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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망고 Jul 21. 2020

지나의 세 번째 결혼

연락이 뜸 하던 지나 언니가 우리 회사 쪽으로 올 일이 있다며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다. 


지나 언니는 첫 직장에서 나에게 일을 가르쳐준 사수 언니다.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는 방글라데시에 있는 봉제 공장으로 의류 부자재 수출을 하고 있었다. 나보다 네 살 많은 언니는 다카 지사의 직원, 이크발(Iqbal)과 몰래 국제 연애를 했고, 언니 자리의 전화요금이 몇 백만 원이 나와서 둘의 사이가 들통이 났다. 


언니는 첫 다카 출장 시 이크발과 함께 방콕으로 나와 그들의 사랑을 확인하고, 모두의 거센 만류에도 불구하고 곧 이크발과 결혼을 했다 - 여행 비용은 물론이고, 결혼 비용도 대부분 언니가 댔다. 언니의 아빠가 언니의 머리를 빡빡으로 밀고, 또 회사까지 찾아와 사장님에게 무릎을 꿇고, 결혼 만은 제발 말려달라고 사정을 했지만, 그 누구도 불붙은 둘의 사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언니는 결혼 후 다카로 떠났고,  그 후 나도 다카에 있는 회사에 취직을 해서 다시 언니를 만나게 되었다. 


방글라데시에서 수재만 간다는, 다카 대학(우리나라로 치면 서울대학교)을 나온 이크발은 평범한 집안의  뱅골리이긴 했지만, 영어를 원어민처럼 잘했고 또 훤칠한 외모에 어느 누구와 같이 있어도 서글서글하게 잘 어울렸다. 지나 언니와 결혼한 이크발이 내게는 뱅골리가 아닌 외국인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회사에서도 이크발에게 급여는 물론 특별 대우를 해주었다. 


우리는 둘을 '운명이 엮어준 사랑'이라고 믿었다


언니는 종종 이크발과의 연애 때 주고받았던 수백 통의 러브레터를 자랑하며 얼굴에 행복한 미소를 가득 머금기도 했었다. 


 소탈하고 무던한 성격의 언니는 결혼 후 아들과 딸을 연년생으로 낳고, 꾸준히 회사를 다니며 이크발과 다정하게 살았다. 이크발보다 언니의 급여가 훨씬 많았기 때문에, 언니는 쉬지 않고 일을 했다.


뭐가 부족해 뱅골리와 결혼을 했냐는 한국 교민들의 눈총은 언니와 친하게 지내는 내게도 느껴질 정도로 따가웠지만, 언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언니는 그곳에서 교민사회에도 섞이지 못하고, 뱅골리 사회에도 섞이지 못하고, 이크발 만을 의지한 체 어쩌면 하루하루를 견디어 낸 것인지도 모른다. 


언니는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캐나다로 이민을 갈 거라고 말했다. 둘 다 능통하게 영어가 되고, 캐나다에 이크발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애들 교육과 그들의 노후를 위해서 가능한 한 빨리 캐나다로 갈 거라고 말했다. 




나는 언니보다 먼저 다카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왔고, 가끔 메신저로 언니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카에 있는 친구가 지나 언니가 애들 둘만 데리고 서울로 야반도주를 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둘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크발이 한국으로 날아가 지나에게 만나줄 것을 사정했지만, 만나주지 않아서 이크발이 도로 다카로 돌아왔다고 했다. 이크발은 지나와 친분이 있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왜 지나가 자기를 버리고 갔는지, 왜 아무 얘기도 없이 자기를 떠났는지, 꼭 한 번만 지나를 만나게 해 달라고 사정을 했지만, 여러 지인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지나는 두 번 다시 이크발을 만나지 않았다고 했다. 


지나 언니는 내 메신저에도 사라지고 없었다. 서울로 돌아온 지나 언니는 아이들과 부모님 집에 기거하면서, 영어 학원을 차렸다고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크발은 언니와 계획했던 대로 캐나다로 이민을 갔고, 그곳에서 만난 여자와 결혼을 했다며 버젓이 SNS에 결혼식 사진을 올려 모두를 분노케 했다. 


우리는 지나 언니가 그토록 사랑했던 이크발을, 평생을 함께 살 것 같았던 그를 단칼에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를 추측했다. 그것은 이크발이 변심했을 거라는 게 지배적이었다. 이크발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거나, 이크발의 불륜을 언니가 목격했기 때문일 거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아이가 둘이나 있는 데 그런 결정을 했을 리가 없다며 서로 입을 모았다. 




약속 시간에 맞춰 근처 식당으로 가보니 언니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반가워 나는 언니를 얼싸안았다. 언니가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 몇 번 통화는 했었지만, 이크발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었다. 우리는 그동안 서로 어떻게 지냈는지, 하나도 변한 게 없다며 어제 만난 사람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조심스럽게 이크발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참 나쁜 사람이라며, 어떻게 언니가 떠나자마자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할 수 있냐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언니가 애들을 데리고 떠나게 만들었냐며 유도신문을 했다. 


언니는 살다 보니 그렇게 되더라. 나도 평생 이크발과 살 줄 알았는데, 세상 아래 변하지 않는 것은 없더라며, 내 앞에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이건 뭐야 언니?”

나는 눈이 동그라져서 봉투를 열었다. 

“나 결혼해.”

“대박. 어떤 사람이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내년이면 오십이 되는 언니는 동갑내기 남자와 두 번째 결혼을 한다고 했다. 자기도 처음에는 결혼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만나다 보니 정이 들었고 그가 먼저 청혼을 해서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나는 “그 남자는 언니의 어디가 맘에 든 데?”라고 도발적인 질문을 했다. 

언니는 “나도 그게 궁금해.” 하며 말을 이었다. 


사실인즉 슨, 남자가 교통사고로 크게 다쳤었는데 언니가 지극 정성으로 간호를 했다고 한다. 당시 그 남자와 교제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출퇴근 시 병원에 들러 얼굴을 보고 주말에 간호를 하는 건 당연히 언니가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했는데, 죽다 살아난 남자는 언니와 남은 인생을 살리라 결심했다고 한다. 


서울과 다카에서 각각 이크발과 두 번의 결혼식을 올린 언니는, 결혼식은 정말 안 하고 싶었지만 남자는 초혼이라서, 남자 때문에 세 번째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고 말했다. 


남자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제약회사에 연구실에 다니고 있었고, 미국 시민권자라고 했다. 

언니는 방글라데시에 살면서, 자기에게는 늘 남자 복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했는데, 자기에게 이런 복이 있을 줄 몰랐다며 밝게 웃었다. 


나는 언니의 세 번째 결혼이 해피 엔딩이길 진심으로 바란다며, 네 번째 결혼식은 부디 자제해 달라고 농을 하며 언니와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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