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이야기는 제가 군대에서 다치게 되어
의병제대를 하게 된 이야기입니다
《체육대회》
1994년 시월 국군의 날 기념 체육대회가 있던 날 본부 포대 선발 선수 11로 뽑혀 포대별 축구대회에 참가하였다
그날이 아마 공휴일로 기억한다
체육대회가 있는지 알리 없던 친구 둘이 면회를 왔다
면회신청은 되었지만 축구경기가 진행 중이라
면회를 할 수 없던 나는 동기를 통해 상황설명을 하고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우승을 한 포대에는 포상으로 살아있는 돼지 한 마리가 걸려있었다
(여기서 포대란 포병은 알파 브라보 찰리 본부 포대 4개의 포대가 합쳐 1개의 대대를 말한다. 육군으로 말하면 중대를 의미한다
포대는 포병의 중대를 말한다)
포상도 포상이었지만 군대의 축구경기는 살벌하단 말이 딱 맞을 정도로 목숨 걸고 하는 축구 경기였다
경기가 진행될수록 과열 양상은 극에 달해 있었고
사병과 하사관들도 같이 섞여 있던 터라 계급장 띠고 하는 경기이긴 했지만 경기중 보이지 않는 계급서열이 눈에 보이는 그런 오합지졸의 축구 경기였다
경기가 중반으로 치달을 즈음
운이 없었는지 상대방 골문 앞에서 나와 브라보 포대의 김 중사와 볼 경합 중 공중볼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일어난 몸싸움에서 공중에서
김 중사가 나에게 반칙을 하며 밀치는 바람에
난 그대로 땅으로 나가떨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볼 경합이 있은 직후 김 중사는 나에게 다가와
넘어진 나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우며 갖은 욕설과 함께 한쪽 손으로 나의 오른뺨을 후려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부대원들은 순간 각자의 포대에서 하던 응원을 잠시 멈추고 갖은 야유와 함께 몇몇 부 대원들은 운동장에 잠시 난입하는 일도 발생하였다
대대장과 포대장들이 보고 있는 앞이었지만
그런 건 이곳에선 별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그 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경기는 바로 속행되었다
선임들의 위로를 받으며 몇 걸음 걷던 나는
다리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사이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가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걸 느낀 나는 동료들의 부축을 받은 채 경기장 밖으로 나와 군의관에게 검사를 받았다
이리저리 살펴보던 군의관은 별일 아니라는 듯
내 어깨를 툭치며 다음 주 외진 나갈 때 따라가서 엑스레이나 한번 찍어보라는 말과 함께
다시 축구경기에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그 후 군의관의 서명으로 바로 환자로 분류되어 그날부터 나는 의무대 소속으로 전환되어 포대 인원에서 바로 빠져 버렸다
그때 잠시 잊고 있던 친구들에게 쩔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면회를 갔다
친구 중 한 명은 군대를 아직 안 간 친구였고
한 명은 1 공수 특전여단에서 중사로 복무 중인 친구였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면회를 와준 친구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짧은 면회를 마치고 바로 의무대로 복귀하였다
3일이 지나고 4일이 지나고 다리는 점점 부어올라 군복이 팽팽할 정도로 다리가 부어올라 있었다
의무대라고 해봐야 시골 초등학교의 양호실 수준이었다
유리가 여기저기 깨진 문은 밑바닥 레일이 다 닳아 없어져 삐그덕 소리를 내는 미닫이 문이었다
가벼운 부상이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지만 나로선 별다른 내색이나 특별한 조치를 원할수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훨씬 지난 수요일
드디어 포대 전체 환자 중 상태가 심각한 부대원 몇 명을 추려 외진을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호로가 없는 5톤 트럭에 짐짝처럼 몸을 실었다
덜컹거리는 트럭을 타고 간지 얼마나 지났을까 우리가 탄 차는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국군 벽제 통합병원에 도착하였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외래진료에는 서북부 전선 부대들의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룬 모습이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내 차례가 되어 정형외과에서
진료를 받고 나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병명은 좌슬부 십자인대 파열로 바로 응급수술을 받아야 했다
집에는 담당 군의관 공대위가 연락을 취했다고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원래는 보호자의 동의가 있어야 수술을 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많이 경과되어 위급한 상황이라 유선 상으로만 동의를 얻고 부모님이 오시기 전 모든 상황은 종료가 된 뒤였다
일주일 전 축구대회 때 김 중사와 볼 경합 중 땅으로 떨어지면서 무릎이 돌아가 왼쪽 무릎의 십자인대가 끊어진 것이었다
2번에 걸친 전신마취로 4시간에 걸친 수술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끝을 맺었고
나는 마취가 덜 깬 상태에서 병실로 옮겨질 수 있었다
지금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지만
첫 번의 척추마취로 시작된 수술은 수술 도중 마취가 풀려 다시 전신마취로 이어지는 2번의 마취와 수술로 가까스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
나의 집도의였던 공대위는 내가 두 번째 수술이었다고 나중에 들을 수 있었다
군 병원이 얼마나 열약한 환경과 경험 없는 나이 젊은 의사들로 많은 군인들이 시험실의 쥐처럼 수술대상자가 되는지
지금 생각하면 정말이지 자식을 군대에 보내고 싶은 부모는 없을 것으로 보이는 순간이기도 했다
내 말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지금도 훈장처럼 다리에 수술 자국으로 남아있다
수술을 위한 절개 부분이 무릎 바로 아래부터 허벅지 높이까지 30센티 정도의 흉터로 남아있다
마취에서 깨어난 나는 눈앞에 부모님이 오신 걸 알 수 있었다
침대 아래쪽에서 담담히 나를 쳐다보고 계시던 아버지의 모습과
계속하여 눈물을 훔치고 계셨던 엄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훤하다
자식이 군 복무 중 다쳐서 수술을 한다는 말을
군 병원을 통해 전해 들었을 때의 부모님 심정이 어땠을까?
얼마나 놀라셨을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겠다
자식의 몸이 상하는 일만큼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또 있을까 싶다
난 그때 부모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안겨드린 거 같아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낯선 병원생활》
그렇게 시작된 병원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움직일 때마다 스프링 소리가 요란히 나는 병원 침대 10개 정도를 주르륵 붙여 사람 하나 지나갈 정도의 간격을 조금 띠고 다시 침대 10개를 붙이는 형태로 한 줄에 30개 정도의 침대가 양옆으로 나란히 줄 맞춰 있는 모습이었다
침대엔 각자 다른 부대에서 모인 환자들로 2개의 침상에 3명씩이 누워있는 모습으로
OS 병실 한 곳에 100여 명의 환자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이 정말이지 양계장의 닭들이 모이를 먹기 위해 나란히 있는 모습과도 같아 보였다
그런 OS병실이 AB로 나뉘어 모두 2개의 커다란 병실로 이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OS병동에만 200여 명의 환자들이 있는 샘이었다
난 사타구니부터 발목까지 통깁스를 하여 꼼짝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상태가 조금 나은 환자들은 식당에 걸어가서 밥도 먹고 했지만
목발도 익숙지 않던 나는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힘겨운 나날에 연속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가족들의 면회가 유일한 낙이었을 만큼 병원 생활은 적응하기 힘든 곳이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지나고 겨울이 찾아왔다
이곳에 온지도 어느새 3달이 다 되어간다
낙엽이 모두 떨어져 앙상한 나뭇가지를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나의 모습만이 내가 군인인지
민간인인지 헷갈릴 뿐이었다
겨울의 끝자락
봄을 알리는 병원 한쪽에 핀 목련꽃의 반가움만큼이나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담당의인 공대위에게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3월 중순쯤에 의무심사가 있을 예정이니 집에 가고 싶으면 부지런히 재활에 신경 쓰라는 말이었다
처음엔 몰랐지만
내가 다친 부위의 십자인대 파열은 군 생활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는 상태라 수술이 잘되어
걸을 수 있을 정도의 재활까지 도달하면
의무심사를 통해 제대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군생활은 병원생활의 6개월을 포함하여
3월 의무심사를 통과하고 봄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군생활은
예기치 않은 부상으로 지난가을 병원에 들어와
다시는 자대를 가보지 못하고 병원에서
의병제대를 하게 된 것이다
제대는 하게 되었지만 제대 후 나의 생활은
통 넓은 바지를 입고 보조기를 차고 다니며
1년여를 재활에 매달린 끝에 조금이나마
보조기 없이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집에 있는 동안의 부모님의 맘고생을 생각하면 이런 불효가 또 있을까 싶다
내가 항상 얘기하는 거지만
아이들의 사고는 무조건 부모 잘못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몸을 다치는 일은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이다
결혼을 하고 내 자식이 어느새 성장하여 군대를 갈 날이 다가오니
예전 나의 부모님께 불효한 생각이 많이 난다
아들이 부디 몸 건강히 군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