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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임오렌지 Sep 02. 2020

너무 미안해하지 말아요

층간 소음

--띵동--

" 누구세요?"

" 윗집입니다."

새로 입주한 아파트는 절간처럼 조용했다. 낮에 혼자 있으면 내 심장소리도 들릴만큼이나 적막했다. 지하 창고에 짐을 넣으러 갔더니 윗집 창고는 텅 비어 있었다. 아직 이사 오기 전이구나.. 하면서 조용한 이웃이 오기를 희망했다. 5개월이나 지나서 작년 연말쯤 윗집이라며 거실 인터폰 모니터에 여자 한분이 서 있었다. 작은 화면임에도 한눈에 세련되고 젊은 분이었다.

" 안녕하세요. 저희가 이사오는데 공사를 해야 해서요. 양해 부탁드려요."

그러고는 각종 과일 맛 주스 선물 상자를 들이 민다.

" 아이가 어떻게 되세요?"

" 7살, 9살이에요. 좀 발랄해요..."

발랄? 모야... 시끄러울 거라는 암시인가? 약간 불안했다.

새 아파트이면서 나름 좋은 아파트라고 소문난(나는 자가 아님) 이 곳을 한 달 넘게 공사하는 게 이해가지 않는 반면에 얼마나 멋지게 공사하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또한 윗집은 오래도록 이사 가지 않을 거라는 결정적 사실을 내포하고도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붙은 공사내용에는 거실에 있는 팬트리를 없애기까지 한다니 거실이 더 넓어질 테고 아이들의 뛰어 놀 공간이 더 생길 것이란 불안감이 더 커져갔다.


한 달 남짓 후 윗집이 이사 온 사실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우리 집의 고요함은 날아갔다. 눈이 내리면 눈 쌓이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던 우리 집은 윗집의 층간소음으로 창밖의 눈 조차 눈에 들어올 여유도 없게 되었다.

딸아이는 소음 때문에 기말고사 시험공부를 할 수 없다며 시험 결과에 대한 보험을 들어 놓는 듯했다.

나도 살면서 이런 정도의 층간 소음은 처음이었다. 아이의 뛰어가는 보폭 발소리와 어떤 놀이를 하는지 예상케 하는 함성 소리들이 너무 또렷했다.

딸아이의 시험이 걱정되서일까? 밤잠을 못 자서 일까? 관리실에 연락했다. 살면서 처음 하는 행위였다.

그리고 정확히 5분 후 벨소리가 나고 모니터에 그 윗집 여자분이 서 있었다.

나는 잘 시간이라 머리는 엉망이고 잠옷바람에 누구를 대면할 수 없는 상태여서 이 상황이 너무나 짜증스러웠다.

그녀 손에는 산딸기에, 홈쇼핑에서 유명한 냉동 돈가스에 바리바리 싸 가지고 내려왔다.

문밖에서 너무 미안해하며 죄송하다고 연신 이야기했다.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넘기며

" 회사로 학교로 나가니 낮에는 실컷 뛰어놀게 하세요."라고 나름의 배려인 척 이야기하며 그 쇼핑백의 먹거리들을 받았다.


그 후로 소음이 조금 줄어들었고 아이들의 뛰는 소리 뒤에 그 엄마의 외침도 작은 소리로 들렸다.

우리 식구는 무뎌지기도 하고, 집에서 무방비로 있을 때 누구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관리실에 연락만은 참았다. 딸아이는 기말고사 결과에 그 보험을 잘 써먹었다. 나도 아침은 조금 일찍 일어나는 버릇이 생겼다.

가끔 윗집은 먹거리를 가지고 내려온다.

그녀가 가져온 먹거리로 마음 편히 아이들 뛰는 걸 방치할까 봐, 나는 그녀가 올 때마다 정색을 하며 안 받겠다 이야기도 해보고 쿠키 선물 상자를 윗집 문고리에 걸어 놓고 내려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 소음의 주인공들을 만났다. 학원 갔다 오는 길인 듯싶었다.

엄마가 아랫집 아줌마라고 소개하니 주눅 들어 고개를 까닥한다.

원래 아이를 좋아하는 나였지만 사소한 복수처럼 나도 고개만 까닥했다.

그 아이들에게 나는 클라이맥스 놀이 때 등장하는 마녀 일지 모른다.

" 조용히 해. 아랫집 아줌마가 또 인터폰 하겠다! " 이런 엄마의 외침을 들으며..

집에 온 나는 그 아이들의 주눅 들어 나를 보던 눈빛이 오랫동안 내 마음을 불편케 했다.


펜텀 싱어 3 결승전이 있던 날, 나는 일주일을 기다리며 생방송 보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우퍼도 켜 놓고, 맥주도 따고, 문자 투표 준비에 핸드폰도 손에 쥐고...

얼마나 설레어하며 예선전부터 몇 개월을 같이 달려온 시청자로서 오늘 이 결승전의 의미는 기대 그 이상이었다. '쿵쿵쿵'... 설마... 윗 집 아이들이 뛰기 시작했다.... 조용한 베트 미들러의 'The Rose'의 노래가 윗 집 소음에 섞여 감상할 수 없었다... 너무 화가 나고 눈물이 났다... 이 눈물은 몇 달을 참은 거일지 모른다.

볼륨을 높였다. 우퍼 소리가 바닥도 치고 천장도 치는 듯했다.


이제 내가 이사 온 지도 1년이 지나고 윗집이 이사 온지도 거의 7개월이 지나간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코로나 때문에 모두들 집에 있는 시간도 길어졌다.

누군가 놀러 오면 윗 집 아이들 뛰는 소리에 깜짝 놀란다. 이상하게도 나는 이제 신경이 덜 쓰인다. 딸아이는 공부할 때 에어 팟을 끼고 공부하고 남편은 다행히 아직도 머리만 닿으면 바로 잠이 든다.

오늘도 무방비의 엉망인 모습으로 집에 있는데 아침부터 벨이 울린다. 윗집의 그녀는 너무 유명한 도넛이라며 우리 것도 하나 더 샀다고 한다. 예쁜 상자가 담겨있다. 


갑자기 우리 올케 언니가 예전에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들만 셋인 우리 언니는 밑에 집에 무슨 죄를 지은 사람처럼 머리를 조아리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무언가를 사 가지고 내려간단다. 그러면서 " 이 삼 형제들은 알까요? 지네들 때문에 내가 죄인처럼 누구에게 머리 조아린다는 걸"

맞다. 그녀는 잘못이 없다. 나름 열심히 아이들에게 훈계도 했을 것이다. 바닥에 매트도 샀을 것이다.

아이들의 에너지를 어른이 이해하기 힘들 때가 많다. 우리도 어렸을 때가 있었다. 늘 밖에서 뛰 놀았으니 몰랐었겠지. 아파트가 아니라서 몰랐겠지..

이제는 그녀가 나에게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끄러우면 문자 달라고 전화번호를 준다는 말에 나는 괜찮다고 이야기했다. 그 죄인의 교도관이 되고 싶지 않다.


코로나로 집에만 있는 요즘 아마 층간소음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나도 오늘은 조금 힘들지만 그녀가 가져온 그 유명하다는 도넛을 한 움큼 입에 물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켠다. 밀도 높은 빵 사이 그리 달지 않은 크림이 터져 나온다. 달달해진 마음으로 다음에 윗집 꼬맹이들과 마주칠 때는 마녀 이미지는 꼭 벗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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