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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엽 Aug 25. 2020

퓰리처상

포토저널리즘과 카메라 기술 발전


퓰리처상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이름이다. 저널리즘과 문학전반에 걸쳐 수여되는 권위있는 상으로 우리에게 아주 낯익은 수상자를 떠올릴 수 있다. 1918년 미국 신문 <스타>지의 기자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이탈리아전투에서 종군하며 다리에 중상을 입기도한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대표적이다. 그는 이 전투의 경험을 살려 <무기여 잘 있거라>를 썼다. 1936년 스페인 내란이 일어나자 그는 신문 특파원으로 참전했는데, 이때 경험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발표했다. 말년 헤밍웨이는 쿠바에 가서 낚시를 즐기곤 했는데 이 경험을 토대로 <노인과 바다>를 집필 1953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또 한사람 기억되는 것은 자신의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의 젊은 시절 나치 수용소 이야기를 담은 만화 <쥐>의 작가 아트 슈피겔만이다. 만화가이자 아트디렉터로 일하는 그가 오랜 기간 심혈을 기울인 이 작품이 퓰리처상을 수상하자 만화는 ‘그래픽 노블’이라 불릴 정도로 위상을 높이게 된다. 이렇게 문학과 만화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퓰리쳐상은 저널리즘 발전에 공헌한 이들을 주 대상으로 한다. 

헝가리 출신 저널리스트 조셉 퓰리처의 유언으로 컬럼비아대학에서 창설 주관하는 이 상은 저널리즘 14개 부문, 문학 6개 부문, 그리고 음악 1개 부문에서 그해 가장 탁월한 업적을 이룬 인물을 추천받아 수여한다. 하지만 이 상을 수상하기는 까다롭다. 문학과 음악 부문은 꼭 미국시민이어야 하며, 저널리즘 부문수상자는 꼭 미국인일 필요는 없으나 미국 신문사에서 활동해야 한다. 즉 영화에서 아카데미상처럼 미국을 위한 미국에 의한 미국의 상인 것이다. 따라서 이 상의 권위는 미국 안에서 존재하며 유럽이나 기타 국가에서 주목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퓰리처상 작가는 세계적인 권위를 갖고 그들의 작품도 전 세계적으로 유통된다. 미국의 힘이 뒷받침 되는 상인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는 사진전은 다름 아닌 <퓰리처 사진전>이었다. 


퓰리처의 사진상

퓰리처상에는 두 개의 사진 부문이 있다. 하나는 특종사진(BREAKING NEWS PHOTOGRAPHY)으로 신문사진에서 강력한 흡입력을 갖는 돌발적 상황의 사진이다. 이런 사진은 사진기자 뿐 아니라 일반인의 사진이라도 그 사건의 중요성과 사진적 우수성만 인정된다면 수상 대상이 된다. 두 번째는 특집사진(FEATURE PHOTOGRAPHY)으로 오랜 기간의 취재를 통해 설득력있게 제작된 복수의 사진 이야기를 말한다. 이 부분은 20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된 장르로 수상자는 대부분 숙련된 사진기자들에게 수여되고 있다. 

지난 100년간 수여된 수많은 수상작들 중에 내게 가장 인상적인 사진은 1971, 켄트 주립 대학 대학살이라는 제목이 붙은 존 폴 필로(John Paul Filo)의 작품이다. 오하이오 캔트주립대에서 사진 저널리즘을 전공하던 학생이었던 필로는 닉슨 정부의 캄보디아 침공으로 어수선한 캠퍼스에 있었다. 캠퍼스는 이미 5백 명의 주 방위군이 들어차 있었다. 필로는 카메라를 들고 시위가 열리는 학생 식당으로 향했다. 방위군은 시위대 에게 해산을 요구 했고 학생들은 돌을 던졌다. 최루탄을 쏘던 방위군이 학생들에 의해 언덕가지 후퇴 한 후 실탄이 발사되기 시작했다. 필로는 그들이 공포탄을 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총알은 학생들의 몸을 관통했다. 피범벅이 되어 누워있는 동료를 보고 한 여대생이 비명을 질렀다. 필로는 그 순간 셔터를 눌렀다. 13명의 학생이 부상당하고 4명이 죽었다. 8명의 방위 대원이 살인 혐의로 기소 됐지만 아무도 유죄를 받은 사람은 없다. 필로는 사망한 학생 중 하나인 제프에 대해 “그는 과격분자도 주동자도 아니었다. 심지어 정치적 활동에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드럼을 연주하고 머리를 길게 길렀으며 여자 앞에서 수줍음을 많이 탔고 사회 문제들을 걱정했다. 그는 미국의 캄보디아 침략에 분노하고 배신감을 느꼈다”고 이야기 한다. 미국의 포크 그룹 ‘크로스비 스틸스 내쉬 앤 영’은 이 기만적인 사건을 필로의 사진과 함께 <오하이오>라는 노래에 실어 반전으로 들끓던 청년들에게 날려 보냈다. 

퓰리처상이 경쟁할 세계적인 사진 상이 있다면 오직 암스테르담에서 매년 열리는 <월드프레스포토> 정도일 것이다. 이 상은 지난 100년 동안 사진의 본래 기능인 기록에 무척 충실했다. <월드프레스포토>가 시대를 반영하듯 저널리즘 사진의 예술화에 경도되고 있을 때도 퓰리처상은 저널리즘의 사실 기록과 전달에 주력하고 있다. 이 같은 성격을 반영하듯 퓰리처상은 카메라 메카니즘의 발전과 함께 한다. 예술 사진은 100년 전 그대로의 카메라로 찍어도 지금 내보이는데 전혀 문제가 없지만 기동성, 순발력, 전달 속도 등을 중요시하는 저널리즘에서는 카메라의 발전에 무척 민감한 것이 사실이다. 


퓰리처 사진의 미래

2009년 마이애미 헤럴드의 패트릭 페렐의 <절망에 빠진 사람들 : 아이티의 재앙>은 이러한 카메라의 기술적 발전이 녹아든 작품이다. 그전까지 사진기자들은 소형 카메라라는 이름이 무색한 플래그쉽의 묵직하고 거대한 최고급형 디지털 카메라 기종들을 사용했다. 카메라의 안전성, 신뢰성, 최고급 화질 확보라는 이유에서 였지만 매우 무겁과 불편하며 사람들 눈에 잘 띤다는 약점이 있다. 특히나 지진이 난 후로 무정부 상태에 다름 없었던 아이티라면 이런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것 자체가 위험에 빠지는 꼴이다. 페렐은 그런 카메라를 포기하고 작고 다양한 기능이 들어있으면서도 저렴한 캐논의 G10을 이용해 작업을 했다. 애초의 목적인 전시가 아닌 신문을 위한 것이었기에 화소수는 충분했고 거리를 뛰어다니는 위험한 청년들의 눈에 띠지 않았다. 혁신적으로 발전된 디지털 카메라의 장점은 현장에서 빠르게 전송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같은 혁신은 인터넷망을 통해 전 세계가 현장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포토저널리즘의 가능성을 일반인에게 까지 확대시켰다. 페렐과 같은 소형의 디지털 카메라는 이제 누구나 소지할 만큼 저렴하다. 퓰리처의 사진들이 미국과 미국인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본다면 지난 100년간 세상의 저널리즘 사진이 어떻게 발전하고 어떻게 유통되어 왔는가를 일목요연하게 읽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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