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덥고 후덥지근한 여름에 불던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같았던 추억을 함께 한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다.
언제부터인가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을 하기 시작했다.
아경이 젊은 시절에는 20대 후반~30대 초반에 대부분의 친구들이 결혼을 했다.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잘 양육하고 양가의 부모님을 정성껏 부양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인생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때는 1990년대 후반이라 더 그랬다.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는 청춘을 남들이야 속 편하게 가장 눈부신, 좋은 나이라지만, 아경의 그 시절은 혼란과 방황만이 가득했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죽음은 오래도록 그녀를 힘들게 했다.
어머니를 잃은 상실의 슬픔과 공허가 혹여 배우자를 고를 때 작용해서 잘못된 선택을 할까 아경은 신중했고,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연상시키는 남자는 끔찍했다.
그러니 결혼은 아경에게는 다른 이들에 비해 성취하기 너무 힘든 과제였다.
친구들이 연애를 하고 결혼하는 동안, 아경은 부지런히 결혼식에 가서 축의금을 내고 축하를 해주었다.
시간이 흘러 결혼한 친구들 사이에서 아경은 혼자 비혼이었고, 자연스럽게 친구들 모임에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야만 했다.
남편, 아이들, 시부모 이야기에 그녀가 할 말은 없었다.
친구들조차 자신들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아경을 까맣게 잊고 있는 것 같았다.
<투명인간이 되면 이런 기분이 들까>라고 아경은 생각했다.
헤어질 때 친구들은 아경에게 미안했는지 “얘, 결혼 안 하는 것도 좋아.”라는 빈말을 날려줬다.
한때는 다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이제는 비혼과 기혼이라는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음을 알았다.
아경은 기혼친구들과의 만남을 점점 피하게 되었다.
수 시간동안 한 마디도 못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주변인의 역할은 꽤 고역이었다.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그때 아경은 <시절인연>이라는 것을 처음 생각해보았다.
아경은 결혼한 친구들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동안 다양한 취미를 즐기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여행을 했다.
30대 초반에는 금요일마다 홍대에서 라틴댄스를 배웠다.
아경은 거의 대한민국 라틴댄스가 대중화되는 초창기 멤버에 속했다.
수년을 춤을 추었지만, 타고난 박치에 몸치라 영 실력이 늘지는 않았다.
뭐 그래도 상관없었다.
사람들과 어울려서 이국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수다를 떠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사실 <노인과 바다>의 헤밍웨이를 좋아했던 아경은 쿠바에 가서 살사를 출 계획이었지만, 20여 년째 못 가고 있었다.
아경은 50대의 중년이라도 얼마든지 살사를 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춤을 안 춘지는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아직도 종종 쿠바 아바나의 살사 클럽에서 춤을 추는 자신을 상상하고는 했다.
브에나비스타 소셜클럽에서 라이브 재즈 연주를 듣는 것도 포함되었다.
여름에는 수상스키를 했다.
수영도 못 하면서, 수상스키는 타 봤다.
물살을 가르며 달리는 기분은 짜릿했지만, 체력 소모가 너무 컸다.
아경은 수상스키를 끄는 보트에 앉아서 물방울이 튀어 오르는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질주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겨울에는 스키장 시즌권을 사서 본전을 뽑았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면서 달려가서 리프트가 운행되기 전에 이미 줄을 서고 하루 종일 탔다.
함께 간 M에게 "우리 지금 극기훈련 중인거야?"라고 물을 지경이었다.
30대 중반에는 여행동호회에 가입해서 주말마다 여행을 떠났다.
금요일 퇴근하자마자 회원들과 대형 할인마트에서 장을 봐서 서울에서 여수까지 밤새 달려 향일암에서 해돋이를 보기도 했다.
30대 후반부터는 국내가 아니라 해외로 여행을 떠났다.
아경이 유럽 배낭여행을 떠난 것은 39살 때였다.
안식월이었다.
뒤돌아보면 거의 3년을 주기로 변화가 일어났다.
그렇게 즐거운 시절을 보내다가 사람들이 하나, 둘 결혼을 하거나 개인적 일들로 멀어지면, 또 다른 취미와 사람들을 찾아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갔다.
즐겁고 행복했다.
<시절인연>
아경은 그 단어를 좋아했다.
때가 되어 자연스럽게 소원해져도 그들과 함께 했던 유쾌하고 신났던 추억은 소중히 간직했고 가끔 꺼내보기도 했다.
우리가 함께 한 시절은 참 좋았다.
그 모든 시절을 함께 했던 M도 <우린 운이 좋았어, 참 재미있게 잘 보냈어>라고 공감했다.
아경은 멋진 추억을 만들어 준 수많은 인연들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나이가 들수록 체력은 떨어지고 활동은 동적인 것에서부터 정적인 것으로 바뀌어갔다.
그러다보니 인간관계는 더 느슨하고 가벼워졌다.
그것이 한결 부담이 없어서 편안했다.
반면에 오래 세월 함께 하고 서로를 잘 알아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M을 포함한 소수의 친구들에게는 좀더 정성을 기울였다.
<선택과 집중>
아경의 인간관계에서 그것은 중요한 원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