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와 시장 논리 속, 사진가의 삶
1. 다큐멘터리 사진에 대해
다큐멘터리 사진이라는 것을 찍으며 살아가는 저 같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필자는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한 24년 전업으로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꽤 오래 한 것 같은데 아직도 처음 사진 찍던 때가 어제 같습니다. 대학에서는 정치학을 전공했습니다. 졸업하던 해에 시사 월간지에 기자로 입사하면서 카메라를 들게 됐습니다. 그전에는 볼펜 기자였습니다. 당시로는 1타 쌍피하는, 사진되고 글되는 기자라 꽤 환영을 받았습니다. 95년부터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제법 원고료도 됐습니다. 당시에는 글 사진, 둘 모두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20년간 홀로 글 쓰고 홀로 사진 찍고 물리학 공부도 하면서, 책을 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사진은 독립된 매체가 아닙니다. 늘 글과 함께하죠. 이 둘 모두 제게는 언어입니다. 말하는 것 외에 가장 잘하는 언어들이죠. 글은 르포르타쥬입니다. 보고문학이라고도 합니다. 사실에 기초하고 문제의 핵심과 배후를 밝히려 합니다. 사진은 다큐멘터리입니다. 초기에는 어싸인먼트를 받는 기자의 포토저널리즘이라 규정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포토저널리즘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이야기 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저 역시 “다큐멘터리사진이란 무엇일까?”를 당연히 고민했겠죠. 있는 그대로 연출 하지 않고 찍으면 다큐멘터리인가? 아닐 겁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다큐멘터리는 1922년 제작 상영한 로버트 플래허티(Robert Flaherty)의 〈북극의 나누크〉(Nanook of the North)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영화에 대해 영국의 평론가 존 그리어슨이 다큐멘터리라는 말을 처음 쓰죠. 이를 수용한 것은 미국의 사진계였습니다. 대표적으로 뉴욕 현대미술관인 모마의 사진부장 보먼트 뉴홀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럽에서는 르포르타쥬가 더 흔한 용어였습니다. 다큐멘터리는 문서·증서를 뜻하는 라틴어 'documentum'에서 유래했습니다. 다큐멘터리 즉 기록 예술은 주관이나 허구를 배격하고 실제 사건이나 상황을 그대로 전하는 방법입니다. 현상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나타난 그 자체의 본질을 포착하는 것입니다. 특히 다큐멘터리 소설, 영화, 사진은 사건과 현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조사하여 실상을 객관적으로 기술한 것입니다. 신문 기사나 재판 기록, 공문서 등과 같이 기록된 자료나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예술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진의 역사를 돌아봐도 다큐멘터리 사진은 이거야! 하는 특정한 유형을 발견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나도 다큐멘터리 사진가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진관 사진도 전쟁사진도 하다못해 거리의 찌라시 사진도 세월이 지나면 다큐멘터리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참에 박상우교수의 견해를 빌려올까 합니다.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유형을 세 가지로 나눕니다. 첫 번째는 역사적 기록, 두 번째는 사회변혁, 세 번째는 예술적 관심입니다. 대표적인 사진가로는 첫 번째 으젠느 앗제, 두 번째 루이스 하인, 세 번째 워커 에반스입니다. 쉽게 이해되시죠? 프랑스 제2 제정기 즉 나폴레옹3세 때 파리는 대규모의 재개발을 하면서 무수한 건축물이 헐려나갔습니다. 이 때 앗제는 엄밀하게 도시 건축을 기록하죠. 앗제는 평생 자신이 예술가라 불리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루이스 하인은 늦깎이 학생으로 콜럼비아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선생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회를 변혁할 수단으로 사진을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아동노동에 대한 연작 사진입니다. 하인은 선생인 스티글리츠처럼 고상 떠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워커 에반스는 소설가를 꿈꾸던 프랑스 유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설가 제임스 에지와 함께 대공황의 소작농을 찍습니다. 하지만 예술성 없는 다큐멘터리를 싫어했습니다. 고전적으로 이 세 가지 유형은 당시에 분리 독립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서서히 이 세 가지 유형의 레이어는 겹쳐지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흘러, 대표적으로 59년 <디 아메리칸스>를 발표한 로버트 프랭크가 그 예 입니다. 그의 사진은 당대 미국에 대한 기록성과 사회모순을 치밀한 시각으로 폭로합니다. 게다가 워커 에반스의 예술성까지 포괄하죠. 이후 나타난 차세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은 이 세 가지 유형 중에 두 개 이상을 포섭합니다. 물론 이 집합에는 기록이 무조건 들어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흔히 등장하는 쟁점이 하나 있습니다. 포토저널리즘은 다큐멘터리인가? 저 역시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사진기자로 활동했습니다. 그래서 물론 이 둘은 유사해 보입니다. 그 사진의 형태나 제기하는 질문들을 보면 둘은 교집합이거나 합집합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20세기 초 독일의 신문이 사진을 처음 사용하면서 포토저널리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러한 신문, 통신사, 에이전시를 통해 활동한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로버트 카파, 유진 스미스 등을 다큐멘터리 사진가라고 부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사진들의 생산 구조나 유통 방식을 보면 확연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먼저 어싸인먼트(의뢰)의 유무입니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사진가 스스로 기획하고 제작합니다. 포토저널리즘은 신문사 등의 클라이언트(사주)가 돈을 매게로 어사인먼트를 줍니다. 기획도 줍니다. 비로써 사진가는 제작을 시작합니다. 유통도 상이합니다. 다큐멘터리는 책이나 전시장을 통해 발표되지만, 포토저널리즘은 의뢰받은 대중매체에 게재됩니다. 포토저널리즘의 극히 일부만이 책이나 전시장으로 갑니다. 요즘같은 디지털 시대의 포토저널리즘은 더욱 상업사진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대다수 클라인언트의 요청으로 제작됩니다. 사진의 선택이나 캡션의 제작까지 클라이언트가 합니다. 정작 찍은 사진가는 배제됩 니다. 이것은 최근의 포토저널리즘이 다큐멘터리 정신과는 별 관계가 없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따라서 다큐멘터리 사진이든 포토저널리즘이든 역사적 산물이라면 포토저널리즘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큐멘터리에서 상업사진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다만, 이중 일부의 종사자들이 다큐멘터리 정신에 부합하는 행동을 이어가고 있다고 봅니다.
2. 작가에 대해
다큐멘터리 사진에 대한 제 견해를 이야기 해봤습니다. 그럼 이제 그것을 찍는 사진가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우린 흔히 이들은 사진작가라고 합니다. 요즘은 자주 쓰는 단어라 별 의심없이 사용하지만 사실 10년 전 만 해도 이런 명칭은 매우 불쾌했습니다. 그건 사협 빵떡모자를 쓴 아마추어사진가 아저씨들를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끼리는 사진가라는 명칭을 고수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너나할 것 없이 사진작가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진작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봅시다. 여러 예술장르에서 작가라는 이 단어를 장르와 연칭으로 쓰는지요? 소설 작가, 시 작가, 회화 작가, 조각 작가.... 어디도 없군요. 작가는 그냥 작가입니다. 비평가 이영준의 이야기처럼 작가는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특정한 매체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사진가가 자신의 집을 짓는다면 그냥 작가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진판은 사진작가들의 놀음입니다. 전업을 30년 해도 사진작가, 개인전 한번 한 신인도 사진작가, 인터넷 아마추어도 사진작가. 모두 작가군요. 이영준교수는 십수년 동안 수천의 학생을 교육했지만 배출한 작가는 한손에 꼽는다고 했습니다. 사진가로 진출한 후학이 많을 텐데 작가에 대해서는 왜 이렇게 짜게 이야기 할까요? 그럼 제가 생각하는 작가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작가는 스스로 칭하는 것일까요? 타인으로부터 부여 받는 것일까요? 저는 스스로 칭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앞으로 이야기할 작가 정신입니다. 처음부터 작가정신이 없으면 작가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 작가정신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창의성, 사상성, 윤리성입니다.
첫 번째로 작가의 몸인 창의성은 청년이 작가로 나가는 첫 번째 관문입니다. 작가가 집을 짓는 사람이라면 창의적으로 집을 지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 없던 것, 지금은 희미한 것, 미래에 있을 것에 대한 끝없는 질문입니다. 이 같은 능력은 선천적으로 쥐어줄 수도 있고 교육과 경험 노력으로 역사를 훑어 산출해 낼 수도 있습니다. 재능 없다고 실망할 일이 아니죠. 예를 들면 피카소가 아닐까요? 20대 전에 이미 인상파의 화풍을 그대로 재현했고, 획기적인 큐비즘을 창시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도 세잔의 목욕하는 여인들을 재탕하며 아비뇽의 처녀들 같은 형식만으로 승부했다면 오늘의 피카소가 됐을까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창의성에서 한발 더 나아갔습니다. 그는 시대의 고통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고향인 스페인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에서 나치 공군의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무고한 민중들이 죽어갈 때 그는 새롭게 붓을 들었습니다.
두 번째로 작가의 머리인 사상성입니다. 달리 말하면 작가가 보는 세계관입니다. 게르니카는 우리의 마음을 흔듭니다. 저것이 바로 독재의 민낯이다. 학살이다. 파괴다. 이 그림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속 심연의 양심을 건드립니다. 예술은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리해 현대 예술은 전환기를 이룹니다. 더 이상 예술은 아름다운 붓 끝에서, 아름다운 구도에서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을요.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당대의 문제를 회피해서는 안됩니다. 대중을 쫓고, 돈을 쫓는 작가는 미완성의 기능공일 뿐입니다. 사회의 가장 전위에 서서 자신의 예술을 완성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작가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 신경숙 사태에서 보시 듯 정직하지 않은 작가가 있습니다. 표절같은 것을 태연하게 하는 것이죠. 이는 창조와 사상만으로도 작가는 미성숙한 단계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작가의 가슴, 윤리입니다. 작가가 지은 집을 이제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타인에 대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가끔 자신이 찍은 훌륭한 사진 앞에서 피사체를 배신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반전과 반핵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을 수행하는 권력집단과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봅니다. 가난과 소외를 이야기하지만 자신은 풍족함을 넘어 사치하는 것을 봅니다. 가슴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타인은 단지 자신의 작품을 완성하는 타자일 뿐입니다. 이런 표리부동함은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목격됩니다. 다들 핑계를 대지만 반성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작가라 호칭합니다. 저는 작가가 되려다가 괴물이 되고만 이무기라고 봅니다. 그들은 결코 작가라는 여의주를 물고 승천할 수 없습니다.
3. 제도와 시장에 대해
이제 마지막으로 사진가, 작가들이 어떻게 이 사회 제도와 시장에서 생존하는가에 대해 이야기 해야겠습니다. 제도와 시장이라고 하니, 알튀세르가 생각납니다. 제가 정치학 전공이라 구조주의 맑스 이론으로 논문을 썼습니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국가체제를 뜻하죠. 제도와 시장은 바로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를 이야기합니다. 미학자 박평종씨의 이야기도 생각납니다. 그가 자주 쓰는 말 중에 위계가 있습니다. 물리학에서 위계는 중력이 왜 이렇게 약한가를 뜻하지만 예술에서는 작가와 딜레당뜨의 차이쯤으로 사용됩니다. 말 뜻대로 위아래죠. 그런데 여기에는 내적 위계와 외적 위계가 존재하는데 쉽게 말해 전자는 평단의 위계이고 후자는 대중의 위계입니다. 어떤 이는 장르 내부에서 유명할 수도 있고 어떤 이는 대중적으로 유명할 수 있습니다. 보들레르와 플로베르의 차이쯤 될까요? 이것도 바로 제도와 시장을 뜻합니다.
우리에게 제도는 공공의 영역입니다. 어떤 것이 있을까요? 미술관이 있군요. 문턱이 높습니다. 게다가 작가피도 얼마 안 됩니다. 명예는 주는 듯 하지만 미술관을 바라보고 작업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사진상이 있습니다. 요즘 청년 사진가 중에는 사진상의 심사위원들의 성향을 보고 창작을 한다는 소문도 들리더군요. 하긴 요즘 사진상 하나 받으면 바로 주목받고 미술관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사진상 중에 권위와 공정성을 갖은 상은 얼마나 될까요? 최근에 있었던 최민식 사진상 논란을 봐도 웬만한 사진가들에게는 요원한 이야기입니다. 저도 역시 2010년 이후 매년 한두차례씩 미술관 기획전 등에 초청을 받아 전시를 했습니다. 이를 통해 저의 작가적 명성이 높아졌을까요? 모르겠습니다. 올해는 한국에서 가장 상금이 많다는 사진상을 받았습니다. 저의 살림살이가 좀 나아졌을까요? 아직 돈 구경도 못했고, 생활비로는 한푼도 쓸 수 없다는 군요. 뭔가 한국의 사진 제도는 잘못되어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인지는 모르겠지만 개혁으로도 나아질 가능성도 없어 보입니다. 예술이 좋아하는 혁명은 간데없고 관료주의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 요즘의 예술 제도입니다. 제 시대에 그것이 변할 것인가는 회의적입니다. 아마도 저와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청년들의 몫이 아닐까하는 비겁한 생각을 해봅니다.
시장은 어떠할까요? 저는 미술하는 사람들이나 요즘 청년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정도로 벌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90년 인쇄매체의 전성기 때 말이죠. 원고료가 무척 높았습니다. 그것을 매달 8꼭지 씩 쓰고, 책도 펴냈습니다. 인세도 들어왔습니다. 그 돈으로 세상 오지 안가 본 곳이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은 강화도로 공공근로를 갑니다. 예술인 복지재단에서 주는 국민들 세금이죠. 이제 인쇄매체를 통해 글을 쓰는 것은 아주 가끔이고, 단행본 시장을 죽을 대로 죽어 인세는 그야말로 푼돈입니다. 그렇다면 사진이 팔려야 할텐데, 다큐멘터리 사진을 구입하려는 곳은 있을까요? 그래도 매년 한두장씩 고가로 팔았습니다. 그것이 모두 파업 현장이나 투쟁 현장의 기금 마련을 위한 경매였습니다. 물론 돈 구경은 해보지도 못했습니다. 개인전을 할 때는 그저 한두점을 지인이 사줘 액자값에 보텝니다. 시대의 기록인 다큐멘터리 사진은 공공기관이 사줘야하는데, 국립현대의 미술은행은 이런 사진을 피합니다. 대여가 안된다나요. 아님 정권 탓인가요? 결국 시장에 노출된 사진가는 월급 받는 사진기자 말고는 창작을 이어갈 수가 없습니다. 너무 비관적이었네요.
저는 진보적인 정당에서 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을 경험했고 예술인소셜유니온의 창립을 함께 했습니다. 모두 한국에서 예술한다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지속 가능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일념이었죠. 근데, 정작 제가 지속 불가능한 삶을 살고 있더군요. 절망해야 할까요? 아닐 겁니다. 그 고난 속에서 한줄기 빛과 같은 구원은 더 이상 천재적인 재능이나 기적같은 후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의 제도와 시장을 바꾸겠다는 의지입니다.
이상엽 / 사진가 2015년 7월 22일 * 2015 동강사진워크샵 한국 사진의 현재와 미래 워크샵발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