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오직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그 반대는 관찰 된 적이 없다. 우리는 이것을 ‘시간의 화살’이라 부른다. 활 시위를 떠난 화살이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 시간의 비가역성은 나를 세상의 본질이 물질이 아닌 시간에 있지 않을까하는 의심에 빠지게 한다. 몇 해 전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도 앞 바다에 섰다. 바다가 멀다. 썰물 때처럼 먼 바다는 갯벌을 사이에 두고 멀찍이 물러서 있다. 물이 빠져나간 갯벌은 예전의 그 갯벌이 아니다. 사막이다. 염생식물은 낙타풀 마냥 제멋대로 이곳저곳에서 자라고 소금 섞인 모래먼지가 가끔 돌풍을 일으킨다. 전부터 고비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을 돌아다녀 본 경험으로 보건데 이곳은 사막이 맞다. 사막은 맞는데 인간과 자본의 욕망이 구축한 사막이다. 걷다보니 무수한 맛조개와 백합의 시체가 하얀 띠를 만든 갯벌에서 화석처럼 변해가는 물고기를 봤다. 바싹 마른 채 살은 부패해 사라지고 뼈와 비늘이 진흙에 박혀 차츰 사라지고 있다. 물고기라는 생명의 완성체가 눈에도 보이지 않는 원자의 수준으로 분해되어 흩어진다.
77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일리야 프리고진은 그의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제 우리는 사회들이 인간 역사의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진화되어 온 여러 가지의 문화들에 의하여 예시되는 잠재적으로 엄청난 수의 분기현상들을 포함하는 엄청나게 복잡한 계들임을 알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계들이 요동에 대해 극도로 예민함을 알고 있다. 그것은 희망과 위협 모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은 심지어 작은 요동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성장하여 전반적인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써 개별적인 활동은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게 된다. 반면에 우리의 우주에서 안정하고 영원한 규칙에 관한 안정성이 영원히 사라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것은 또한 위협이기도 하다.”
그의 우려처럼 우리 세계는 질서에서 혼돈으로 진행한다. 백년 전 오스트리아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루드비히 볼츠만은 열역학 제2법칙과 엔트로피를 발견했다. S=klog W 이것으로 시간의 비가역성과 무질서가 표현된다. 신의 질서에 도전한다는 동료들의 비난과 차가운 냉대 속에 스스로 목을 매야했던 볼츠만은 새로운 질서를 예고한 변경인이었다. 그리해 변경의 죽음은 슬프다. 물고기의 죽음도 볼츠만의 죽음도. 권력과 자본의 구심력에 저항하다 흩어지고 사라지는 뭍 생명들 다 슬프다. 하지만 그 슬픔의 혼돈 속에서 가끔 새로운 질서가 탄생하며 우리 세계를 바꿔 놓는다. 중심은 변경으로 확대되고 변경은 새로운 질서를 잉태하는 기지가 된다. 중심은 탐욕의 자본이고 오래된 권력이다. 이것들은 끊임없이 질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중심은 예측 가능하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확실성을 원한다. 하지만 시간의 화살은 모든 것을 질서에서 혼돈으로 바꾼다. 하나의 세계가 다원적인 세계로 진화한다. 변경은 단지 무질서의 세상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는 자궁이 된다.
비가역적인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것과 영원한 시간 속에 있다는 것 사이의 구분은 인간의 상징적 활동의 어떤 근원이 있다는 인상을 준다. 사진은 자체로 시간의 전후를 표현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사진을 통해 시간의 비대칭성을 피사체의 시간 비대칭성으로 번역하는 흔적을 남긴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변경의 풍경 속 혼돈스런 텍스트로부터 확률적이고 동시에 시간의 방향성을 지닌 선명한 텍스트로 만들어 낸다. 변경에서 중심으로, 혼돈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고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변경이 자본과 낡은 권력을 허무는 진지(陣地)다. 변경이 내 사진 가능성의 중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