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맑음 Dec 10. 2020

2020 치킨의 난

한 번 정도는 일으켜 볼 만 하다.


 나는 어렸을 때 동생과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와 살았다. 이유는 대부분의 맞벌이 집안들의 사정이 비슷하듯, 엄마도 아빠도 일하느라 바빠서였다. 엄마·아빠의 집, 할머니 집, 외사촌 집은 가까워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래서 외사촌 동생들도 할머니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니까 나의 어렸을 때 기억은, 조그마한 작은 평수의 집에 할머니, 할아버지, 나, 내 친동생, 사촌 동생 두 명과 함께 산 기억들로 가득하다. 

 편의상 둘째, 셋째, 막내로 표현한다면 나는 둘째인 친동생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우리는 연년생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연년생은 정말 숨도 안 쉬고 싸운다. 왜 숨도 안 쉬고라는 표현을 하냐면, 숨소리가 거슬려서 싸운다고 표현해도 과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 많이 싸웠다. 안 그래도 많이 싸우는 형제지간에 제어하는 부모도 없으니 우리는 사이가 정말 좋지 않았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나와 내 동생보다 더 많이 싸웠다. 아이들의 교육에 좋지 않게 듣도 보도 못한 욕을 하며 싸웠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더 힘드셨을 것이다. 할머니는 지금 생각해도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다. 애 하나도 힘든데, 애 네 명을 키울 수 있을까? 할머니는 당신의 딸과 아들들의 자식들을 정성스레 재우고, 입히고, 먹이고, 학교를 보냈다. 아침이 되면 애 네 명을 깨우고, 차례로 씻기고, 밥 네 그릇을 차리고, 잠이 덜 깬 아이들을 억지로 한 숟갈이라도 먹이고, 옷을 입히고, 숙제를 챙겨주고, 준비물을 챙기고, 넷의 머리를 묶어줬다. 그러면 그 전날 밤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넷의 알림장을 검사하고, 잠이 오지 않아 칭얼대는 애들을 번갈아 가며 재우고, 내일 반찬을 준비하고, 신발이 더러운 애가 있으면 신발도 빨아줘야 하고, 옷이나 가방도 빨아야 했다. 할머니는 새벽에는 밭을 가서 장에 팔 채소들을 수확했고, 밤에는 장에 나가 팔 수 있게 깻잎이라든지 상추, 호박잎 등을 빨간 노끈으로 하나하나 묶었다. 나는 한 달에 몇백을 준다고 해도 못 할 일들이다. 할머니의 노고는, 정말 다 서술할 수 없다. 

 우리는 중학생이 돼서 엄마와 함께 살았고, 고등학생 때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우리와 살던 집에서 떠났다. 엄마와 외삼촌이 어렸을 때부터 살던 집이니까 할머니는 40년 정도 살았을 것이다. 할머니는 새로 생긴 아파트로 이사를 하였고, 사촌 동생인 막내는 이러저러한 남들과 비슷한 사정으로 할머니와 둘이 살게 되었다. 삼촌, 엄마,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그 집을 가서 점심을 같이 먹곤 했다. 2018년 7월부터 생긴 우리의 일상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와 막내에 대한 애정이 특별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자주 갔다.


스무 살 생일 때 할머니께서 써 주신 편지(왼쪽), 막내가 15년 전 써 준 편지(오른쪽)


 할머니, 나, 막내는 평일에도 가끔 저녁을 먹었다. 우리 셋은 삼재였다. 한 날은 저녁을 먹을 때 막내가 말했다. 삼재 셋이서 먹고 있네, 할머니와 나는 웃었다. 할머니가 2019년 연초부터, 뭔가 일이 많았다. 뜬금없이 아파트 단지 내에서 산책하다가 개에 물려 응급실에 갔다. 나는 택시를 타고 응급실로 갔다. 엄마와 아빠, 삼촌은 회사에서 늦게 출발하여 내가 먼저 도착했다. 할머니한테 급하게 간 이유. 우리 할머니는 성격이 장난이 아니니까. 역시나 할머니는 개 주인아저씨와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소리 소리를 지르며 개와 아무 상관도 없는 아저씨의 상태에 대해 트집을 잡고 있었다. 산책을 시킨 건 개 주인아줌마였는데, 아줌마는 온데간데없고 주인아저씨만 와 있었다. 아저씨는 퇴근 후 집에서 막걸리 한 잔을 하시고 쉬고 계셨는데, 갑자기 아내 분이 연락이 와 개가 사람을 물었다고 나가보라고 했다. 할머니는 술을 마신 아저씨의 얼굴이 감홍시처럼 빨갛다는 사실에 화를 내고 있었다. 그래서 아저씨는 화가 나 있었다. 

 감홍시아저씨는 내가 집에서 술 한잔한 게 왜 혼나야 하는 일인지에 대해 황당하고 화가 났지만, 상대는 할머니기에 화를 내기 좀 그랬나 보다. 감홍시아저씨는 밖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아마 할머니의 보호자가 오기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나는 할머니한테 그만 좀 하라고 했고, 할머니는 계속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할머니를 진정시키고 있는데 엄마와 아빠가 도착했다. 그제야 감홍시아저씨가 엄마와 아빠에게 대화하며 명함을 줬는데, 끝까지 사과하지는 않았다. 할머니가 화를 돋운 경향이 있으니까. 엄마와 아빠는 할머니께 사과해달라고 했고, 감홍시아저씨는 내가 개한테 물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사과를 해야 하냐고 했다. 개가 잘못했지 내가 잘못한 건 아니지 않냐고 했다. 아빠는 화가 나서 개가 무슨 잘못이냐고, 개는 잘못이 없지만, 당신이 주인이지 않냐고 했다. 할머니는 더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계속 큰 소리로 감홍시 이야기를 해서 솔직히, 부끄러웠다. 숨고 싶었다. 

 감홍시아저씨는 팔짱을 끼고 엄마 아빠에게 화내고 있었고, 할머니는 물린 다리를 절뚝거리며 다가오면서 소리를 질렀다. 나는 할머니를 가로막고, 감홍시아저씨 앞으로 가서 얘기했다. 아저씨가 잘못 한 것은 아니지만, 아저씨가 개 주인인 건 맞잖아요. 사과하셔야죠. 할머니는 내 뒤에서 계속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아저씨는 드디어 사과했다. 다행이었다. 나는 솔직히 한 대 맞으면 어떡하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 후, 할머니를 진정시키고 몇 번 통원 치료를 같이 다녔다. 


 그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 몸에 이상이 생겨 수술하게 되었다. 할머니는 잘 아프지 않으셔서 수술 얘기를 듣자마자 겁내셨다. 갑작스레 생긴 수술에, 설이 다가와서 할머니는 걱정이 많았다. 설 지나고 수술해야 하지 않을까, 하셨다. 엄마와 삼촌은 빨리 수술하라고 했다. 할머니는 왜 이렇게 올해 병원 올 일이 많냐고 짜증을 내시고, 불안해하셨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할머니는 삼재라서 그렇다고 했다.

 삼촌은 막내에게 할머니가 수술하는 동안 하루 같이 있으라고 했다. 갑자기 잡힌 수술인데, 막내는 그때 친구와 여행을 가기로 약속을 잡아 놓았다. 해외여행이라 여행을 취소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취소해야 했다. 그 와중에 삼촌은 말을 예쁘게 하지 못해서, 막내는 화가 났다. 마치 당연히 네가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다. 막내는 짜증이 나 울면서 자기가 하는 일은 사회생활이고, 내가 하는 건 노는 거냐고 말했다.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어쨌든 나는 엄마와 모종의 딜을 하고 내가 하기로 했다. 할머니 병실에서 수술 후 하룻밤같이 있기. 

 병원은 불편했고, 한숨도 자지 못했다. 뭐, 낮에 자면 되니까 괜찮았다. 나는 막내보다 4살이 많았고, 이 말인즉슨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추억이 4년 정도 더 있다는 것이다. 할머니가 더 마음이 쓰이는 것, 너무 고생한 것들을 다른 동생들에 비해 4년 정도 더 많이 봤다는 이야기다. 이건 내가 착해서도 아니고, 안쓰러움 일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나는 저렇게 못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으니까. 

 퇴원하고, 할머니를 모시고 엄마와 할머니 집으로 갔다. 새 아파트는 보일러를 틀면 금방 따뜻해졌다. 할머니를 방 안으로 조심스럽게 앉히고, 엄마가 앉아서 내게 고생했다고 했다. 할머니는 엄마에게 내 칭찬을 많이 했다. 병원에서 얼마나 챙겨주고, 데리고 다녀주고, 과일도 사서 간호사들에게 나눠주고. 역시, 딸이 최고라고. 거기까지만 했으면 참 뿌듯했을걸. 할머니는 덧붙였다. 처음 태어났을 때는 아들이 아니어서 실망했는데, 역시 딸이 최고라고. 나는 난생처음 듣는 말에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아서, 할머니한테 할머니, 내가 아들이길 바랬었어? 하고 말하자 할머니는 아들이길 바라지 다들, 이라고 했다. 엄마는 나는 딸이 훨씬 좋은데. 라고 했다. 

 옛날 사람들. 옛날 사람들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다. 그건 시대와 세대의 견해 차이이기에 바꾸기 힘들다. 그런데, 내 안의 자격지심이 그때부터 작용했나 보다. 내가 이때까지 할머니한테 하는 사랑이, 짝사랑임을 확인받는 것 같았다. 슬퍼졌다. 이십여년간, 한 게, 짝사랑이었다니. 

 엄마는 어릴 적부터, 딸을 갖고 싶어 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자란 나는, 할머니도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할머니가 엄마와 삼촌에게 다르게 대하는 건 많이 봤는데도, 나는 다르겠지 생각했나 보다. 너무 충격이었다. 집에 가는 데도 엄마에게 말했다. 할머니가 내가 아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줄 꿈에도 몰랐어, 그러자 엄마는 별 신경 쓰지 않고, 그냥 하는 말이지, 옛날 사람들이 그렇지 뭐, 난 진짜 딸이길 바랐는데, 그래서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엄마가 당신의 자식이 딸이길 바랐던 건, 엄마가 자라면서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받은 차별, 혹은 편애의 영향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동안 나는, 할머니와 막내가 사는 그 집에 가지 않았다. 서운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혼자서 뭘 그렇게, 심술 맞아졌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다시 주말마다 삼촌과, 할머니와, 엄마와, 막내와 나는 밥을 먹었다. 변한 건 없었다. 


 2020년 4월 17일 금요일.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일 년 하고도 3개월이 지났을 때. 나는 2020년에 새 직장으로 2월에 취업했고, 4월 17일에 첫 월급을 받았다. 첫 월급으로 치킨과 맥주를 사 들고 막내의 집으로 갔다. 할머니와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할머니는 장이 안 좋다며 식탁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 계셨다. 막내와 나는 TV를 보며 치킨을 먹었다. 막내와 내가 번갈아 가며 할머니께 같이 먹자고, 했는데 할머니는 튀긴 걸 먹기 싫다고 하셨다. 우리는 TV를 보며 먹느라 꽤 오래 먹었다. 평소 같으면 20분 정도면 다 먹었을 것을, 한 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우리는 오랜만에 웃고 떠들며 즐거운 저녁을 보냈다.

 다 먹고 치우려 하니, 할머니가 기다렸다는 듯이 화를 냈다. 할머니는 어떻게 먹어보란 소리 한번 없냐고 화를 냈다. 나와 막내는 황당해서 할머니, 우리가 몇 번이나 같이 먹자고 했잖아, 라고 하자 할머니는 안 먹을 건데, 안 먹을 거지만 접시에 내서 맛보라고 갖다 줘야지, 했다. 화가 났다. 나는 참았다. 할머니는 계속 얘기했다. 다른 데서 그렇게 하면 욕먹는다, 어떻게 어른한테 먹어보란 소리 없이 너네끼리 다 먹냐. 나는 접시를 내려놨다. 와, 감홍시아저씨가 생각났다. 어떻게 이런 거로 트집 잡을 수가 있지? 그리고, 1년 전의 만들어진 자격지심이 터져 흘러나왔다. 내가 남자면, 내가 삼촌이었으면, 이런 거로 화도 안 냈겠지. 참았어야 했는데, 나는 화가 나서 소리 질렀다. 나는 일 년 전에 냈어야 할 화를, 그날 냈다. 

 처음으로 울면서, 할머니에게 소리 질렀다. 뭔가를 잔뜩 말했는데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내가 남자였어도 그랬을 거냐고, 하면서 갑자기 화를 마구마구 냈다. 그러고 옷가지를 챙겨서 집을 나와서 엉엉 울었다. 이걸 쓰려고 막내에게 그때 혼자 남아있을 때 어땠냐고 물어봤는데, 진짜 짜증 났었다고 했다. 언니는 나가면 그만이지만, 나는 여기 계속 있어야 하는데 저러고 나가면 나보고 어쩌라고. 하는 생각에 짜증도 나고 화도 났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근데 언니가 나가놓고 나중에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어. 그래서 괜찮아. 

 막내는 피시방을 갔고, 나는 밖에서 울다가 막내가 피시방에서 나를 기다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할머니랑 대화해서 내 마음속 응어리를 풀어야지. 사실 풀 수 없다는 것은 안다. 그냥, 이렇게 집으로 가버리면, 할머니는 또 우리 엄마에게 얘기할 것이고, 엄마는 퇴근하고 지친 와중에 내 방으로 들어와 뭔 일이었냐고 묻겠지. 그게 귀찮았다. 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할머니는 오긴 왔냐고, 그래도 경우가 있네, 하고 도대체 왜 그러냐고 했다. 남자였으면 안 그랬을 거잖아 라는 말은 왜 나오냐고 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정리도 안 돼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할머니 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할머니, 작년에 저 방에서 나한테 한 말 기억나? 나는 할머니가 내가 아들이었다면 좋겠다고 한 얘기를 듣고 너무 서운했어. 하고 이야기했다. 할머니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허무했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 할머니가 하는 잔소리를 듣고, 할머니가 나한테 서운했던 것들을 이야기했고, 난 듣고, 끝났다. 집에 가니 진이 빠졌다. 


 할머니가 나한테 대하는 태도는 조금 바뀌었다. 우리 할머니는 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에 대해 혼내는 사람이었다. 염색하든 피어싱을 하든 옷이 조금만 짧든, 같이 사는 우리 엄마는 한 달 동안 몰라보는 걸 귀신같이 잡아낸다. 할머니 집 가기 전엔, 나름의 준비를 하고 가야 한다. 여전하긴 하지만 이제 한마디 덧붙인다. 이거 네가 여자여서, 네가 싫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나중에 나가서 욕 먹을까봐 하는 말이라고, 나름의 눈치를 본다. 

 시간이 지나자 둘째와 막내인 동생들은 나에게 놀렸다. 예를 들어 할머니가 둘째에게 잔소리하고, 둘째는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면 막내가 말한다. 언니도 첫째 언니처럼 치킨의 난 한번 하라고. 그러면 우리는 웃는다. ‘2020 치킨의 난’은 이제 대명사가 되었다. 

 치킨의 난은 집집마다 한 번씩 있고, 굳이 나처럼 울면서 소리 지르는 흑역사를 만드는 수고로움을 하지 않아도 일어나는 것 같다. 조용히, 좋게 대화로 잘 풀리는 집도 있고, 뭔가를 던져서 깨부순 다음에 끝나는 집도 있고, 매일 치킨의 난을 일으키는 집도 있고, 죽을 때까지 치킨의 난 따위는 일으키지 않는 집도 있다. 

 그때는 참았어야 했는데, 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세대가 다르다고 참고 살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물론 소리를 지르고 울 필요도 없지만, 그게 부끄러운 것도 아니라는 걸 안다. 나는 참고 사는 아이였고, 남들에게도 세대가 다른 걸 니가 어떻게 바꾸겠어, 그냥 참고 살아야지, 라고 말하는 아이였지만, 치킨의 난을 겪고 말한다. 나 이런 일 있었는데, 사람이 살면서 치킨의 난 정도는 한 번 해보는 것도 괜찮더라, 라고. 그리고 덧붙인다. 이런 걸 한다고 딱히 바뀌는 건 없다고. 그래도 속은 조금 후련하다고. 앞으로 또 다른 치킨의 난이 생길 상황이 오더라도, 나는 참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남들에게도 한 번쯤은 추천할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