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와 자영업자 사이 어딘가

by 오온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서 스타 드라마 작가 정혜정의 보조작가로 일하는 진주는 정해진 출퇴근 시간 없이

아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정해진 퇴근 시간 없이 일하는 근로 사각지대에 놓인 인물이다. 다큐 감독인 친구는 진주에게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라며 종용하고, 쫄지 않는 성정의 진주는 대 정혜정 작가님에게 감히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한다. 하지만 말발 센 정혜정 작가는 진주의 정체성에 대해 노동자가 아닌 자영업자라고 규정한다. 그에 대해 진주가 노력한 만큼 버는 자영업자처럼 자기도 벌고 있냐며 반문하자 정혜정 작가는 꿈에 가까워지는 게 버는 거라며 일침을 날리고 진주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방송작가로 20년 가까이 일했지만 돈을 모아 목돈을 만져본 적이 없는 나는 그 문제를 늘 내 탓으로 돌리곤 했다. 내 씀씀이에 문제가 있는 거겠지, 일을 꾸준히 하지 못해서 그런 거겠지, 재테크에 문외한이라 그런 거겠지... 하지만 최저시급 수준의 박봉이라도 매 달 같은 날에 따박따박 급여가 들어오는 일을 하는 지금, 내 소비 패턴이 크게 달라진 건 없는데 잔액은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정기 적금도 무리 없이 진행되고 주식도 조금씩 살만큼 여유라는 게 생겼다.


나는 제대로 된 시스템 안에서는 제법 성실하고 그럭저럭 돈도 모을 줄 아는 평범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걸 불혹이 넘어서야 깨달았다. 방송 작가로 일하면서 복지 사각지대,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에 대해 다큐를 제작한 적이 있다. 그때 자료를 수집하고 글을 쓰며 적잖이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정부를 향해 절규하는 그들이 처한 상황보다 교양 프로그램 방송 작가인 우리들의 처지가 더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걸 새삼 눈으로, 귀로 다시 한 번 확인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노동자의 삶을 살면서도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스스로를 자영업자라고 여겼기에 고립 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방송구성작가들.


작가를 자동차 부품 바꾸듯 쉽게 바꾸는 제작 환경, 프로그램만 시작했다 하면 골수까지 갈아넣을 기세로 덤벼야 인정받는 분위기, 그렇기에 한 프로그램을 1년 이상 하기 버거운 상황 등등... 스스로를 자영업자로 여기는, 또한 그렇게 가스라이팅 당한 힘 없고 순진한 작가들은 그 상황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노동자의 권리도 자영업자의 성과도 누리지 못한 채 상위 몇 프로의 이름 난 작가들을 보며, 저렇게 되지 못한 건 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 자책하고 때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프로그램만 하는 나를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아이의 학교 입학과 이듬해 벌어진 코로나 사태 등으로 몇 년의 공백기를 보내고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나는 또 한 번 놀라게 됐다. 그 사이 방송 작가들의 노동성을 인정받는 판결들도 있었고, 고용 보험이 확대됐으며 실제로 현장에서도 처우가 많이 나아진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래봤자 다른 노동자들에 비하면 여전히 열악한 상황이지만 그래도 요원할 것만 같던 일들이 이만큼이라도 이뤄졌구나...란 생각에 기쁜 동시에 내 지난 날들이 더 아프게도 느껴졌다. 6시 칼퇴하는 후배들을 보며 놀라고, 회사가 책정한 원고료보다 더 많은 원고료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젊은 패기에 또 놀랐다. 심지어 프로그램이 도중 엎어졌을 때 그에 따른 작가 손해를

회사가 책임지라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이 당연한 것들을 그저 꿈처럼 바라기만 했던 과거의 나와 그런 후배 작가들의 당당함이 당돌함으로 느껴지는 현재의 내가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수없이 많은 작가들의 피땀눈물로 지금과 같이 진일보한 상황이 만들어졌고 그 피땀눈물에 나의 지분도 미약하나마 있을 거라는 것이다. 덕분에 공백기를 지나 다시 일터로 나왔을 때 훨씬 나아진 환경에서 작업할 수 있게 됐고 그래서 몇 달 간 즐겁게 일을 하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편 당 페이를 받으며 일을 하면 돈이 모이지가 않았다. 한 순간 잔액이 늘어났다가 신기루처럼 사라지곤 하는 통장을 보며 또 내 탓을 하다가 갑작스레 월급쟁이가 됐고, 지금은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돈을 벌고 있지만 차곡차곡 잔액을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프로그램을 맡아 할 때처럼 쉬이 지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글이 방송 작가로 일 한 지난 날을 후회하는 글은 아니다. 화전민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불안한 생계를 이어간 건 물론이오, 좋은 대우를 받으면 감사해하고 부당한 처우에는 침묵하는 삶이긴 했지만 그래도 내 신성한 밥벌이었고 나는 그 일을 짜증나도록 사랑했다. 비록 이제 나는 무대에서 내려오기로 마음 먹었지만 무대에 남아있는 선배, 동료, 후배들은 뽑기처럼 좋은 제작진을 만나야 사람답게 일할 수 있는 케바케가 아닌 제도에 의한 공공선으로 더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잠시나마 당돌함으로 봤던 후배들의 당당함 또한 더욱 공고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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