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돼지해의 한여름 대낮에 태어났다. 돼지해의 기운이 최상이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막상 같은 해에 태어난 동료들과는 그다지 오랜 시간을 같이 하지 못하고 살았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돈벌이를 나간 사이에 네 살 터울의 동생을 돌봐줄 사람이 마땅히 없자 이미 학교를 다니고 있던 언니들과 오빠가 아닌 아직 미취학 아동이었던 내가 동생 돌봄이로 선택되었다. 내가 다섯 살 때 태어난 남동생은 까무잡잡한 피부에 동그란 얼굴과 다른 형제자매들과 달리 큰 눈을 가지고 있는 귀여운 아기였다. 원숭이띠인 오빠, 말띠인 작은언니, 토기띠인 큰언니가 내가 너무 어리다고 놀이에 끼워주지 않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동생이 생긴 것이 나는 좋았다. 드디어 항상 같이 놀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거니까. 그렇지만, 내가 다섯 살 때부터 나름대로 챙기고 돌봐온 그 아기 동생이 다섯 살이 되어서도 여전히 나의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은 조금은 다른 문제였다. 의무교육이 시작되어 여덟 살이 된 동네 아이들은 모두 학교를 들어갔고 나도 여덟 살이 되었으므로 당연히 친구들과 같이 학교를 가는 것이 순서였다. 그렇지만 내게는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안 되는 다섯 살배기 코찔찔이 동생이 있었다. 학교 보내야 할 자식을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부모님의 마음도 편치 않았을 것이다. 그런 부모의 마음을 오히려 다독이고 싶었을까? 다행히 여덟 살 어린아이였던 당시의 나는 잠시 실망하기는 했지만 크게 낙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낙담하는 대신 나는 또래 친구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곧장 그 아이들의 숙제를 도와주며 놀기 시작했다. 학교 간 친구들이 너나없이 가지고 있는 빳빳하고 두꺼운 검은색 겉표지를 덧대 그 안에 여러 장의 갱지를 넣어 묶어 만든 연습장에는 붉은색, 푸른색 등의 색연필로 세모, 네모, 동그라미, 나선, 긴 줄, 짧은 줄 등이 그려져 있었다. 친구의 색연필을 얻어 세모, 네모, 동그라미, 나선, 긴 줄, 짧은 줄을 나도 그려보았다. 그렇게 친구들의 방과 후를 함께 했던 그 한 해 동안, 나는 거의 매일을 친구들의 숙제와 함께 놀았다. 이듬해 봄, 결국 나도 취학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동급생들은 당연히 죄다 쥐띠 동생들이었고 게 중에는 심지어 소띠도 몇몇 섞여 있었다. 먼저 학교에 간 친구들의 숙제를 함께 하며 보낸 일 년 동안 나는 이미 한글의 자음과 모음뿐만 아니라 글을 읽을 수도 있게 되어버렸는데, 그래서 세모, 네모, 동그라미, 나선, 긴 줄, 짧은 줄을 줄 없는 연습장에 그리는 수업시간이 조금은 싱겁고 시시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 공책에 내 색연필로 나의 세모, 네모, 동그라미, 나선과 긴 줄과 짧은 줄을 긋는 나의 수업시간이었고 내 몫으로 주어진 책상과 걸상에 앉아 그 공간의 어엿한 주인공이 되는 시간이었다. 그 모든 것이 아홉 살의 일 학년에게는 퍽 즐거운 일이었다.
소띠 친구는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라 불렸다) 때 가장 친한 친구들 중 한 명이었다. 작은 키에 통통하고 귀여운 얼굴, 항상 바짝 치켜 묶은 말총머리를 하고 다녔던 여자아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주로 감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글씨를 하도 또박또박 예쁘게 써서 선생님들의 사랑을 무척 받았던 감자는 거의 모든 친구들과도 잘 지내는 성격 좋은 아이였다. 내가 감자보다 두 살이 많은 돼지띠였던 데다가 지금 키가 그때 키였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보다 유독 더 작은 감자와 나란히 있는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보였었을지 새삼 궁금하다. 어떻게 보였든, 당시 여자 친구보다는 오히려 남자 친구가 더 편하고 많았던 내게 감자는 몇 안 되는 여자 친구들 중 한 명이었고 같이 어울리는 친구들이 많이 겹쳤기 때문에 대학을 졸업해서까지 서로의 안부를 걱정하며 만나고 지내던 무리 중 하나였다. 그렇게 친하게 지냈지만, 딱 한 가지, 불편한 점이 하나 있었다. 감자의 집에 놀러 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감자의 바로 손위 언니가 나와 동갑내기인 돼지띠였기 때문이다. 제때에 학교에 들어갔다면 감자의 언니가 내 친구가 되었을 것이고 감자는 내 친구의 두 살 어린 동생이니 내게도 동생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다 보니 나는 한해를 늦게, 감자는 한해를 일찍 취학하게 되었고 감자와 친구가 된 나는 감자의 언니에게 ‘야, 너’ 대신 ‘언니’라고 불러야 했던 것이다.
한편, 닭띠 친구도 있었다. 그의 이름은 임동수. 초등학교 입학식 날, 남자아이들 틈에서도 유난히 키가 크고 덩치가 있어 주위에 같이 서 있던 작은 체구의 남자아이들의 긴장이 느껴질 정도였다. 얼핏 보면 일학년이 아니라 육 학년쯤은 되어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역시 당시 일 학년보다 세 살이 많은 닭띠였다. 한 살 어린 동생들과 나란히 입학을 하는지라 나도 엄청나게 설레고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편은 아니었겠지만 동수의 표정은 차원이 다르게 어두웠다. 부리부리한 눈에 큰 코, 크고 두툼한 입술, 다부진 골격. 혹시라도 화를 내며 주먹을 휘두르면 필시 누군가는 나동그라질 것만 같은 분위기마저 느껴졌다. 무엇보다 동수는 웃음기가 하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시 내 등굣길은 마을 어귀를 빠져나와 잠수교를 통해 강을 건넌 뒤 그쪽에 있는 공단 옆 둑길을 삼십여분 걸어가야 했다. 어느 등굣길 아침, 나는 둑 중간 지점에서 공단 쪽으로 내려가도록 나있는 작은 오솔길 끝에 있는 한 천막집에서 동수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닭띠 일 학년. 동수에게도 나처럼 돌봐야 할 동생이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런 동생이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게는 초등학교 다니는 내내 다섯 명의 동생들을 엄마 대신 돌봐야 해서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우리와 놀지도 못하고 곧장 집으로 향하던 친구도 있었다. 이학년 때 내가 다른 학교로 전학을 하는 바람에 2학년 끝무렵부터의 동수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 왠지 종종 동수 생각을 했다. 졸업은 했을까? 중학교에도 진학했을까? 학교를 모두 무사히 마쳤을까? 지금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살아는 있겠지?
살아있으면 된다. 일단 살아있다면 뭐라도 되었을 것이고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을 테니까. 어떻게든 자기의 삶을 살아내는 것, 그것이 각자에게 주어졌고 또 각자 해낼 수밖에 없는 고유의 운명을 만드는 유일한 길이니까. 때로 살아있다는 그런 평범한 운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된 아이들도 생기니까.
당시 내가 살던 그 마을에는 한 해 일찍 학교에 입학한 감자나 세 해나 늦게 겨우 학교에 입학한 동수나 혹은 겨우 한 해 늦었을 뿐인 나와 달리 영영 학교에 가보지 못한 아이도 있었다. 그 아이의 이름… 나는 그 아이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예 몰랐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아이는 아마도 나보다 한 살 정도 어렸거나 아니면 많거나 어쩌면 동갑이었을 것이다. 한 동네에 살면서 이 친구, 저 친구와 놀다 보니 더러는 얼결에 같이 놀기도 했고 그럼에도 딱히 서로를 놀려고 따로 찾을 만큼 친하지 않았던 남자아이.
이제는 기억 속에서 어슴푸레하게 사라져 가는 그날의 계절은 초여름이었던 같다. 모두 가볍게 옷을 입고 있었고 네 살배기 내 동생은 연두색 무늬가 그려진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동생의 손을 잡고 동네 여기저기를 쏘다니고 있는데 그날따라 어른들의 태도가 뭔가 심상치가 않았다. 아마도 동네에서 마을 끝에 난 고가도로 아래를 지나 강으로 흘러가는 개천 어디쯤에서 누군가가 사고를 당한 모양이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져서 동생의 손을 끌고 동네 어귀를 지나 흐르는 물을 막는 작은 제방과 제방 아래 웅덩이가 보이는 길가에 다다랐다. 이미 동네 어른들이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 난 건지 물어볼 어른도 마땅히 보이지 않았지만 나도 다른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얼굴에 걱정 어린 깊은 주름을 만든 채 웅덩이를 바라보았다. 남자 어른 두 명이 아주 기다란 장대를 들고 물속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아마 그 안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지만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인지는 그때까지도 뚜렷하게 짐작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윽고 그중 한 남자가 장대 끝에 걸린 어떤 것을 물 밖으로 꺼내려하고 있었을 때, 내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가 어머 어떡해, 어떡해, 하며 탄식을 뱉기 시작했을 때, 이어 여기저기서 비슷한 탄식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물속에서 찾아진 그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윽고 그 사람이 물 밖으로 꺼내졌을 때, 여덟 살 난 아이가 어쩌자고 그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는지, 어쩌자고 주위에 있던 어른들은 그 아이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려주지 않았는지, 아니 어쩌자고 또 다른 아이는 그 웅덩이 속에 처박혀 있다가 저런 모습으로 나오게 되었는지, 어른들은 죄다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 나는 내 눈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네 살배기 동생의 손을 꼭 잡고 서서 모조리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동네에서 종종 같이 놀았던 남자아이였다. 얼마나 오랫동안 물속에 있었던 것인지 시퍼렇고 싸늘해 보이는 아이의 두 팔은 힘없이 땅을 향해 쳐져 있었다. 아이의 얼굴에는 웅덩이 바닥의 이물질들이 여기저기 붙어있었다. 무엇보다 소스라치게 만든 것은 아이의 입에 아이의 뱃속에서 나온듯한 음식물 같은 것들이 주렁주렁 막대처럼 매달려 있는 모습이었다. 물놀이를 하던 아이는 혼자였는지 아니면 또래 친구들과 함께였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그 아이가 물놀이를 하다가 익사했다는 사실이었다.
언제 그곳에서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언제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동생의 고무신 한 짝이 없어져 있었다. 나는 무언가가 크게 잘못된 느낌이 들었고 그것이 내 책임인 것만 같아 길가에 있던 어린 버드나무 가지 하나를 꺾어 들었다. 엄마에게 이실직고를 해야 한다, 동생의 고무신을 잃어버린 일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다고, 내 눈으로 똑똑히 봐버렸다고 말해야 한다, 그런 뒤 종아리를 몇 대 맞으며 혼이 나고, 혼이 난 다음엔 모든 것이 다시 괜찮아질 것이다, 꼭 괜찮아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고무신 한 짝을 잃어버린 채 내 손을 꼭 잡고 걷고 있는 동생의 손을 더 꼭 잡고 더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그날 저녁, 퇴근해 집에 온 부모님은 내가 해온 회초리를 쓰지 않았다. 혼도 내지 않았고 꾸중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차라리 혼이 났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어쩌면 그 소스라칠 기억을 눈물과 함께 모조리 흘려보냈었을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행히도 혼이 나지 않아서, 펑펑 울어버리지 못해서, 나는 나와 친하지도 않았던 그 남자아이의 모습을 아주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지내게 되었다. 그 기억에는 서러움 같은 것이 내내 함께 묻혀 있었다. 무엇이 서러운 것일까. 그 마음의 정체를 나는 아직도 낱낱이 헤아리기가 어렵다. 아마도 한 번에, 짧은 시간에 다 말하기는 어려운 그런 여러 결의 서러움일 것 같다. 말하기도 어렵고 말한다고 해도 다 말할 수도 없을 것만 같아서 헤아릴 엄두를 내지 않게 된 그런 기억이 갖는 서러움. 그 아이는 무슨 띠의 해에 태어났었을까? 누군가가 그 아이를 돌보아 주어서 그날 웅덩이에서 혼자 그렇게 죽지 않았다면, 그래서 지금도 살아있을 수 있었다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사는 어른이 되었을까?
그 후 몇십 년이 지나 사십 대 후반에 이른 나는, 한 시골마을로 이사를 왔고, 이사 온 마을에 유독 돼지띠들이 많이 와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사 와서 어느 자리에 갔다가 처음 만난 한 돼지띠와는 단지 같은 띠라는 이유만으로 고향 친구 같은 마음이 들어 반말로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되어다. 이후 일을 하다 가깝게 지내게 된 뒷마을 누구도 돼지띠고 언젠가 인터뷰할 일이 있어 오랜 시간 얘길 나눴던 누구도 역시 돼지띠다. 우리 면에서 음식 솜씨 좋기로 소문나 있고 한때 어느 유명한 요리사의 후계자가 될 뻔도 했던 누구도 돼지띠다. 자주 가는 생협 매장 담장자 중에도 돼지띠가 있고 우리 면의 유지인 철물점 사장도 돼지띠다. 철물점 바로 옆에 있는 우리 면의 핫플레이스 음식점 사장도 돼지띠다.
매일같이 보기는커녕 일이 있어야 겨우 얼굴을 보는 사이가 태반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돼지띠들을 만나는 게 좋다.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시대를 살아왔다는 나름의 동류의식이 있어서인 것도 같다. 이 돼지띠들의 살아온 이야기가 궁금해서 일일이 인터뷰를 해보고 싶을 때가 있다.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지 않을 수도 있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흥미롭게 느끼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직 들어보지도 않은 그 이야기들에 이미 감동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럴 수도 있었고 저럴 수도 있었는데 딱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 자체가 나는 이미 충분히 흥미롭다고 느낀다. 무엇보다도 죽지 않고 살아있어서 고맙다.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살던 곳을 떠나 여길 택해 왔는지 궁금하다. 불교에서는 옷깃을 스치는 사소한 인연도 영겁을 들어 말한다는데, 각기 다른 곳에서지만 같은 해에 태어나 살면서 이렇게 같은 마을로 옮겨와 산다는 것은 어쩌면 후달달 떨릴 만큼 굉장한 인연 아닐까? 나는 종교가 없지만 왠지 그럴 것만 같다는 느낌에 보시든 헌금이든 내놓고 싶은 지경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