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913년 10월 22일 헝가리, 사망 1954년 5월 25일 베트남
오래전 로버트 카파Robert Capa의 사진전(Slightly Out of Focus/2007.3.29~5.26/예술의 전당 디자인 미술관)이 큰 규모로 한국에서 열렸다. 전에도 가끔 ‘매그넘’ 기획전을 통해 우리에게 선보이기는 했지만 로버트 카파 단독으로 열린 첫 전시회이자 사후 53년 만에 열린 전시회이기도 했다. 이제 로버트 카파는 그의 이름을 인터넷 검색창에 입력하면 수없이 많은 정보가 떠오르는 유명인이다. 그래서 그가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는 사진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다 안다.
노르망디
전에 보았던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미군들이 해변으로 상륙하기 위해 총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파도를 헤쳐 간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이다. 바로 스티븐 스필버그는 이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로버트 카파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사진들을 참조했다고 한다. 아마도 20세기 종군 사진 기자 중 가장 뛰어났던 로버트 카파에 대한 오마주는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미국 작가 존 스타인벡은 로버트 카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카파의 사진은 그 자체로 위대한 애정과 불가항력적인 연민이 있다. 아무도 그의 사진을 대신할 수 없으며 그 어떤 예술가도 그들 대신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사진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예술가와 정신이 포착해 놓은 추하고도 아름다운 우리 시대의 진실하고 생생한 기록인 것이다.”(‘아무도 그를 대신할 수 없다No one can take his piace’,『Robert Capa』(그로스만, 1971), 23쪽)
위대한 작가의 헌사가 아니더라도 로버트 카파는 우리 시대 뛰어난 사진가이자, 행동가이며 잘생긴 로맨티스트였다. 2차 대전 당시 로버트 카파를 만나기 위해 유럽 전선으로 날아갔던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의 이야기는 아주 유명한 일화이다.
로버트 카파의 본명은 앙드레 프리드만Andre Fridmann으로 1913년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양복점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가난한 유태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나이 17세 때 유태인 차별 정책과 공산주의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추방되어 1931년 그는 독일 베를린에서 암실 조수로 일하게 된다. 당시 18살이던 로버트 카파는 신문사의 의뢰로 코펜하겐에서 있었던 레온 트로츠키(러시아의 유명한 혁명가)의 연설 장면을 촬영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사진가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히틀러의 등장으로 인해 파리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자신의 사진을 팔기 위해 돈 많고 실력 있는 사진가 행세를 한다. 이름도 미국식으로 로버트 카파라고 바꾼다.
잘생긴 미국 청년 행세를 하던 로버트 카파는 자신의 연인이자 동지였던 포르투갈 여성 사진가 겔다를 만나게 된다. 겔다와 함께 로버트 카파는 1936년 스페인 내란을 취재하기 위해 인민전선파에 가담해 첫 번째 전쟁 사진을 제작하게 된다. 당시 이 전쟁에 참여한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말로는 『희망』을 썼고,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를 발표했다. 하지만 <라이프>에 발표되었던 그의 사진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은 그 어떤 전쟁 작품보다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물론 너무도 결정적인 장면이라 연출의 의혹은 아직도 끊이지 않고 있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때 로버트 카파는 미국으로 주거지를 옮기고 본격적으로 종군 취재를 한다. 유럽 전선 곳곳을 누비며 그가 촬영한 사진들은 연합군의 영웅적인 활약이 아닌 전쟁이 가져온 잔혹함과 비극적인 정서들이었다. 유럽인으로 또는 헝가리 출신의 유태인으로서 로버트 카파가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은 전쟁에 대한 고발과 인간의 진실이었던 것이다. 미국인 사진가 유진 스미스나 조 로젠탈, 데이비드 더들라스 던컨 등이 보여 주었던 이념과 연출, 가식적인 휴머니즘이 가득 찬 2차 대전 사진과는 사뭇 다른 것도 이 때문이다.
1945년 로버트 카파는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되었고, 1947년에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데이비드 세이무어 등과 함께 <매그넘>을 결성한다. 2차 대전 이후 잠시 한가한 틈에 존 스타인벡과 함께 소비에트를 취재했고, 1949년부터 1951년까지 프랑스 체류 시절 교류를 나누었던 피카소의 가정 생활을 에세이로 제작하기도 했다. 그에게 이 시기는 사진가로서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 가장 행복한 시기였을 것이다. 한국 전쟁도 그를 불러들이지 못했다.
용평
아침 일찍 서둘러야 했다. 로버트 카파의 재림이라 할 위대한 전쟁 사진가이자 살아 있는 전설을 만나기 위해서 말이다. 큰 배낭을 메고 평생 가 본 일 없는 용평 스키장으로 향했다. 배낭에는 그가 전에 내놓은 거대한 크기의 사진집 『인페르노Inferno』가 담겨 있다. 그는 바로 ‘제임스 낙웨이James Nachtwey’이다. 이제 그와 같이 분쟁 지역을 떠돌며 사진을 찍지 않지만 평생 가져온 그의 ‘전쟁 반대와 인권’이라는 철학은 나뿐 아니라 젊은 사진가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다. ‘한국사진학회’의 주최로 열린 제임스 낙웨이의 세미나는 설레임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워 포토그래퍼>에서 본 그대로의 차분함과 선명한 주제 의식은 강연 내내 좌중을 압도했다. 그는 이야기한다.
“사진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나 무시는 쉽다. 그럼에도 사진은 크고 작은 변화를 일으킨다. 전쟁은 파괴와 고통을 수반한다. 있는 그대로, 전쟁의 진실한 속성을 보여 주는 사진은 그대로 반전 사진이 될 수 있다.”
‘카파이즘Capaism’이라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로버트 카파의 이름에서 따온 ‘기자 정신’을 이야기하는 저널리즘 용어이다. 그 기자 정신은 무엇일까? 단지 강심장으로 전장에 뛰어들어 총탄이 난무하는 사진을 찍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카파이즘은 전쟁터에서 꽃피웠지만 전쟁을 반대하는 데 핵심이 있다. 전쟁을 반대하고 전쟁으로 파괴되는 문명과 인간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취재하는 것이 카파이즘이다. 제임스 낙웨이는 또 이야기한다.
“엄청난 고난의 시기에 집과 거리에서 이들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그들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존경심을 갖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목격자이다. 그리고 나의 사진이 간결하고 우렁차길 원한다. 사진의 형식적인 미학은 목적이 아니라, 사회적인 인식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는 로버트 카파처럼 미남도 아니고 바람둥이도 아니다. 이 고루한 샌님같이 생긴 미국인에게서 자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바탕에 깔고 휴머니즘을 떠드는 위선적인 여타의 사진과 다른 진면목을 발견한다. 그 자신이 바로 오늘날 카파이즘의 구현체라 말하는 듯하다. 여전히 카파의 의지는 살아 있는 것이다.
인도차이나
1954년까지 여유롭게 생활하던 로버트 카파를 <라이프>는 베트남으로 파견하게 된다. 이때 로버트 카파는 베트남 행을 말리는 친구에게 “삶과 죽음이 반반씩이라면 나는 다시 낙하산에서 뛰어내려 사진을 찍겠네”라고 말하고 사이공행 비행기에 오른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이었다. 로버트 카파는 인도차이나 전쟁을 촬영하던 중 지뢰를 밟아 폭사하고 말았다. 1954년 5월 25일. 그의 나이 마흔 한 살의 일이다.
직업 사진가로 막 시작할 무렵 선배 사진가들에게 귀 따갑게 듣던 소리가 있다. 로버트 카파가 이야기한 것이다. “너의 사진이 충분히 좋아 보이지 않는다면, 너는 충분히 접근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초점 거리 30센티미터 광각 렌즈를 끼우고 피사체의 코앞으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로버트 카파의 카메라 렌즈 초점 거리는 1미터가 넘었다. 이제는 안다. 로버트 카파가 이야기한 것이 렌즈의 초점 거리가 아닌 삶의 거리였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