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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아 기자 Jul 16. 2020

[배우론] 유성재, 끊임없이 말을 거는

<더 모먼트>, <미아 파밀리아>, <라흐마니노프>의 유성재라는 배우



뮤지컬 <라흐마니노프>에서 배우 유성재가 연기한 정신의학자 니콜라이 달은 한결같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키가 훤칠하지도, 얼굴이 깎은 듯 잘생긴 것도 아닌 그가 깔끔하고 세련된 인상의 라흐마니노프 역 정욱진, 박규원, 이해준과 붙어있으면 차가운 푸른 톤의 슈트조차도 소탈해 보이는 그의 말투에 묻혀 따스한 느낌을 풍겼고, 이 느낌은 극의 전반을 지배하는 예민함을 조금씩 깎아내며 공감대를 만들어냈다. 유성재는 지독한 슬럼프에 빠진 라흐마니노프의 빡빡한 하루하루를 말 그대로 비집고 들어온 니콜라이 달이었다. 다소 급하게 힐링이라는 키워드로 봉합돼야만 하는 대본의 미흡함까지 설득해낸 것은 오로지 유성재라는 배우가 지닌 힘 덕분이었다.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라흐마니노프>를 비롯해 <최후진술>, <미아 파밀리아>에 이르기까지 그는 하나의 극 안에서 여러 가지 캐릭터를 연기하는 멀티 플레이어로서 탁월하게 변하는 사람이다. 라흐마니노프를 엄격하게 지도했던 쯔베르프는 자비 없이 날이 서 있고, 차이코프스키는 우등생과 천재의 길을 칭송받은 사람답게 여유롭다. 덕분에 하나의 극 안에서, 심지어 길지 않은 짧은 역할이 지속적으로 교차되는 이 작품 안에서 쯔베르프가 라흐마니노프에게 느끼는 배신감과 절망감은 더욱 극적으로 치닫는다. 혼돈과 자기 위안에 지친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천국으로 끝까지 인도해야 하는 <최후진술>의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하나의 사람이 아니었듯, 위악적으로 굴지만 마음 약한 리처드와 스티비 사이에서 얼레벌레 뛰어다닌 오스카가 여러 얼굴로 바뀌어야 했듯 그는 자꾸만 가면을 바꿔 끼면서 웃고 울기를 반복했다.



유성재의 연기에는 늘 예상하지 못했던 애드리브가 따라붙고, 이 애드리브들은 주어진 텍스트를 흔들지 않으면서 사람에게 존재하는 다양한 면면을 능청스럽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어쩌면 이토록 능숙한 그의 연기는 결코 고요하게만은 흘러오지 않은 그의 삶을 얘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교수 생활을 하면서도 배우로서 무대에 다시 서겠다는 갈망을 이기지 못하고 연습으로 뛰어든 그의 이야기는 그가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온갖 애드리브가 어떤 인생을 살았고 어떤 고민을 했느냐에 따른 결과물임을 드러낸다. 적어도 관객 앞에서는 자신이 고민 끝에 오른 무대인 만큼 허투루 낭비하는 시간이 없다. 있는 힘껏 감정을 끌어올릴 때 남는 잉여조차, 잉여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애드리브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뮤지컬 <최후진술>

박정아 작곡가의 콘서트를 준비하는 영상에서 그는 함께 무대에 오르게 된 자신의 아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 이런 평범한 아빠의 일상조차도 무대 위에 선 그에게는 앞으로 보여줄 온갖 얼굴 중 하나일 것만 같다. 무대에서 그는 끊임없이 말한다. 우리의 얼굴도 하나는 아닐 거라고. 그러니 열등감도 성취감도, 슬픔도, 행복도 모두 몸 안에서 끄집어내라고 말이다.


배우가 인간의 여러 형상을 대변하는 사람이라면, 유성재는 그 형상으로 언제나 말을 걸고 있다. 당신은 오늘 어떤 얼굴의 인간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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