누릴 수 있었던 건 다 누렸다고 생각하겠지. 한때 잘나가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 이렇게 늙어버렸어. 그래도 나는 아직도 목표가 있고 꿈이 있어.”     


 어느새 청문회가 되어버린 것 같은 이 자리는 모든 몬스터들이 나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역시, 선배님은 주어진 삶에 끊임없이 노력하며 살아가시는군요. 혹시 꿈이 뭔지 여쭤봐도 됩니까?”     


 “하하, 이런 얘기는 잘 안 하는데.”     


 간절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는 슬라임들과 고블린들을 위해 오늘은 좀 솔직해져 보기로 했다. 나는 술을 한잔 비운 채 입을 뗐다.     


 “나는…. 게임 엔딩에 내 얼굴을 비쳐 보고 싶어.”     


 나의 대답에 놀란 슬라임들이 하나같이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나를 쳐다보고 있다.    


 “엔딩에서 죽이는 최종 몬스터로 내가 나올 수 없는 건 나도 너무 잘 알아. 그런 뜻이 아니라, 마지막 엔딩 크레딧에 내가 단 1초라도 출연하고 싶은 거지. 뭐, 처음부터 잡았던 몬스터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듯 다 같이 출연해도 좋을 것 같고. 그런 날이 왔으면 하는 거지. 어쨌든 유저들은 대부분 엔딩을 기억하니까.”     


 나의 목표를 들은 후배들이 존경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다. 나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어나가려고 하는데, 옆 테이블에서 술잔을 쾅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그만 좀 해라.”




 나와 같은 동기, 1기 고블린이다. 15기 고블린 후배들 앞에서 짜증이 가득한 상태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초보자 대륙에서 푸른 초원 맵을 뛰어다니는 슬라임인 우리와 지하동굴을 담당하는 고블린들은 맵은 붙어있지만, 성향이 정말 다르다. 우리가 왁자지껄 떠들며 이야기할 동안, 저 테이블은 말없이 술만 마시고 있었으니까. 슬라임들은 당황한 채로 우리 둘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나는 놀랐을 슬라임들을 진정시켰다.    

  

 “놀랐지? 내 친구야, 친구. 가끔 성격이 나오기도 하지만, 같은 초보자 대륙에 있으니 친하게 지내고 있지. 거, 15기 동기들끼리도 서로 인사해.”    

 

 서로 어색하게 인사하는 15기 슬라임들과 고블린들을 뒤로한 채, 고블린이 자리를 옮기자고 하여 우리는 다른 테이블로 옮겼다. 아, 그러고 보니 선배는 이때쯤 빠져줘야 했다. 내가 너무 말이 길어져서 고블린이 눈치를 주는 것 같았다. 참, 말은 밉게 해도 속은 넓은 친구라니까.    

 

 “애들한테 헛된 희망 좀 주지마. 재밌냐?”     


 고블린이 술을 마시며 퉁명스럽게 말을 건넸다.


 “귀엽잖아. 다들 내일 첫 출근인데 얼마나 떨리겠어.”     


 고블린의 잔을 채워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 녀석은 내가 하는 말마다 태클을 걸고, 매사에 부정적이다.

      

 “오늘은 새로운 몬스터가 없나 보네. 15주년인데 올해 들어서 업데이트를 더 잘 안 하는 거 같아.”     


 내 말을 들은 고블린은 비웃으며 말했다.      


 “망겜에 무슨 업데이트를 하냐? 새로운 몬스터는 무슨, 이젠 유저도 없어. 신입도 예전보다 줄어든 거 안 보여?”


“오늘따라 왜 이렇게 센치해? 너희 테이블은 무슨, 술만 먹냐? 너희 신입들이 조용하니까 우리라도 분위기 띄워보려고 그런 거 아냐, 인마.”    

 

 “몸 관리해야지. 배만 나오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냐? 고블린의 상징은 마른 몸에 볼록 튀어나온 배라고. 쟤네는 술 마시는 연습만 하면 되는 거야. 마른 몸은 금방 잘려. 너처럼 희망 고문 하는 것보단, 실속있는 가르침이 더 나아.”     


 약간 짜증이 난 나는 맞받아쳤다. 고블린이라서 뭘 모르는구먼.    

  

 “내가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왜 희망 고문이야? 애들이 궁금해하니까 말해주는 거지. 이 게임이 또 어떻게 바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나보다 더 빛나는 연기로 정점을 찍는 슬라임들도 생길 거야. 그런 걸 응원해주고, 꿈을 키울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선배의 역할이지.”     


 고블린이 술잔을 다 비우고 병째 들이키기 시작했다. 너덜거리는 옷에 실밥이 튀어나와 거슬리게 고블린을 거슬리게 했다. 짜증을 내며 실밥을 쥐어 뜯는 고블린은 한숨을 쉬며 내게 말했다.     


 “초원에서 지내더니 머릿속이 정말 꽃밭이네.”    

 

 “뭐라고?”     


 발끈한 나를 빤히 쳐다보며 고블린은 말을 이었다.      


 “너 매년 이맘때쯤이면 후배들한테 13년 전 게임 가이드북에 출연한 거 얘기하는 거, 진짜 꼰대 같아. 고쳐."

 

 "내가 없는 얘기 한 것도 아니고. 너도 그때 있었잖아. 난리 났던 거 기억 안 나?"      


 “말은 바로 하자. 초보자 대륙에서 몬스터들 사이에서만 난리 났었잖아. 게임의 주인공들인 유저들은 ‘뽀대간zl’를 본 거지, 너를 본 게 아니야. 아무도 널 기억 못 해. 정신 차려.”     


 또 시작이다. 고블린들 특유의 열등감 폭발. 항상 슬라임들을 시기한다. 나는 늘 이런 식이다. 한숨을 쉬고 핀잔으로 위장한 푸념을 들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뭐, 최종 꿈이 엔딩에 출연?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이럴 때 같이 화내면 지는 거다. 그리고 지금은 보는 눈도 많다. 다들 자기들끼리 떠들면서 몇몇은 우리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 것이다.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왜, 그래도 예전에는 로그인 화면에 용감한 초보자들이 철갑을 두르고 슬라임을 잡는 일러스트도 나오곤 했잖아. 엔딩에도 출연할 수도 있는 거지. 헛된 꿈은 아니야.”      


 “넌 왜 늘 10년 전 너에게 머물러 있냐? 지금은 일러스트에 우리 같은 초보 몬스터가 나오냐? 안 나와. 왜 안 나오겠어. 그들은 이제 초보자 시절을 지우고 싶겠지. 흑역사 같은 거라고. 그러니까 우리는 그들에게 지우고 싶은 존재들밖에 되지 않는 거야.”     


 자꾸 자극하는 말을 하는 고블린에게 나도 지지 않고 맞섰다. 자기가 뭘 안다고, 하는 생각이 자꾸 생긴다.


 “너는 일러스트에 출연하지도 못했잖아. 너에겐 머무를 10년 전도 없으니까 내가 밉겠지. 하지만 나는 후배들에게 슬라임에 대한 희망을 줄 거야.”     


 일부러 후배들을 의식해 말을 세게 했다. 순간 고블린이 상처를 받으면 어떡하지, 생각했지만 타격은 전혀 없었나 보다.      


 “그래. 너 말 잘했네. 슬라임은 유저들이 귀엽다고 해주니까 오프닝에라도 나왔겠지. 우리, 고블린? 우리는 한결같은 반응이 ‘징그럽다.’야. 툭 튀어나온 배, 너덜너덜하고 입으나 마나 한 이 거지 같은 옷.”


 고블린의 말을 들은 후배 고블린들이 풀이 죽은 채로 바닥만 내려다본다. 고블린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너네는 초보자 퀘스트도 ‘슬라임을 무찌르고 슬라임의 액체를 10개 가져오세요.’가 퀘스트지? 우리는 ‘고블린을 10마리 죽이시오.’야. 기본 퀘스트부터, 차별이 안 느껴져?"     


 후배 고블린들은 더욱더 침울한 눈빛으로 술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이게 아닌데. 나는 침울해진 분위기를 애써 무마시키려 고블린을 진정시키고 달랬다.     


 "그, 그래. 내가 잘못했네. 그냥 나는 그렇게 살면 재미가 없으니까, 주어진 하루하루를 의미를 두면서 재밌게 살자는 의도로 한 말이지~!"

    

 고블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애초에 우리는, 재미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야." 


 이때, 한 고블린이 핸드폰을 보더니 순식간에 회식자리가 시끄러워졌다. 다들 웅성거리며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기도 하고. 처음엔 자기네들끼리 친해져서 놀고있는 줄 알았는데 점점 시끄러워지는 분위기에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는 찰나, 한 슬라임이 우리에게 헐레벌떡 뛰어와서 말했다.      


 "선배님, 게임이, 서버가, 서, 서버가 종료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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