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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망고 Aug 04. 2020

그녀의 이름은, 십자가

오지랖이 넓은 그녀 주위에는 늘 사람들이 많았다. 


그녀가 우리 팀으로 발령 나고 나서는 샘플을 포장하는 일도, 쿠리어를 발송하는 일은 물론, 택배나 원단 회사, 공장에서 오는 크고 자잘한 물건들도 그녀가 일일이 다 뜯어서 내게 갖다 주었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밑에는 따로 직원이 있었음에도 직급이 ‘과장’인 그녀는 팀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 

사내에 젊은 남자 직원들이 많았음에도 탕비실 정수기의 빈 물통을 교체하는 것도 늘 그녀였고, 

무거운 원단을 번쩍 들어 옮기는 것도 그녀였다. 




여름 초입에 내가 에어컨 청소하는 업체에 전화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저쪽에서 달려와 수화기를 뺏어 들더니, 수화기에다 대고 죄송하다며 얼른 전화를 끊었다. 


   "어우, 언니는. 그런 걸 왜 돈 주고 하세요. 제가 퇴근하고 가서 해줄게요."


차라리 남자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그녀는, 못하는 게 없었다. 

특히 의자를 비롯한 가구 조립을 잘했다. DIY 제품을 주문하는 날은, 그녀가 꼭 필요한 날이었다.  


근무 시간에 누군가, 아- 배고프다, 하면 그녀는 이미 빵집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아파서 결근한 자취생이 있으면, 점심시간을 할애해서 죽을 사 들고 가서 먹이고,

 거리상 여의치 않으면 퇴근 후 자취생 집에 가서 죽을 쑤어주는 이도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내가 사는 오피스텔에도 종종 왔었는데, 그녀가 우리 집에 오는 날은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고, 

쌓인 설거지를 말끔히 해 주는 날이었다. 


내가 한사코 말려도 "언니는 피곤하니까 쉬어요." 라며 오피스텔을 쓸고 닦고, 

갈 때는 음식물쓰레기 버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퇴근 후 꽃꽂이를 배울 때, 그녀는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문 앞에 꽃 바구니를 갖다 놓고 

내게 문을 열어보라며 깜짝 선물을 하기도 했었다. 



 

오피스텔 계약 기간이 다 되어서 이사를 가야 할 때였다. 

내가 회사 청소 아주머니에게 이사 갈 집 청소를 맡길 거라고 하자, 

그녀는 토요일이니 자기가 해 주겠다며, 왜 쓸데없이 돈을 쓰냐며 나를 나무랐다. 


이삿짐을 싣고 새집으로 가 보니 언제 왔는지 모를 그녀는 각양각색의 청소도구와 세제를 사 가지고 와서 

주방은 물론 화장실까지 이미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아 놓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내가 손댈 곳이 아예 없었다. 

너무 고마워서 봉투에 십만 원을 넣어서 차 안으로 던져 넣었는데, 

그녀는 내게 진심으로 화를 버럭 내며, 돈 받으려고 한 거 아니라며 그대로 가버렸다. 




회사 산악회 멤버였던 그녀와는 자주 등산을 갔다. 

내가 산행을 힘들어하면 그녀는 내 배낭을 뺏어서 매고, 뒤에서 나를 밀어 주기까지 했다. 

그녀는 함께 산행하는 사람들을 위해 새벽에 일어나 샌드위치와 볶음밥, 

과일과 초콜렡등 가방 가득 먹을 것을 짊어지고도 곧잘 산을 올랐다. 

산행 후 쓰레기를 챙겨 오는 것도 늘 그녀의 몫이었다.  


함께 저녁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러 가면 계산대 앞에 제일 먼저 서 있는 게 그녀였고, 

십 중 팔구는 그녀가 계산을 했다. 금액은 얼마가 되든 상관없었다. 

그녀는 자기에게 돈 쓰는 것에는 매우 인색했지만, 남의 일이라면 뭐든 발 벗고 나섰다. 




오래전에 결혼은 했지만 아직 아이가 없는 그녀는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어느 곳에서나 몸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는 그녀를 ‘십자가’라 불렀고, ‘너는 똥도 버릴 것이 없다’며 칭찬으로 일관했다. 

그녀는 그런 말에 수줍어하면 자기의 별명에 걸맞게 어디에서든 몸을 안 사리고 일을 했다.

그런 그녀를 사람들은 좋아하고, 또 더러는 악의적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녀는 매일 밤, 직원들 술자리에 참석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모두가 그녀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하룻밤에 두 탕 세 탕을 뛰어야 할 때도 있었다. 


고민이 있는 사람들은 그녀에게 고민 상담을 했고, 

그녀는 돈을 들이든 시간을 할애하든 간에 사람들에게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 

특히 연애 상담 전문이었는데, 회사에서 단짝으로 지내던 친구가 회사의 유부남과 사랑에 빠지자

 그 둘을 떼어 놓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녀가 친구를 설득하면 할수록 친구는 유부남에게 더 깊이 빠져들었고, 

자괴감에 빠진 그녀는 그 일로 회사를 그만두었다. 

끝이 뻔한, 결국은 불행해질 친구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고, 

더 이상 곁에서 친구를 볼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퇴사 후, 한 달 여가 지났을까 퇴직금이 나왔다며 그녀는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함께 저녁을 먹고 그녀가 집에 가서 한 잔 더 하자고 하길래 그녀의 집으로 갔다. 

그런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소파에 쓰러져 바로 잠이 드는 거였다. 


주인이 잠든 집에서 혼자 있기가 뭣해 가려던 찰나에 십자가의 남편이 들어왔다. 

몇 번 본 적이 있는 남편 나에게 좀 앉아 보라고 했다. 


 아니 회사도 안 다니는 사람이 밖에서 도대체 뭘 하는지 집에만 들어오면 씻지도 못하고 저렇게 쓰러져 신음소리를 내며 잡니다. 집안일은 장모님이 하루 걸러 와서 다 해주시고, 공과금이나 집안 대소사는 제가 다 챙기는 데, 뭐가 그리 바쁘고 피곤한지…… 도대체 쟤가 왜 저러는지 아세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십자가의 남편은 그녀가 세상 사람들의 짐을 모두 지고 가는 ‘십자가’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 

자고 일어나면 또다시 사람들의 십자가를 지고 동분서주할 그녀를 생각하니 안쓰러웠다. 


아마도 그녀는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피곤한 생을 일부러 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녀가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 밖에는 없는 것 같다.    


오늘은 십자가와 함께 맛난 저녁을 먹어야겠다. 계산은 반드시 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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