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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엽 Jul 21. 2020

사진. 독재에서 민주화로, 지면에서 인터넷 공간으로

90년대 한국 다큐멘터리–저널리즘 사진의 움직임과 웹진 이미지프레스 창간

민주화 투쟁과 현실 참여 사진


90년대 사진을 전사와 명확히 구분해 낸다는 것은 난망한 일이다.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비균질성을 발견한다는 것이 그렇다. 하지만 분명히 시대를 가를 사건의 분기점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이야기할 한국의 90년대 ‘다큐멘터리-저널리즘 사진’이 그렇다. 이 명칭은 사실 자의적이지만 당시를 복원 할 적절한 단어이기도 하다. 현장 중심의 사회 참여적 사진에 대해 적절한 용어가 부여되지 못했던 시절이었기에 그렇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90년대 ‘다큐멘터리-저널리즘 사진’을 이야기하는데 있어 80년대를 돌아보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어떤 모순들이 쌓여 새로운 흐름을 창발 했는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더 그전을 소환하기에는 여기 지면이 부족하므로 80년대 중반에 집중해보도록 하자. 여기 사진이 한 장 있다. 한 청년은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의식을 잃었고 한 청년은 그를 부축하고 있다. 로이터통신의 사진기자 정태원이 연세대 앞에서 찍은 고 이한열의 사진이다. 이한열은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을 머리에 맞아 사망했다. 그리고 우리가 민주화 역사에서 하이라이트라 생각하는 6월 항쟁을 연 서막 같은 사진이다.

사실 컬러 티브이가 방송되던 시기에 여전히 사진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이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진으로 대중은 폭발했고 연일 도심은 ‘독재타도’를 외치는 인파로 가득했다. 대학 캠퍼스는 해방구가 되어 숨어서나 보던 영상물들이 공공연하게 상영되기 시작했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를 다룬 <언더화이어>나 엘살바도르의 정치 스릴러 <살바도르>가 대학 내에서 상영되고 그 주변에서는 사회사진연구소나 민족사진연구회의 아스팔트 데모 사진이 전시됐다. 문자에 익숙하던 시대가 영상의 세대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었다. 80년 광주항쟁 이후 지하에서 활동하던 지식인들이 유화국면을 틈타 공개적인 활동을 개시하며 미술인이나 사진가들과 교류의 폭을 넓힌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남한 내에 머물지 않고 세계적인 정보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80년대 청년들의 문화적인 감성도 정치투쟁 일변도에서 주변부 예술을 도구로 끌어들이는 변화에 한몫했다. 사진가 성남훈은 80년대 말 대학에서 연극을 하다 사진으로 진로를 변경한다. “당연히 우리 시대 문화의 가장 큰 화두는 민주화였다”고 이야기 한다.

이런 변화가 사실은 전두환 정권이 만든 3S 정책(섹스, 스포츠, 스크린)과 86년 아시안 게임, 88년 올림픽이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80년대는 경제적인 상황이 매우 좋았다. 세계적인 수직 분업화의 중간 다리 역할을 했던 당시 한국은 제조업의 강국이었다. 경제는 매년 두 자리 성장을 했다. 단지 먹고살던 70년대를 지나 문화라는 것을 소비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특히 사진 분야는 88년 올림픽에 큰 영향을 받는다. 세계적인 행사였기에 국내 가장 이름 있는 사진가들이 모여든 것은 물론이고, 프레스센터에는 세계적인 명성의 사진가들까지 장사진을 이룬다. 이곳에 니콘과 캐논 등의 카메라 메이커가 최신의 장비를 들고 왔으며, 코닥 같은 필름 제조사들은 본사 직영 현상소를 차려 즉석에서 현상 서비스를 했다. 당시 한국일보 기자였던 사진가 박종우는 “현상소 앞에서 유명 사진가를 기다렸다가 그가 잘라 버린 자투리 필름을 보며 최신 테크닉을 훔쳤다”고 할 정도였다. 게임 사진 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전반을 취재하기 위해 미국의 시사지 <타임>이나 <뉴스위크>가 최고급의 사진가들을 서울로 파견했다. 그들의 작업은 바로 본국에서 게재됐지만 한국에서는 검열되어 잘려 나갔다. 그래도 볼 방법은 많았다.

이렇듯 민주화와 경제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청년들에게는 대학 졸업 후 여러 개의 일자리가 보장됐다. 더 좋은 곳으로 골라 가면 됐다. 하지만 이런 풍요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다. 공장이나 무역회사가 아닌 문화 현장으로 간 것이다. 마치 일본 전공투 세대들이 그랬던 것처럼 운동하던 청년들은 전 세대들이 별로 인정치 않았던 선택을 했다. 출판, 영화, 사진은 그 중 인기 있는 분야였다. 전공자든 비전공자든 가리지 않았다. 특히 사진 분야에서 현실 참여파들은 거개가 비전공자들로 채워졌다. 그들이 90년대 사진으로 진출한 것이다.


90년대 신문 잡지를 통한 다큐-저널리즘 사진의 동향


90년대 초반은 매체의 전성시대였다. 88년 진보적인 언론관을 가진 한겨레신문이 창간했고 89년 미국의 주간지 <유에스 뉴스 앤 월드 리포트>를 벤치마킹한 <시사저널>이 등장했다. 91년에는 <길을 찾는 사람들>, <사회평론>과 같은 진보적인 월간지도 나타났다. 87년 체제 이후 새로 등장한 수십 개의 매체들은 수백의 직간접 고용된 사진기자들을 양산했다. 과거 소수의 전공자들에 의해 독점되던 사진기자 판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특히 사진학이 아닌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지녔던 이들은 자신들이 생산하는 사진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했다. 기존의 답은 ‘보도사진’이었다. 매체에서 종사하는 이들 모두 그리 불렀고 사회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진은 보도사진이라고 했다. 90년대 참여적 사진을 지향하던 이들은 이 단어자체의 함의를 돌아보면 반기를 들었다. 도대체 무엇을 보도한다는 것인가?

보도라는 말은 1934년 일본의 사진평론가 이나 노부오가 독일의 르포르타쥬라는 용어를 일본식으로 옮긴 것이다. 바르게 알려 가르치고 지도한다는 의미이다. 이 용어는 바로 사진에도 적용됐으며 일제 강점기 일본인 사진기자들이 사용하던 용어를 해방 후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90년대 내내 언론 현장이나 대학 사진과에서도 공식적으로 사용하던 용어를 일군의 현장 사진가들이 ‘포토저널리즘’으로 변경하자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두 이 용어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포토저널리스트만으로 규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보도사진 외에 르포르타쥬나 다큐멘터리 같은 용어도 함께 사용됐다. 강단이나 사진계 내부의 보먼트 뉴홀 ‘사진사’에 능했던 이들은 다큐멘터리라는 용어를 좋아했다. FSA(미농업안정국)의 워커 에반스가 정리한 다큐멘터리사진은 사회적 관심을 과장 왜곡 없이 명료하고 함축적으로 표현한 사진이었다. 예술사진의 미학적 표현과도 충돌이 없었다. 80년대 이런 다큐 사진의 성과는 강용석의 <동두천 기념사진>에 잘 나타나있다. 그에게 다큐는 대상을 해석하는 작가의식의 산물이었다. 또 한편에서는 유럽식의 르포르타쥬 사진이 있었다. 이는 독일 근대 신즉물주의의 새로운 기록 양식으로 회화적인 사진과 구별해 사회, 자연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사진이었다. 프랑스의 잡지들은 이와 상관없이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류의 연작사진에 르포라는 명칭을 붙였다.

90년대 한국의 현장 사진가들은 이런 다양한 용어 속 함의를 찾고자 했고 보도사진을 버렸다. 대신 42년 미국의 미주리저널리즘스쿨의 프랭크 모트가 주창한 포토저널리즘이 수용됐다. 그가 정리한 포토저널리즘은 글과 사진이 매체로 결합하여 신문 잡지에 표현된 상태 또는 양식이었다. 결국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글과 사진, 디자인 요소가 융합된 결합물이었다. 이런 방식은 국내 최고의 주간지였던 <시사저널>이 실제로 편집과정에서 도입해 성과를 거두었다. 사진 한 장을 두고 편집자-사진가-디자이너가 다투면서 의미를 결정짓는 방식인 것이다. 결국 포토저널리즘 사진이란 것은 오직 매체의 영역에 존재했으며 그 상태를 벗어나면 다큐멘터리 사진이 되는 형국이었다. 사실 당시 사진가들은 이를 즐겼다. 그들은 수많은 매체를 상대로 사진을 거래 해 실었고 원고료를 받았다. 하지만 매체의 영역에서 벗어난 단행본과 전시장에도 같은 사진을 실었다. 이는 전혀 다른 맥락의 사진으로 취급됐다. 90년대 초반 최민식, 김문호, 안해룡 등이 참여했던 <사진 집단 사실>이 그랬다. 그들은 경제적인 포토저널리스트였고 예술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가였다.


외신과 유학파들의 등장, 동시대 외국 사진의 수입


90년대 현장 사진의 또 다른 특징은 국제화다. 이전 사진이 일본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면 90년대는 유럽과 미국의 영향이 컸다. 특히 미국의 매체 사진은 대단한 파괴력을 발휘했다. 냉전 해체 이후 사회주의 붕괴가 이어졌고 민족주의가 창궐했다. 이는 내전으로 이어져 인류 역사에서 드문 학살이 세계 도처에서 발생했다. 아프리카의 자이르-르완다 내전과 동구의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내전이 대표적이다. 또한 권위주의 해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의 종식을 가져왔고 중동지역은 인티파타가 성장했다. 그야말로 세계는 사진기자들에게 책임감과 소재주의라는 시소의 윤리적 시험대였다. 대표적인 것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신문에서 일하던 일군의 프리랜서 사진가들의 모임인 ‘뱅뱅클럽’이다. 케빈 카터 등이 참여한 이 자생적 그룹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사진들을 남기며 내전과 혐오의 폭력들을 가감 없이 담아냈다. 하지만 케빈 카터가 수단에서 찍은 소녀와 독수리 사진으로 인해 자살하면서 사진가의 윤리성에 대한 질문을 남겼다.

이는 즉각적으로 국내 현장 사진가들에게도 전해졌고 마침 프랑스 사진 에이전시 라포의 소속 사진가였던 성남훈의 귀국으로 불이 붙었다. 우선 국내에 세 개뿐이던 통신사, 즉 AFP, AP, 로이터가 시파, 감마, 게티이미지 등으로 다변화 됐다. 외신들과 계약한 새로운 집단이 탄생해 프레스센터 외신기자 클럽이 젊은 피들로 북적였다. 또한 2차 해외 유학 붐이 일었다. 80년대 유학파들이 강단을 목적으로 유학에 떠났다면 90년대 이들은 실무와 취업이 목적이었다. 어떤 이들은 유학보다 더 짧게 해외 워크숍을 준비해 떠나기도 했다. 97년 웹진 <다큐네트>가 주최한 워싱턴 사진 워크숍에는 현장 사진가와 신문사 기자, 대학원 학생들까지 참여해 미국으로 갔다. 그 곳에서 당대 가장 명성을 날리던 유진 리처즈, 레자, 김영희, 피트 수자, 데이비드 앨런 하비 등과 만나기도 했다. 이렇게 동시대 사진들을 경험하고 익힌 일군의 현장 사진가들은 한국 매체 사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최항영은 보스니아 국경으로 가서 난민을 취재했고, 이진만은 자이르에 가서 폭력을 고발했다. 이상엽은 민다나오의 게릴라를 찾아 헤매고 동티모르의 독립현장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도 오래가진 못했다. 98년 한국의 금융위기가 오고 IMF체제가 들어서자 언론 매체들은 사진에 투자되던 자본을 빼기 시작했다. 먼저 외부에서 활동하는 사진가들이 배제됐고 두 번째는 신자유주의적인 아웃소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규직에 종신고용인 사진부에 소속된 기자들을 위협했다. 약 10년 정도 지속된 호황은 저물기 시작했고 새로운 현장 사진의 스타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터넷 매체의 등장과 새로운 형식의 현장 사진


90년대 현실 참여형 사진가들의 특질 중 하나는 이론적인 배경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벤야민과 바르트, 손탁을 읽었고 자신의 사진을 비추는 거울로 삼았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두 가지 고민이 있었다. 다큐멘터리-저널리즘 사진은 단지 폭로하고 변화시키는 거대담론만 존재하는가? 개인의 감성과 미학은 병립할 수 없는가? 거대 악을 상대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윤리를 가져야 하나? 사실 이 같은 고민과 논쟁은 해외에서 먼저 촉발됐다. 같은 해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를 취재했던 포토저널리스트 제임스 낙웨이와 질 페레스는 전혀 다른 사진을 대중에게 내보였다. 낙웨이는 거대 폭력에 맞서는 폭력적인 사진을 보여줬고 페레스는 사건의 검시관인양 판단보다 증거에 주목했다. 이는 앞으로 올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의 사진 방향이기도 했다. 사진가들은 설왕설래했다.

두 번째는 이러한 고민들이 현실적 포토저널리즘을 추구하는 매체들과 불화했다는 점이다. 한국의 매체들은 여전히 객관적이며 뉴스가치 있는 사진을 원했고 사진가들은 새로운 실험을 원했다. 이 때 태어난 새로운 미디어가 인터넷이다. 97년부터 서비스가 시작된 한국에서 가장 먼저 탄생한 사진 매체는 <다큐네트>였다. 나명석, 성남훈, 이상엽, 서헌강, 이규철, 송정근 등이 참여했던 이 매체는 느린 전송 속도와 낮은 해상도에서 불구하고 사진을 모니터로 감상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혁신적이었다. 또한 기존 종이 매체들이 담기 힘든 내용과 형식에서 자유로웠다. 하지만 동인지적인 한계로 인해 이듬해 청산되고, 이상엽에 의해 창간된 월간지 형식의 웹진 <이미지프레스>가 등장한다. 9년 동안 총 71호를 발행했고 100여명의 사진가들의 350개 기사를 게재했다. 90년대 현장에서 다큐멘터리-저널리즘 사진에 종사한 청년들 대부분이 이 매체로 수렴됐다. 이곳에서 다양한 형식과 내용이 실험됐고 검증됐다. 90년대 이후 사진은 몰락하는 종이 매체에서 갤러리나 미술관 같은 전시장으로 이전됐고, 거대 담론은 미시적 세계로 치환됐다. 더 이상 90년대를 풍미한 전성기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몰락도 아니었다. 다만 변했다.


현장 중심의 참여적 사진의 유산


90년대 사진의 특징은 민주화와 경제적 발전이라는 배경적 요소를 간과할 수 없다. 이 둘이 특히 강세를 보이던 다큐멘터리-저널리즘 사진의 탄생과 발전의 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신흥 언론사들을 상대로 작업을 했고 경제적으로 예술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동시대 기존 담론들을 거부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경제적인 위기와 새로운 세대 가치관의 부상은 이들의 노력을 구체제로 만들기 충분했다. 어쩌면 한국의 현실참여적인 다큐멘터리-저널리즘 사진은 세계적인 기준으로 볼 때 막차를 탄 셈이었다. 발전도 퇴조도 빨랐다. 하지만 유산도 있다. 이전 사진계가 학맥과 인맥으로 구성되었다면 90년대 이후 등장한 세대들은 민주와 진보라는 이념적인 배경으로 뭉치고 헤어졌다. 사진의 형식 보다는 내용의 구성에 더 치중했으며 사회적 윤리에 더 민감했다. 하지만 현재 40~50대를 이루고 있는 90년대 세대들이 선명하고 완결적 자기 정체성을 갖고 있다 평가하긴 힘들다. 이들은 선배 세대들의 자기만족적인 성향이나 후배 세대들의 해체적 성향 사이에서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듯 보인다. 어쩌면 그 것 마저도 이들이 숙명적으로 안고가야 할 90년대 유산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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