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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망고 Feb 18. 2021

두 유 해브 어 룸?

- 호텔 로비에서의 하룻밤

때는 바야흐로 이십여 년 전 어느 여름날이었다.


아테네의 피레우스 항구에서 배를 타고 꿈에 그리던 에게해의 미코노스 섬으로 가는 길이었다.

포르투갈에서 시작된 유럽 횡단 여행의 피날레는 미코노스 섬에서 며칠을 보내고, 산토리니 섬에 잠깐 들렀다가 다시 배를 타고 아테네로 나와서 귀국하는 일정이었다.


에게해의 섬이라니!


함께 여행 중인 동생과 배에 오른 나는 한껏 들떠 있었다.


초대형 페리의 선상에는 커다란 수영장이 있었고, 휴가를 즐기기 위해 어디선가 떠나온 사람들은 하나둘씩 수영장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젊은 남자들은 삼층 난간에서 환호를 하며 다이빙을 하기도 했다. 자칫 힘 조절을 잘못하면 갑판 위로 떨어져 바다로 미끄러지거나 도움닫기를 잘하면 바로 바다로 뛰어들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는 수영장 한편에서 일광욕을 하며 따사로운 지중해의 햇볕을 즐겼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자 어디선가 올리브나무 잎이 파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린 올리브나무 향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정수리 위로, 어깨 위로, 배 위로, 허벅지 위로 떨어지는 지중해의 햇살은, 금세라도 내 몸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발. 아. 시. 킬 듯 한없이 따사로웠다.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바다 위의 붉은 태양은 어디서도 느끼지 못한 자유, 그 자체였다. 이런 햇볕과 바람을, 바다와 태양을 언제 또다시 즐기겠냐며 우리는 팔뚝이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갑판 위에서 문어처럼 축 늘어져 일광욕을 했다.

  

태양에 벌겋게 익은 살이 따끔따끔해질 즈음, 배는 미코노스 항구에 닿았다. 우리는 짐을 챙겨 내렸고, 다른 섬으로 가는 사람들은 그대로 배에 남아 뭍에 내린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은 삼삼오오 어딘가로 바삐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선 호텔을 잡기로 했다.

어느 곳에서 며칠을 묵을지 계획이 없이 여행을 시작했기 때문에 도착하면 숙소부터 찾는 게 일이었다.


"두유 해브 어 룸?"


동생과 번갈아 가며 몇 군데 호텔에 들어가서 방이 있냐고 물어보았지만 모두 고개를 흔들었다.  


아름다운 섬, 미코노스에 서서히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노을을 감상할 여유도 없이, 유목민처럼 가방을 끌고 섬을 한 바퀴 돌며 호텔이란 호텔은 다 두드려 보았지만 어디에도 빈 방은 없었다. 방이 없다니? 벌써 두어 달째 유럽을 여행 중이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아주 싸구려 방이든, 아니면 아주 비싼 방이든 어디에나 늘 빈 방은 있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여름휴가철이어도 그렇지 어떻게 섬 전체에 빈 방이 하나도 없다니!


우리는 굶주린 배부터 채우기로 했다.


바닷가 근처 식당에 자리 잡고 그리스식 샐러드(Greek Salsd)와 칼라마리(Calamari) 그리고 무사카(Moussaka)와 수블라키(Souvlaki)를 하나씩 시켰다. 점심부터 굶었기 때문에 배가 너무 고팠고, 또 본의 아니게 호텔비가 굳었으니 먹고 싶은 거라도 양껏 먹자고 했다. 저녁을 먹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식당에는 우리뿐이었다. 여행 가방을 의자 옆에 세워두고 오늘 밤을 어떻게 보낼지 동생과 의논해 보았지만, 이 평화롭고 낯선 그리스의 섬에서 뾰족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주문을 받은, 식당 주인 인듯한 남자가 테이블 세팅을 하며 인사를 했다.


청바지에 하얀 티를 입고 있던 남자는 삼십 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제이스(Jace)라고 자기를 소개한 남자는 우리의 가방을 보며, 며칠이나 이 섬에 묵었냐, 오늘 섬을 떠나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오늘 낮에 도착했다고 대답했다. 제이스는 웃음기 띤 얼굴로 그럼 어느 호텔에 묵냐고 다시 물었다.  우리는 아직 방을 구하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제이스는 미리 호텔을 예약하지 않았다면 방을 구하기는 힘들 거라고 했다. 여름 한철 벌어서 한 해를 먹고사는 이 섬의 최대의 성수기가 지금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섬이라서 노숙을 할 수 있는 기차역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 집이나 두드리고 들어가서 하룻밤을 재워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중해의 태양이 수평선과 간격을 좁혀갈수록 마음이 초조해진 우리는 음식을 들고 나오는 제이스에게  혹시 이 근처 어디에 노. 숙. 을 할 수 있는 곳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교회도 괜찮고, 24시간 문을 여는 마트나 식당이 있는지 물었으나 제이스는 입을 쭉 내밀고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우리는 일단 먹고 보자며 아름다운 에게 해의 노을을 보며 식사를 했다.


주방에서 수블라키를 들고 나오며 제이스가 이런 말을 해도 괜찮은지 모르겠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기가 이 식당 이층에서 사는 데, 전망이 정말 근사하고 자기 혼자 밖에 없으니 우리만 괜찮다면 자기 집에서 자도 된다고 제이스는 말했다. 제이스는 안자도 그만이라는 표정으로, 어차피 우리는 내일이 되어도 방을 구할 수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우리는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입을 벌리고, 정말 그래도 괜찮냐며 숙박비는 얼마든 내겠다고, 당신은 우리의 은인이라며 환호를 질렀다. 우리가 그의 제안을 승낙하자 제이스의 표정도 금방 피어난 나팔꽃처럼 화사해졌다.


우리의 호스트가 된 제이스는 식사를 마치면 같이 이층으로 올라가서 우리가 잘 곳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동생과 나는 어쩌면 우리에게 이런 행운이 있냐며, 한국으로 돌아가면 복권이라도 사보자며 손을 맞잡고 기뻐했다. 그냥 죽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잘 곳이 생기니 식욕이 돋았고 우리는 주문한 음식을 맛있게 모두 먹어 치웠다.


우리가 식사를 끝내자 제이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내 가방을 번쩍 들고 따라오라며 식당 옆으로 난 계단으로 올라갔다. 나와 동생은 다행이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제이스의 뒤를 따라갔다.




파란 문 앞에 다다른 제이스가 그리스말로 안에다 머라고 머라고 말을 하며 문을 열었다. 안에 누가 있는가 보았다. 동생과 나는 서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제이스가 하얀색으로 된 벽에 난 파란색 문을 열자 팬티만 입은 남자가 얼굴을 쑥 내밀었다. 우리는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우리를 보자 벽에 걸린 청바지를 다리에 꿰면서 그리스말로 제이스에게 머라고 얘기했다. 제이스는 같이 사는 친구라며 어젯밤 늦게까지 파티를 즐기더니 지금까지 자고 있다며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동생과 나는 머뭇거리며 제이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식당 크기만 한 방에는 싱글 침대가 두 개 놓여 있고, 간이 주방이 있었다. 바지를 다 입은 남자는 우리를 보며 넉살 좋게 웃었다.


나는 제이스에게 우리가 여기서 자면 당신과 당신 친구는 어디에서 잘 거냐고 물었다. 제이스는 그건 걱정하지 말라며, 우리는 알아서 자겠다고 했다. 얼핏 본 친구의 앞섶은 텐트를 친 것처럼 불룩해져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친구는 두 손으로 얼른 그곳을 가렸다. 동생은 그냥 가자며 내 옆구리를 찔렀다.


노숙을 택할 것인가, 호랑이 굴을 택할 것인가 잠시 고민하다가 동생과 나는 제이스에게 그냥 알아서 자겠다며 무거운 가방을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 섬에는 조금씩 어둠이 내려 앉기 시작했다.




하얗고 파란 섬에 어둠이 짙게 깔리자 골목 곳곳에 있는 클럽은 하나 둘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우리는 가방을 끌고 꽃들이 늘어진 아기 자기한 상점들을 둘러보았다. 좁은 골목에는 아슬아슬하게 옷을 입은 젊은 여자와 이 밤에 사냥을 나온 건장한 남자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클럽 안으로 사라진 섬에서 우리는 밤이슬을 피할 곳을 찾았다. 클럽의 음악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커지자 동생과 나는 제이스의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안전한 곳이 제일 위험한 곳일지도 몰랐다.


동생과 나는 번갈아 가면서, 불이 켜진 호텔마다 들어가 "두유 해브 어 룸?"을 몇 번 더 외쳤지만 모두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 뿐이었다. 시계를 보니 자정이 가까워 왔다. 우리는 마지막 호텔 한 곳만 더 확인하고, 그곳에도 방이 없다면 호텔 로비에서 하룻밤만 자게 해 달라고 청해볼 생각이었다.


호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책상 하나만 달랑 있는 프런트에는 아무도 없었다. 호텔인지 호스텔인지 모를 건물은 조용했다. 모두 파티에 간 모양이었다. 동생과 나는 이곳에서 오늘 밤을 보내기로 했다. 한여름이라 모기가 극성이었지만, 안. 전. 하. 게 밤을 보내는 게 중요했다.




우리는 도둑처럼 프런트 밑에 서로의 등을 붙이고 앉아 잠을 청했다.


새벽이 되자 만취한 남녀가 손을 잡고 호텔로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제대로 휴가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다행히 호텔로 돌아온 손님들 중에 아무도 프런트에 들르는 사람은 없었다. 서로의 짝을 찾은 여행객들은 휘청거리며 그들의 안식처인 호텔로 돌아왔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우리는 새벽녘에 호텔을 나섰다.


오늘은 어딘가에 우리가 잘 방이 분명 있을 거라며 여행 가방을 끌고 에게 해의 붉은 태양 아래로 발걸음을 힘차게 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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