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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단이 Nov 15. 2023

그냥 네 갈 길 가


 최근 노래가 주는 힘은 이렇게 엄청나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도 내 깊은 우울감과 정서불안을 속 시원하게 긁어주는 이는 없었는데 노래 하나로 이만큼씩이나 상쾌해질 줄이야! 이 노래를 만나 오랜만에 너무 기분이 좋아서 거리를 하염없이 걸었다.


 2018년 11월에 나온 곡이라고 한다. 당시엔 이런 곡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어쩌다 보니 이 철 지난 곡을 지금에서야 처음 듣게 되었다. 바로 ‘장기하와 얼굴들’의 「그건 니 생각이고」. 2018년, 나는 대학을 졸업한 후 처음 들어간 회사에서 2년 계약에 묶여 고군분투하고 있던 때였다. 그때 어쩌다가 이 곡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통쾌하게는 느꼈을지언정, 이 정도의 홀가분함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 자신한다. 그때는 내가 가고자 했던 길이 불안정하고 막연하기만 했던 때였으므로. 나 또한 이 길을 계속해서 갈 수 있을지 크게 자신이 없었다. 운이 좋아 성공만 할 수 있다면 감사하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그런 와중 몇몇 상사나 또래 친구들은 나를 현실적이지 못한 안타까운 아이라고 여기며 걱정의 말을 종종 해주었다. 그러나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에서야 나는 남들이 걱정해주던 ‘내 길’을 다시금 확신하게 되었다. 어릴 적엔 그저 순수한 꿈처럼 보이기만 했던 목표를 떠올리 ‘아, 그 길 내 길 맞았네!’라고 껄껄 웃어 재낄 수 있는 지금의 나는 비로소 어른이 되어 있었다.


-

이 길이 내 길인 줄 아는 게 아니라

그냥 길이 그냥 거기 있으니까

가는 거야


 그래, 맞다. 12살 때부터 막연한 꿈과 목표가 있었고 그 길이란 구름에 가려진 채 내 앞에 놓여있었다. 순진했던 나는 겁도 없이 내 마음을 따라 그 길을 걸어갔다. 낮엔 돈을 벌기 위해 일하다가도 밤새 글을 쓰고 시를 쓰곤 했다. 나보다 좀 더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사람들은 나에게 조언해주었다.


그건 길이 아니야.
‘길’이란 건 미래를 계산해봤을 때 충분히 갈만하다고
판단된 시점에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는 거야.
네 주위엔 아무도 너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니?
네 친구 모두 현실적인 공부나 준비를 안 했었다고?
네가 관심이 없어서 그 친구들이 뭘 하는지 몰랐던 거 아니야?
아마도 그 친구들은 너에게 티 내지 않고 미래를 준비했을 거야.
너만 몰랐을 거야. 지금에라도 철들어야 네가 힘들지 않을 거야.


 늘 이런 식이었다. 어린 시절의 꿈, 순수한 마음에 ‘내가 원하는 길’이라고 느껴서 그 길을 가기 시작했다는 건, 어떤 이들에겐 그저 비효율적이고 미련한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난 지금도 여전히 그런 말에 논리적으로 반박할만한 방법은 잘 모른다. 무슨 말을 해도 그들에게 설득이 먹히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되었든 간에, 나로선 내 마음 속에서 뭉게뭉게 빛을 밝혀주는 그 음색만이 내가 걸어가야 하는 ‘펼쳐진 길’이었던 것. 난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저 첫 소절을 들었을 때 ‘아, 비트가 흥미로운 반항적인 노래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웬걸, 화자는 나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의 입장 또한 고려하여 말을 전하고 있었다.


-

내가 너로 살아 봤냐 아니잖아

니가 나로 살아 봤냐 아니잖아

걔네가 너로 살아 봤냐 아니잖아

아니면 니가 걔네로 살아 봤냐

아니잖아


 잔뜩 독기 오른 채 의견을 막아서는 이들에게 덤비는 말투라기엔 충분히 상대방을 고려한 마음이 담긴 가사였다. 화자가 자기 자신만 생각했다면 “네가 나로 살아 봤냐”라는 말이 먼저 대뜸 나왔을 텐데.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너로 살아 봤냐 아니잖아.” 상대방의 입장도 충분히 배려하는 가사였다.


나도 너로 살아본 적 없기에, 나 또한 너에게 그런 말 할 자격 없다.


 마찬가지로 “걔네가 너로 살아본 적도, 네가 걔네로 살아본 적도 없기에 우린 아무에게도 왈가왈부할 자격 없다”라는. 혹여나 너 또한 그런 대우를 받아본 적 있다면, 네게 그런 말을 한 사람들은 상대할 가치도 없는 이들이라고. 화자는 오히려 상대방을 다독여준다.


-

그냥 니 갈 길 가

이 사람 저 사람

이러쿵 저러쿵

뭐라 뭐라 뭐라 뭐라 뭐라 뭐라 해도

상관 말고

그냥 니 갈 길 가


 상대방을 충분히 배려해준 화자는 “그냥 네 갈 길 가”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너도 그리고 나도 내 갈 길 가면 된다고. 누가 뭐라 하던 너나 나나 상관하지 말자고.


 곡은 장기하 특유의 정확한 발음과 시원한 보이스가 만나 이어지다 점점 하이라이트로 치닫는다. 흥미로운 리듬에 어우러져 반복되던 가사는 어느 순간 진지한 랩이 되어 귀에 꽂힌다.


-

이 길이 내 길인지 니 길인지

길이기는 길인지 지름길인지

돌아 돌아 돌아 돌아 돌아가는

길인지는 나도 몰라

몰라 몰라 몰라 너도 몰라

결국에는 아무도 몰라


 여러 영상을 보아도 장난스레 곡을 부르던 장기하는 이 소절에선 멈춰서서 숨도 쉬지 않은 채 랩을 했다. 이 소절은 딱히 누군가의 해석이 필요 없는 것 같다. 그렇지 않은가. 머리 벗겨진 부장도, 수염도 채 못 깎고 부랴부랴 출근한 신입도. 우린 아무도 나의 길이 어떻게 될지, 이 길의 끝이 어디가 될지 모른다. 좀 더 나이 든 사람이 “이건 이렇게 될 게 맞아!”라고 자신하고 예측한다지만, 정작 그 본인도 1%의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세상이다. 랩은 계속 이어진다.


-

그대의 머리 위로

뛰어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너처럼 아무 것도 몰라


 현대인은 참 안쓰럽게도, ‘내 머리 위를 뛰어다니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바로 누군가를 떠올리게 되어 있다.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아, 그 사람! 혹은 그 새끼!' 누구인지 딱 명확하게 짚어낼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상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사람이 바로 떠오른다는 것은, 우리가 이 현실을 참 성실하게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니까.


 뻔하디뻔해 보이는 이 곡은 뻔한 가사를 반복하며 곡을 끝낸다.


-

알았어 알았어 뭔 말인지 알겠지마는

그건 니 생각이고

니 생각이고

니 생각이고


“네 말이 뭔 말인지 알겠다”엔 그래도 상대방의 말을 경청한 적은 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몇몇 이들은 화자가 상대방의 말을 듣지도 않고 빡빡 지 생각만 우기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이 곡에서 계속 말을 이어온 화자의 심성을 본다면, 그런 사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상대방의 말을 충분히 경청해왔지만 이젠 지쳐버린, 이제야 속시원히 내 생각을 내질러보는 사람이 아닐까.


 이미 많이 들었어요. 저도 알아요.”가 들어있을 것 같다.


 우린 숱하게 들었다. 남의 생각을. 그러니 오늘은 그냥 좀 내버려 두라고 소리쳐도 괜찮지 않을까. 여태껏 얌전히 할 일 다 한 우리이지 않은가. 물론,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이렇게 대항할 수 있는 자격은 사라진다. 그러나 지금껏 꾹 참고 남에게 폐 끼치지 않으며 나의 길을 오랜 시간 조용히 걸어왔을 뿐인데, 누군가 계속 나를 공격한다면 한 번쯤은 내 목소리를 내질러보자. 이 일은 그저 프닝 정도로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정작 내 목소리를 들어야 할 상대방이 그 안에서 본인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찾을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니 우리는 이제 당당하게 나의 길을 걸어가자.



2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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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네 갈 길 가






‘장기하와 얼굴들’의 「그건 니 생각이고」뮤비를 보고 싶다면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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