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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엽 Aug 11. 2020

디지털 환경과 포토저널리즘의 과제

찍는 것이 아니라 보고 읽는 것이다



과거수잔 손택의 과잉

포토저널리즘의 역사는 백년이 됐다. 사진의 망판기술을 통해서다. 종이에 직접 인쇄하는 방법이 발명되면서 20년대 독일 신문에서 시도되고 30년대 미국에서 꽃을 피웠다. 잘 알려진 <라이프>나 <룩>이 사진을 이용한 저널리즘의 대표적인 매체로 꼽힌다. 초기 포토저널리즘은 대형카메라와 벌브라는 일회용 프래쉬 등의 기술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매일 특별한 사진을 실어야 한다는 속보와 특종 경쟁이 치열했다. 이러한 매체 환경 속에서 소형카메라나 연속 발광하는 스트로보의 발명, 원거리 전송 방법 등 사진의 발전은 포토저널리즘에 기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문은 조간과 석간으로 하루 두 번씩 발행하기도 했으며 심도 싶은 취재를 요구하는 분야에서는 내셔날지오그래픽 같은 월간지도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이런 경쟁은 사진의 스펙터클과 센세이션널리즘을 낳았다. 사진의 스펙터클은 기술의 발전으로 평소에 보기 힘든 극적인 장소나 인물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 대중의 눈길을 끌었다. 또한 흔치않은 사건은 자극적이며 선정적인 모습을 포착함으로써 대중의 입맛을 맞췄다. 여기에는 전쟁, 살인, 섹스 등이 단골 소재가 됐다. 세계 2차 대전에서부터 베트남전까지 포토저널리즘은 이런 대중들의 기호에 맞는 사진들을 제작하고 유통시켰다. 물론 이런 포토저널리즘은 대중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교양을 높이는 동시에 언론 자본의 증식을 돕는 양면이 있었다. 이런 포토저널리즘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 유명한 수잔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다. 손택은 포토저널리즘이 스펙터클과 센세이션널리즘에 빠져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다고 지적한다. 더 나아가 피사체를 기만하고 착취한다고 하면서 현대 포토저널리즘의 생태를 질타했다. 이러한 의견은 현장의 사진가들에게 널리 퍼지면서 자책감과 회의감에 젖게 만들기 충분했다. 하지만 꼭 전달되어야 했던 현장의 모습마저도 주저하게 만들며 발표 된 사진의 진정성에 대한 불필요한 논란까지를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진기자 케빈 카터가 찍은 수단의 독수리와 소녀 사진이 그것이다. 이 사진의 논쟁으로 사진가는 자살했다. 이것을 포토저널리즘의 ‘손택 과잉’이라 할 수 있다.  


현재예술로 말한다

과거 포토저널리즘과 예술사진은 경쟁관계가 아니었다. 압도적으로 큰 사진계 지분을 지녔던 포토저널리즘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나 유진 스미스와 같은 예술적 사진가를 배출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 말 매체에서 사진의 영향력은 줄어들고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전시되는 예술 사진의 영향력은 커져갔다. 포토저널리즘의 가장 영향력 큰 집단이라 할 수 있는 매그넘도 기존의 스타일을 바꾸기 위해 예술적인 성취도가 높은 회원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즉 과거의 포토저널리즘이 직관적이며 폭로적인 스타일이었다면 예술 사진의 상징과 은유, 미려한 형식을 가져와 새로운 비쥬얼로 대중에게 어필하는 전략인 것이다. 또한 이는 손택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방법이기도 했다. 일찍이 미국의 사진가 로버트 프랭크는 “형식없는 다큐멘터리처럼 볼품없는 것이 없고, 내용 없는 예술사진처럼 허무한 것이 없다”는 이야기가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에 나타난 사진계의 현상은, 다큐멘터리 사진-포토저널리즘이 매우 예술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매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리는 월드프레스포토 콘테스트에서 수상하는 사진들은 한 장으로 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은유적이고 형식적인 사진들로 넘친다. 반대로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예술사진들은 매우 비형식적이고 완성도 떨어져 보이지만 내용으로 충만한 잇슈를 전달하고 있다. 어찌 보면 20세기 전반의 풍경과 완전히 정반대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이 둘은 이제 경쟁관계다. 대중매체들의 세력 약화의 반대편에서 미술관은 수많은 목적적인 대중들에게 어필하며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다. 기존의 포토저널리즘도 예술을 수용하며 매우 완성도 높은 사진을 추구하게 됐지만 그 전성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언론사들의 구조조정과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그러한 자본집약적인 성과물들을 지속적으로 생산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미래에디팅이 결정한다

현재 사진은 완전한 전환기에 놓여있다. 사진의 발전, 특히 포토저널리즘은 기술의 발전과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 대형 유리건판 사진이 20세기 소형 카메라와 셀를로우스 필름의 발명 그리고 21세기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일정정도 원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구조를 갖고 있다. 사진을 찍고 유통하는 완전한 혁명은 아직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진 혁명은 무엇인가? 발터 베냐민의 이야기처럼 완전히 아우라가 사라진 무한의 복제와 누구나 찍고 유통할 수 있는 사진의 단계다. 그리고 지금이다. 그 예증이 우리 핸드폰에 있는 카메라다. 지금 삼성이 개발한 1억화소의 광센서와 샤오미가 그것을 탑재하려는 스마트폰이 있다. 렌즈는 광각, 표준, 망원이 달리고 흑백전용 렌즈도 별도로 탑재한다. 이런 스펙만으로도 수백만원짜리 고급형 카메라를 대체한다. 게다가 녹음, 필기, GPS정보, 동영상이 추가된다. 이것은 포토저널리즘이 요구하는 모든 정보도구의 집합이라 할만하다. 이것을 특정의 사진기자가 소유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갖고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포토저널리즘은 이제 모두의 사진 장르가 된다. 재난과 전쟁터에서, 관광지에서, 음식점에서, 집회현장에서 사용된다. 이렇게 수많은 사진들이 넘쳐나고 있고 또 쌓이고 있다. 포토저널리즘은 이제 완전하게 이러한 사진들도 대체될 것이다. 하지만 이 사진들이 정말 대중들이 볼만한 사진일까? 그렇지는 않다. 대다수는 쓰레기이며 형식과 내용이 완비된 사진은 극소수일 것이다. 그럼 그것을 어찌 판별할 것인가? 첫 번째는 AI의 도움으로 받아 1차 에디팅을 이루어질 것이다. 목적에 맞는 사진을 서치하고 골라내며 내용과 형식의 수준에 맞는 것을 선정할 것이다. 2차로는 인간 에디터들이 그것을 재검토하며 감성과 윤리에 적합한 사진을 최종으로 판별해 유통시키는 것이다. 못해도 10년 내에 많은 미디어에서 활용 된다. 선택 된 사진에 대해서는 소정의 원고료나 댓가를 지불할 테지만 많은 언론사들이 결국 고용 된 사진기자들을 정리하거나 최소화 할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사진부는 에디터 체제로의 전환이 시급한 것이다.   


디지털 환경에서의 포토저널리즘 과제는 찍는 것이 아니라 보고 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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