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사진의 역사사회학 / 미군 사진부대의 활동을 중심으로>
흥미로운 소재와는 달리 각목 같은 문장이 나를 늘어지게 하던 책의 중반, 아주 익숙하지만 충격적인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인터넷 등을 통해 대중에게 아주 잘 알려진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일어난 정치범 학살’ 사진이다. 머리가 짧게 잘려진 한 사내가 엎드려 있고 그의 앞에는 시체들이 쌓인 구덩이가 있다. 카메라를 쳐다보는 그이의 눈은 한없이 절망스럽다. 살려달라고 하소연 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것이 전부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사진의 프레임 바깥은 더 이상의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에는 구체적인 상황을 알 수 있는 6장의 사진이 시간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트럭에 태우고 온 일군의 민간인이 땅에 쪼그려 앉아있고, 경찰들이 이들을 감시한다. 정규군인 헌병이 이들을 일렬로 엎드려놓고 총으로 사살한다. 그리고 학살한 사람들 중에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이 있나 재차 확인 사살한다. 이 6장의 사진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한 달도 안 돼 남쪽에서 자행된 홀로코스트다.
한국전쟁의 홀로코스트를 담은 미군의 사진
이 사진은 1950년 7월 3일~5일 사이에 일어난 대전형무소 정치범과 인근 지역의 보도연맹원에 대한 산내면 낭월동 골령골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들은 6월말과 7월 17일 사이 3차례에 걸쳐 학살되었다. 내가 책에서 본 사진 6장은 당시 촬영된 사진의 일부로 총 18장이 존재하며 그 촬영자는 미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 총책임자 애버트 소령이다. 책은 “(그가) 라이카 카메라로 직접 촬영했다. 이 사진들은 사진병의 통상적인 사진 활동의 결과물이 아니다. 정보장교들이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기록과 보고의 차원에서 촬영한 것이다”라고 밝힌다. 우리는 한국전쟁 당시 연합군이라는 이름으로 참전한 미군이 이 학살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진 않았어도 방조한 공범이었음을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충격적인 사실인 것이다.
미 극동군 사령부 G-2의 직접 지휘를 받는 고급 장교였던 에드워드 중령은 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북한의 라디오는 최근 남한에서의 잔학성과 대량 처형에 대해 주장했다. 이 주장은 상당 부분 과장됐지만 전쟁 발발 직 후 남한 경찰이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자행해 온 것은 사실이다. … 수천명의 정치범들을 몇 주 동안 처형한 것으로 우리는 믿고 있다. 이러한 처형 명령은 최고위층에서 내려 온 것이다.” 그의 보고서대로 이 사진들은 미군이 목격자격인 것처럼 처리된다. 그리고 그 목격담을 정리해 대책을 마련하고자 최고 등급의 정보로 분류하고 비밀에 붙였다. 이 사진에는 미군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들은 목격자 또는 관찰자의 시각(視覺)에서 사각(死角)으로 벗어나 있었다. 한겨레신문 2015년 6월 19일자 기사에 따르면 “중령이 미 본토로 보고문을 보낸 시점엔 이미 최대 6900명의 민간인이 골령골에서 학살된 뒤였다. 학살을 실행한 이들은 충남지구 육군특무대(CIC)와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등으로, 당시 전국에서 일어난 국가 공권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 중 최대 규모였다”고 했다.
비평가 수잔 손택이 그의 책 <사진에 관하여>에서 이야기한 한국전쟁과 사진에 대한 평은 꽤 의미심장하다. “어떤 면에서 10여 년 뒤에 발생한 베트남 전쟁보다 생태계 파괴와 집단 학살이 훨씬 더 철저히 이뤄진 한국 전쟁의 참상을 사진으로 볼 수 있었다면, 미국인들이 그토록 한결같이 한국 전쟁을 묵인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점이 있다. 그 당시에는 이데올로기적인 이유로 그런 사진이 설 만한 자리가 없었으며 마찬가지로 대중도 그런 사진을 보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한국전이나 베트남전이나 모두 이데올로기적이었지만 그 수용하는 집단이 달랐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호전적인 시민과 60년대 시민권 쟁취 운동이 벌어지던 시대 시민은 당연히 달랐다. 손택은 이어 이야기 한다. “적들도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평양의 일상생활을 찍은 사진을 들여오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베트남 전쟁을 야만적인 식민 전쟁으로 여겼다. 그와 달리 한국 전쟁은 자유 진영이 소련과 중국에 맞서 벌이는 투쟁의 일부로 받아들여졌고, 이런 특성을 감안 할 때 무제한적으로 화력을 퍼붓는 미군의 잔인함을 사진에 담는다는 것은 부적절한 행위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골령골의 이 슬픈 얼굴 사진은 재미사학자 이도영 박사가 1999년 12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찾아내기 전까지 알려지지도 않은 채 기밀 문서로 잠들어 있었다.
사진은 어떻게 전쟁을 담아왔는가
우리는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는 것일까? 아주 오래전 부족 간의 전쟁은 나이 든 자들로부터 전설처럼 구전을 통해 전해졌을 것이다. 저 위대한 시인 호메로스는 <일리아드>를 통해 트로이 전쟁을 이야기 했지만 근대까지 사람들은 그 전쟁이 실제로 있었다고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리스 이후, 눈만 뜨면 전쟁을 일삼은 로마인들의 전쟁은 상세한 글을 통해, 회화를 통해, 조각을 통해 속속들이 안다. 르네상스 이후 전쟁은 회화의 단골 소재였으며,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침공하면서 전쟁의 모든 것을 기록하기 위해 200명의 화가를 대동했다. 전쟁은 기록이 필요했고 이왕이면 생생한 시각적인 정보를 요구했다. 이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19세기 초반 사진술이 발명되고 새로운 소통의 형식으로 받아들여진다. 당시 런던 최고의 예술비평가로 이름을 날리던 엘리자베스 이스트레이크는 에세이 <사진술>에서 사진이 순수예술에 포함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다음과 같이 예언자적인 이야기를 한다. “사진술은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진술하겠다고 맹세한 증인과 마찬가지다. 기계학, 공학, 지질학, 자연사 등 사진이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은 바로 가장 확고부동하고 순수한 사실 아닌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형태의 소통방식이며, 문자도, 메시지도, 그림도 아니면서 다행히도 이들 사이의 공백을 메워주고 있는 사실 아닌가.”
따라서 이런 평가에 걸맞게도 영국인 로저 펜튼이 전쟁을 제일 먼저 사진으로 옮긴 사람이 됐다. 그는 법률가에서 이직한 아마츄어 사진가였다. 1855년 콜로디언-습판(젖은 유리 필름 방식) 사진술을 이용하던 펜튼은 마차 한 대에 암실 장비를 싣고 크림전쟁터로 떠났다. 보먼트 뉴홀의 <사진의 역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카메라 다섯 대, 7백장의 유리 감광판, 화학 약품, 휴대용 식량, 마구, 기타 작업 도구와 기자재들. 지브롤터에서는 말 4필을 구매했다.” 크림 전쟁터는 광활한 평원이었고 포탄만 뒹구는 그의 사진은 밋밋하다. 하지만 이 사진 속 풍경에서 그는 가족에서 편지를 썼다. “가능한 바싹 접근하여 마차를 세우고, 뛰어나가려는 참인데 갑작스레 한 무더기의 먼지가 풀썩 일었어. 내가 촬영하려던 자리가 바로 포격 선상이었던 거야.” 그는 콜레라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가 촬영된 3백점의 음화를 가지고 런던으로 돌아왔다. 런던의 <타임스>는 그의 사진에 대해 “이 사진가는 전투가 지나간 자리에 널려있는 정물들이나 병사의 휴식을 담는데 만족했음이 분명하다”고 썼다. 사진은 따분했고, 목격자로서의 성실함이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어서 “재현하고 있는 것은 사실임에 틀림없고, 장군들 못지않게 병사들의 모습도 훌륭하게 묘사하고 있다”며 초상 사진가로서는 인정하고 있다. 아직 당시 사진술로는 전쟁을 충분히 담아내기에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10년 뒤 매튜 브래디는 미국 남북전쟁을 상당한 수준에서 기록함으로써 환영을 받게 된다. 아더 로스타인은 <다큐멘터리 사진론>의 7장 ‘전쟁에 대항하는 복음서’ 편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암실은 나무로 벽을 만들고 차양막을 둘러쳐서 뒷문을 닫으면 햇빛이 완전히 차단됐다. 암실 안은 사진판과 화공약품 그리고 대형 카메라와 삼각대 등을 넣어두는 창고로 사용됐다. 특히 미국 남부의 여름 햇살은 강렬하기 때문에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암실은 숨막힐 듯한 찜통이 되어 버린다. 게다가 무거운 주황색 빛을 내는 암등은 암실의 열기를 더해 주었다.”
브래디는 사진 한 장을 제작하기 위해 암실에서 깨끗한 유리판에 콜로디온 질산은을 입혀 감광판을 만들고, 홀더에 넣어 카메라에 장착한다. 카메라를 들고 나가 밝은 햇살 속에서 약 3초간 노출(촬영) 한다. 그리고 재빨리 암실로 돌아와 감광판을 초성몰식자산액(현상액)에 담근다. 상이 나타나면 물에 씻은 후 차아황산나트륨액(정착액)을 붇는다. 그리고 한번 더 물에 담근 후 재빨리 말린다. “이런 작업을 하는 동안 브래디는 포탄이 날아들어 마차 위의 암실이 박살나지 않도록 빌어야 했다.”(같은 책) 하지만 세기가 바뀌면서 사진술은 개선되었고 사진가들은 좀 더 생생하고 박진감 넘치는 전쟁사진들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는 35밀리 소형 카메라의 등장과 밝은 렌즈, 필름의 고감도 기술 등의 발전에 힘입은 것이다. 특히 2차 대전 당시는 이러한 사진술의 발전에 힘입어 탁월한 전쟁사진가들이 탄생했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했던 로버트 카파는 “당신의 사진이 좋지 않다면 당신은 충분히 접근하지 않은 것이다”란 이야기로 유명세를 탔다. 그의 동료였던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역시 2차 대전을 군인으로, 전쟁 포로로 다시 레지스탕스와 사진가로 활약한 인물이었다. 바로 이 때, 우리가 한국전쟁의 사진을 이야기할 대목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진가가 등장한다. 속칭 D·D·D라 불린 데이비드 더글라스 던컨이다. 그가 전쟁에 대해 어떤 철학을 지녔던 2차 대전과 한국전쟁에서 하나의 스타일을 만들어낸 사진 역사 속 인물이기에 우리는 그를 알아봐야 한다.
한국전쟁과 한 전설적인 종군 기자
던컨은 대학시절 복싱선수로 40차례 경기에 나가 거의 이겼다고 한다. 졸업 후 심해 잠수부, 항공사, 광고 사진가 등을 거치고 1943년 미 해병대의 사진 담당 장교가 됐다. 그는 카빈 소총을 들고 전투를 벌이며 사진을 찍었다. 피지와 오키나와 등 태평양에서 스물여덟 번 낙하했고, 도쿄만의 항복 조인식에서 해군을 대표해 역사적인 장면을 촬영했다. 그는 한국전쟁에도 참전했다. 46년부터 라이프지의 전속 사진가로 활동한 그는 오랜 배속 부대였던 해군 제 1함대와 함께 북쪽인 압록강 하구에서 남쪽인 대한해협까지 종군했다. 그의 사진은 2차 대전에 참전했던 로버트 카파나 유진 스미스와 달랐다. 전쟁으로 고통 받는 대다수 인민들의 모습 보다는 참전한 군인에 집중했다. 반전보다는 전쟁을 인류의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전쟁이 인간에게 끼친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인간이 공동의 위험과 투쟁할 때 그들을 결속시키는 어떤 동지애 같은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첫눈에 자기들을 죽이려하는 인간들의 전진을 막기 위해 자기들에게 죽음이 임박해 있을 줄을 알면서도 총검만으로 무장한 채 포복해 나갈 힘을 갈구하는 인간의 살고 죽는 방식을 보여주고 싶었다. 전쟁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며 항상 인간에게 존재했기에 나는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다만 그 전쟁들의 무기와 전장과 원인만이 변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그는 전쟁사진에만 몰두했고, 종군 사진가가 될지 모를 사람에게 마치 로버트 카파처럼 주문했다. “가까이,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단순하게 사진을 찍어라.” 하지만 이 같은 방법은 진실에 다가가라는 카파의 주문과는 사뭇 다르다. 일찍이 발터 베냐민은 사진의 특성에 대해 이렇게 예언하고 있다. “사진을 활용해 해당 사건을 복제함으로써 그 사건의 독특한 혹은 순간적 특성을 부정하려는 경향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공간적 혹은 인간적으로 사물들을 ‘좀 더 가깝게’ 가져오려는 요구는 거의 강박관념에 가깝다. 근접 사진을 찍음으로써 그 대상을 복제하려는 욕망이 전례 없이 증가하고 있다.” (수잔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에서 재인용)
한국전쟁에 등장한 미군 사진부대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야겠다. 이 책의 저자인 정근식·강성현은 사회학을 전공한 학자들이다. 사진이 소재가 아닌 주제로, 한권의 이론서가 나오는 일은 드물다. 국내 이론 전공 학자도 흔치않을뿐더러 사진이 다른 학계에서 연구되고 그 성과물이 책으로 묶여 나오는 것은 내 25년 사진 인생을 돌아봐도 그리 흔치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은 나와 사진이라는 시각 매체를 이해하는 방식은 다르다. 이들은 머리말에서 “사진은 역사와 사회에 관한 우리의 관념적인 지식을 시각적으로 보여 주는 문화적 텍스트다”고 규정한다. 물론 이 같은 규정은 사진의 전부라기보다는 선택적 일부이다. 하지만 예술적 성취보다는 기록적인 성취감을 우선하는 나 같은 다큐멘터리 사진가에게 꽤 공감을 일으킨다. 이들은 이미 65년이나 지나버린 과거 기억을 여전히 현재로 만들어 가는 힘의 원천을 사진에서 찾으며 그 중심에 전쟁 사진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들은 미국 메릴랜드에 있는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을 방문해 한국전 기간 중에 미군 병사들이 기록한 사진들을 조사 수집하고 검토했다.
이 책은 크게 5장으로 구성되었다. 1장 ‘사진과 전쟁 기억’은, 기념이라는 두 가지 접근 방식을 제시한다. 하나는 국가정체성 아래 대중들을 묶어내는 ‘문화정치’로 해석하는 홉스봄이나 앤더슨의 방식과 또 하나는 전쟁이 야기한 죽음과 고통의 ‘애도 표현’은 윈터의 해석이다. 이 상이한 효과가 발생하는데 대한 분명한 논의가 없음을 지적하면서도 일차적으로 지식을 교환하고 공유하는 매체에 주목한다. 바로 전쟁 사진이다. 사진이 글이나 노래, 회화보다 시각적으로 대상을 직접 보여줌으로써 ‘곧 진실이라고 믿도록 하는 힘이 강하다’는 ‘외제화’와 ‘흔적’ 방식의 매체로 인식한다. 그런데 문제는 사진이 항상 특정한 시각만을 보여줄 뿐 다른 어떤 현실은 보여 주지 않음으로써 기억을 변형시키는 효과가 있다. 이런 전쟁 사진은 대중에서 즉각적인 소비(대규모 신문이나 잡지)를 일으키고 기억의 집합적 사회화(군중 교양이나 집회)에 활용된다. 따라서 전쟁 사진은 공적 사진에 가깝다. 이런 전쟁 사진은 두 개의 시각을 만들어내는데, 하나는 내가 보고 싶은 시각과 내가 눈 감고픈 사각이다. 시각은 ‘우리의 시각’이 되고 사각은 ‘저들의 시각’이 된다. 전쟁은 2개 이상의 대립된 기억으로 나아간다.
2장은 ‘미 육군통신대 사진부대와 사진병의 활동’이다. 한국전쟁을 기록한 3가지 집단이 있다. 첫째는 신문사, 잡지사, 통신사의 민간인 사진기자들이다. 둘째는 군의 사진병과 군속 사진가들이다. 셋째 소형 카메라를 휴대한 개인으로서의 민간인과 군인들이다. 이 책이 주목한 것은 두 번째로 맥아더 직속의 71통신대 A중대 사진병들이다. 발발 초기인 7월과 8월 두 달 동안 40여명의 사진병들이 전선을 종회무진 돌아다니며 기록했다. 이들은 일본 동경에 있던 GHQ-FEC 통신국의 방대한 동영상과 스틸 사진 정보팀으로 10월 이후 미 8군 예하 167통신사진중대가 전술적인 사진 활동을 개시하면서 자신들은 전략적인 활동, 예를 들면 심리전에 활용되는 사진과 영상을 생산했다. 이들 작업 중 인상적인 것이 <모윤숙 공산주의를 피해 숨다>와 같은 연작 사진과 영화다.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모윤숙은 해방 후 유창한 영어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하에 비호를 받았지만 전쟁 직후 서울을 빠져나오지 못해 90일간 숨어 지냈다. 이 때의 경험을 71통신대 A중대는 인터뷰로 영상을 만들었고 이를 토대로 모윤숙 스스로가 출연한 영화도 만들어졌다.
3장 ‘전쟁 초기 미군 사진병의 시각과 시선’은 이제 한국전쟁의 속살을 파고 들어간다. 저자들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사람의 눈처럼, 카메라도 사각을 가지고 있고, 사각에 들어간 현실은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감춰진다. 이런 점에서 사진은 현실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다른 현실은 보여주지 않은 특성을 가진가도 말할 수 있다. 시각과 사각이 사진으로 재현되는 현실의 공간적 범위를 지칭한다면, 시선은 사진을 찍는 주체의 관심을 보다 명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특정 대상에 시선이 머물 때 우리는 이를 응시라고 한다. 사진은 이런 응시의 산물이다.” 물론 이런 응시가 모든 사진에 담겼다고 판단할 수 없지만 시각과 시선을 통해 완성된 사진에서 어떤 결과를 읽어낼지에 대해 흥미로운 예를 제시한다. 이들은 ‘우리 안’의 한국군과 미군을 오합지졸과 용맹함으로 대비시키고, 적(주로 북한군)을 잔악한 전범으로 만드는 동시에 미군 포로를 부당하게 학대받는 동포로 만들며, 한국의 민간인은 국민과 비국민으로 경계를 만들어낸다. 사실 시각은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광학적인 실체라면 시선은 인간의 의도된 조형성에 의해 받아들이게 만드는 의식이다. 미군 사진병의 시각과 시선에서 생산된 사진은 전쟁참여를 정당화하는 선진화된 미군의 미개한 조선반도에서 내보인 오리엔탈리즘의 산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2차 대전 이후 이념적인 공포를 갖게 된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 또한 적과 남한 사람 모두에게서 느꼈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이런 연장선에서 4장 ‘시각화된 구원, 사각화된 파괴·학살’은 사진이 반공과 휴머니즘을 통해 이 땅을 구원하고 전쟁의 폐허를 재건한다는 시각적인 신화를 구성한다고 본다. 또한 동시에 인류 전쟁 역사상 가장 지독했던 무차별 폭격과 민간인의 사상을 눈감고, 보도연맹원과 정치범, 부역자에 대해 대규모 학살을 한 흔적을 감춘다. 이 글의 서두에 나온 대전 산내 골령골의 학살이 바로 그런 예다. 5장 ‘한국전쟁 사진의 집성과 시각의 변화’는 이렇게 다양한 경로로 만들어진 사진의 아카이브가 어떻게 기억을 편집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전달되고 확대 재생산되었는가를 살핀다. 주로 사진집의 형태들이다. 또한 이 전쟁에 참전했던 다른 주체들, 북한, 중국, 민간 전쟁사진가의 시각을 살핀다. 저자들은 “집합 기억은 개인적 기억의 합이 아니고 역사적 증거들의 집합도 아니며, 상징적 이미지에 의해 매개되고 사회적으로 구성된 기억이다”라고 말한다. 그런 집합기억은 현존과 부재라는 사진 속에 담긴 구성 요소로 기초된다. 하지만 이런 기억이 그 사진들을 편집하는 자의 의도만으로 재생되는 것은 아니며 시민의식이 높아질수록 성찰적 시선으로 발전한다고 본다.
남겨진 과제
사실 이 책을 읽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단지 문장이 딱딱해서가 아니라, 약 300쪽 가량의 많지 않는 분량임에도 함께 수록된 사진들을 함께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진을 읽는 것에 꽤 인색하다. 사진은 그냥 보는 것으로 삼고 읽어야하는 정보로 취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진에 대한 언급을 캡션 처리하지 않고 본문에 녹인 관계로 글과 사진의 정보를 동시에 처리하기 힘든 편집도 문제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 책을 3번 정도 정독하게 만든 미덕도 있다. 바로 한국전쟁과 현대사에 대한 우리의 기존 시각을 바꾸거나 좀 더 심층적으로 만들어주는 특별한 책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존재하는 한국전쟁의 사진관련 책이 화보 중심적이라 웬만한 전문가를 뺀다면 그저 볼거리나 이념의 확신을 재생산하는 역할에 그친다는 점이다. 바로 사진의 표면 아래 새겨진 역사적 사실들을 좀 더 구체화하고 어떻게 기억마저 희미해진 오래된 사진의 맥락을 잡아나갈 것인가, 이 책이 인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사진의 오랜 논쟁 중 하나인 프레임 안과 프레임 밖의 사회 역사적인 관계를 시각과 사각이라는 개념으로 좀 더 명쾌하게 집어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연구가 이번 책으로 끝나지 않고 심화되려면 몇 가지가 더 필요해 보인다. 첫째로 사진사 연구다. 전쟁사진에 대한 연구라면 도대체 왜 인간은 전쟁을 사진으로 그렇게 집요하게 기록하려 했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해야 한다. 그것이 호기심적인 볼거리였는지, 사회-역사적인 정보였는지부터 설명해야 한다. 이에 대해 책도, 참고문헌도 설명하지 않는다. 책이 이야기하는 전쟁사진에 대한 설명이 무엇에 발을 딛고 있는지 모호하는 점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지난 150년 동안 인류는 전쟁을 사진으로 기록했으며, 그 기록에 참여한 주체도 다변화 한다. 이들의 출신 성분이나 교육적인 배경, 역사의식도 사진의 가치를 결정했다. 따라서 이 책은 19세기 중반 최초의 전쟁 사진 기록자들이 민간인에서 어떻게 군대 내의 병사로 대체되기 시작했는지, 그들은 어떤 사진적인 훈련을 통해 활동에 투입되었는지, 시대와 전쟁 양상이 바뀌면서 어떤 사진을 중점적으로 촬영했는지, 이들의 결과물이 무엇을 위해 복무했는지를 밝혀야만 한국전쟁 사진병의 제대로 된 위치가 드러나는 것이다.
둘째로 전쟁과 사진을 다루는데 카메라라는 매카니즘이 설명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회화와 달리 카메라와 사진은 과학-기술의 산물로, 전쟁의 무기와 비슷한 양상으로 발전하면서 그 생산물의 질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로저 팬톤의 시대는 사진 자체가 다루기 어려웠던 시기로 전쟁 사진의 가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기록보다는 예술에 가깝다. 하지만 20세기 초반부터 카메라와 렌즈의 성능, 필름과 화학약품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전쟁 사진의 형식과 내용에서 일대 도약을 한다. 실제 한국전쟁은 그런 사진기술의 시험장인양 다양한 카메라가 선보이면서 사진의 완성도와 이용에 있어서 질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즉 인물사진, 군 작전에 필요한 풍경 사진, 오브제 사진 등, 그 표현의 밀도가 필요할 때는 4x5인치의 대형 카메라가 쓰였지만 현장에서 재빠르게 움직이며 촬영을 해야 할 경우 35mm 소형 카메라라 대세였다. 대표적으로 군의 주요 인사를 찍은 마가렛 버크 화이트는 대형 카메라를 사용했지만, 전선에서 활동한 데이비드 더글라스 던컨은 35mm를 사용했다. 아마도 사진병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들이 사용한 기종, 필름, 현상방법, 크로핑과 정보통제, 최종 인화, 후 사용처 등을 좀 더 연구한다면 이 책의 연구를 더욱 풍성하게 해줄 것이다.
세 번째는 어쩌면 이 책을 읽은 후 가장 중요한 의문점이기도 한데, 사진병들이 찍은 이 사진들에 대한 평가이다. 일단 이 사진들은 그 기법이나 표현에서 조악하다. 그것은 얼마나 사진적인 훈련이 되어있었냐는 문제인데, 이들에게 그것을 요구하기에는 예나 지금이나 (복무하는 군인들의 자세는) 나태하고 관성적이며, 사진이라는 시각 매체를 다루기에 미학적인 자질이 낮다. 사진병들의 사진은 그래서 어디서나 그 수준을 인정받지 못한다. 전쟁을 보도하는 신문과 잡지도 원숙한 종군사진가들의 사진을 원했다. 그들이 정 그 자리에 없었을 때, 군이 아니면 도저히 찍을 수 없는 전투에서 담긴 사진만을 겨우 사용했다. 그런 예들만 제외한다면 이 책에서 도판으로 제시한 사진병들의 사진은 한반도에서 무수하게 찍어낸 민간 사진가들의 사진에 비해 나은 것이 없다. 따라서 이 책의 연구자들도 이것에 대한 상대적인 사진 평가를 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사진들을 연구해야하는지?
내 생각은 이렇다. 이들 사진의 장점은 바로 아카이브다. 당시 민간 사진가들의 사진은 세계 도처에 분산되어 있고, 정리되지 못했으며, 전체가 공개되지 않는다. 오직 이 사진병들의 사진만이 국가 자본이 투여됐기에 한자리에 모여 정리되고, 공공에 개방된 것이다. 시각적으로 하나도 나을 것 없고, 객관적이지도 않은 이 사진들이 단지 모여 있다는 점만으로도 연구자들은 감사한다. 그리고 사진은 그들의 새로운 해석을 기다리고 있다. 이 책 <한국전쟁 사진의 역사사회학>은 본편을 준비하는 그런 연구자들의 프리퀄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