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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망고 Jul 31. 2020

모피 코트와 마을버스

사무실이 있는 구로동은 80년대까지 봉제공장이 즐비했던 곳이다. 지금은 공장형 아파트 단지로 모두 탈바꿈해서 예전의 자취를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여전히 구로스러운 모습은 곳곳에 남아 있다.  


이곳은 강남이나 명동처럼 세련된 옷 가게나 카페, 식당은 찾아볼 수는 없지만, 좋은 게 하나 있다면 모피나 다양한 의류, 가방 등을 만드는 곳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에 ‘싼 가격’에 이런 물건들을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국내에서 판매하는 모피는 대부분 구로동에서 만든다고 했다. 명절이 다가오면 각 공장이나 해외에 생산지를 가지고 있는 회사들은 현금을 융통할 요량으로 공장에 남은 재고와 샘플들을 일반인에게  시중가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팔았다. 


언제까지 이곳에서 회사를 다닐 수 있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기회가 되면 우리는 정가보다 싼 가격에 옷을 사고, 또 가방도 사서 쟁여 놓았다.  

비록 케어 라벨과 메인 라벨은 상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두 동강이 났지만, 시중보다 싸다는 이유로 모든 게 용서가 되었다. 




 몇 해전, 추석 즈음에 나는 회사 직원들과 모피 코트 매장에 구. 경. 만 할 생각으로 갔었다. 하지만 이것저것 입어보다가 '백화점에 납품하는 브랜드와 동일한 것으로 시중가의 삼분의 일 가격'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그만 덜컥 카드를 긁고 말았다. (스스로를 합리화하자면, 이런 가격에 안 넘어갈 여자가 누가 있단 말인가?) 


   곧 건물 사이로 칼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이 왔고, 마을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하던 나는, 올 들어 최저 기온을 경신했다는 아침 뉴스를 듣고 구입 후 처음으로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모피코트를 꺼내 입었다. 

모피코트에 운동화를 신자니 어울리지 않아서 결혼식에 갈 때나 신는 하이힐도 꺼내 신었다.

 늘 편하게 들던 에코백도 모피코트와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아, 

사놓고 무거워서 모셔만 두었던 명품 가방에 얼른 소지품을 옮겨 담았다. 

출근 준비를 끝내고 현관에 있는 전신 거울을 보니 그럴싸해 보였다.

 역시 옷이 날개라는 말을 실감하며 목에 힘을 주고 밖으로 나갔다. 


   또각또각 소리가 울려 퍼지는 하이힐에 간지 나는 명품 가방, 거기다가 윤기가 번지르르한 모피 코트 걸치고 나니 걸음걸이에도 자신감이 붙고 어깨가 절로 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여느 때처럼 집 앞에서 마을버스를 기다렸다. 영하로 내려간 기온 때문에 발이 시렸지만, 칠부 소매 안쪽으로 매서운 바람이 들어왔지만, 나는 모피코트를 입은 여자였으므로 의젓하게,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 달달 떨며 마을버스를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온 마을버스는 그야말로 만원이었다. 

이 버스를 놓치면 지각을 할 수도 있었으므로, 지각을 면하려면 택시를 타야 했으므로, 택시비를 쓰는 건 아까웠으므로, 나는 열린 문 안으로 사람들을 밀치며 모피코트와 가방을 밀어 넣었다. 


   버스기사는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앞 문을 닫고 차를 출발시켰다. 커다란 사이드 미러에는 일그러진 명품가방과 몸이 반쯤 휜 내 모습이 고스란히 비쳤다. 기사는 신호가 걸릴 때마다 일부러 급제동을 해서 만원 버스를 가벼이 추스른 후 다음 정거장으로 내 달렸다. 사무실이 밀집해 있는 곳에서 한 무리의 승객이 내리고 나는 조금 한산해진 버스 안 쪽으로 발을 옮겼다. 


버스 안의 승객을 둘러보니 모피 코트를 입은 사람도 나뿐이고, 명품 가방을 든 사람도 나뿐이었다. 

승객들은 따뜻하고 가벼운 패딩과 눈길에도 미끄러지지 않을 운동화와 실용적인 가방을 들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이 곁눈질로 나를 훔쳐보는 것 같았다. 

모피코트 사 입을 돈이면, 비싼 명품가방을 살 능력이 되면 택시나 자가용을 타고 다닐 것이지 마을버스가 뭐람? 하며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나는 마을버스 안에서 어디다 눈길을 둬야 할지 몰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네다섯 정거장이면 도착할 곳이었지만, 빨리 내렸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중간에 내려서 택시를 타고 갈까 망설였지만, 

택시비가 아까워 그대로 버스에 몸을 싣고 휘청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피 코트와 마을버스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택시비 몇 천원도 아까운 주제에 모피코트라니...... 

마을버스에서 내려 회사로 걸어가는 길은 여느 때보다 더 춥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 나는 딱 한 번 입은 모피코트를, 아직 할부도 끝나지 않은, 

내가 산 옷 중에 가장 비싼 옷이었던, 그러나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모피 코트를 언니에게 헐값에 넘겨 버렸다. 


뭐든 분수에 맞게 입고 행동해야 마음이 편한 것이다. 

모피 코트만 하나 달랑 걸쳤다고, 명품 가방을 하나 들었다고 해서 나의 수준이 올라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하이힐을 신고 사정없이 흔들리던 그 마을버스 안에서  절실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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