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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리 May 08. 2022

우리 시대의 공정성은 '역습'을 한다

2022 두산인문극장 강연 리뷰(4/18)

* 이 글은 2022 두산아트센터 두산인문극장 '공정' DO; 에디터 활동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이번 강연을 듣게 된 건 강연의 제목 때문이었다. <공정의 역습 - 우리 시대 청년들의 ‘공정’>. 보는 순간 흥미가 생겼다. 블록버스터 영화에서나 보던 ‘역습’이라는 단어에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고, 이 시대의 청년으로서 나의 동년배들이 공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나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었을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 강연이었다.


공정 감각과 무임승차, 그리고 '공정의 역습'

강연은 우선, 오늘날 청년들의 공정 감각의 밑바탕이 되는 것은 ‘무임승차에 대한 응징’이라고 설명했다. 지난번 4월 11일자 강연에서도 등장했던 ‘무임승차자’에 대한 분노는 보편적이고 본능적인 것이다. 무임승차자를 단죄하려는 마음이 바로 이 시대 청년 세대의 공정 감각의 뿌리가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등장한 예시는 놀랍게도 일베(일간베스트)였다. 일베와 공정은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어 보이지만 사실상 일베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은 그들만의 공정 감각, 즉 그들의 시선에서 사회의 무임승차자들을 단죄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명이 너무나도 설득력 있었다. 일베가 하는 짓을 보다 보면 누구나 한번쯤은 ‘대체 왜 저렇게 당당하지?’하는 의문을 품게 되는데, 그 당당함이 바로 자신들은 공적으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충분히 납득 가능하다. (그렇다고 그 행동들을 옹호하는 건 아니다. 논리적으로 말은 된다는 것이다.)


이 ‘무임승차’를 ‘반칙과 특권’이라는 말로 치환한다면, 오늘날 청년 세대가 기대하는 공정함은 이 반칙과 특권을 용납하지 않고 더 나아가 심판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강연은 여기서 이 ‘공정함’을 2가지로 분류했다.  

공정의 원칙: 경쟁의 결과에 개입하는 반칙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다

공정의 역습: 경쟁의 결과에 개입하는 것은 반칙과 특권이므로 용납하지 않는다

1번 공정의 원칙에 따르면, 경쟁의 결과에 개입한 것이 반칙 또는 특권인지 사안별로 따져보아야 한다. 그러나 2번 공정의 역습에 따르면, 경쟁의 결과에 개입한 것 자체가 반칙과 특권이다. 다시 말해서, 공정의 원칙에 따르면 경쟁의 결과에 개입하는 것은 공정한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공정의 역습에 따르면 개입 자체가 불공정이다.



공정의 역습과 좋은 민주주의

여기까지 보면 공정의 원칙과 공정의 역습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해 보이지만, 조금 더 깊게 파고들면 치명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우선 공정의 원칙은, 모든 사안을 개별적으로 살피고 그것이 반칙과 특권인지 논의하는 과정을 전제로 하므로 좋은 공론장의 바탕이 되며, 이는 좋은 민주주의로 이어진다. 이는 좋은 생태계의 작동 과정 중 하나로 기능한다. 반면 공정의 역습은 모든 사안을 반칙과 특권으로 정의해 버린다. 특별대우란 없어야 하니까! 따라서 논의 과정이 있을 수 없고, 민주주의 또한 ‘제거’된다.


예를 들어, 남녀 간 임금 격차를 줄이려는 정책의 공정성을 논의한다고 해보자. 여기서 무임승차자는 여성이다. 공정의 원칙에 따르면, 이 사안이 정말 무임승차인지 따져보게 되고 그 과정에서 구조적 성차별에 관해 논의할 것이다. 이는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가능성을 제공한다. 반면 공정의 역습에 따르면, 이 정책은 논의할 필요없이 불공정하다. 여성이 더 적은 임금을 받는 것은 구조적 성차별로 인한 문제가 아니라 ‘본인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즉, 공정의 역습은 구조적이고 환경적인 문제, 그러니까 ‘경쟁 바깥 환경’ 자체를 고려하지 않는다. 만약 공정의 역습을 바탕으로 한 사회라면, 더 좋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까? 강연은 틀림없이 그렇지 않다고 설명했다.


자세히 보면 공정의 원칙과 공정의 역습을 정의한 저 두 문장은 몇 글자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의미는 천지차이다. 공정처럼 복잡한 개념을 두 문장으로 정리한 것도 놀라웠는데, 이 문장들이 직관적으로 이해가 된다는 것과 문자 상으로는 아주 작은 차이가 완전히 다른 의미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은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더욱 신기했던 건, 이 두 문장으로 그동안 내가 몸으로 느껴왔던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왜 이 사회는 이토록 편협한지, 이 세대는 이토록 이기주의적인지, 왜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정의 역습과 연대

더불어 강연은 ‘연대’에 관해 아주 신박한 정의를 내놓았다. 연대란 일종의 보험이다. 위험을 감당하는 방식으로서 그 위험을 여러 사람이 나눠 부담하는 것이며, 약자는 그 위험에 먼저 ‘당첨’된 사람이다...라고 설명했다. 다분히 염세적인 시선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아주 효과적인 설명이라고 생각했다. 세상 모두에게 남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자는 이상적인 가치관을 주입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연대를 이끌어내려면, ‘보험을 든다’는 마음만큼 사람이 갖기 쉬운 게 없지 않을까. 그 약자는 언제든 내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공정의 역습은 이 연대와도 관련이 있다. 바로 연대를 해체하는 마음가짐이기 때문이다. 타인과 함께 간다는 연대의 원리는 경쟁의 결과에 어찌됐든 '개입'하는 행동이므로, 공정의 역습 입장에서는 우선 반칙이고 특권이다. 더불어 이렇듯 공정의 역습에 기반한 공정 감각은, 타인을 구체적인 하나의 존재로 인식하지 않고 반칙과 특권이라는 하나의 현상, 관념으로 인식한다. 이는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 때 홍콩 공항에 발이 묶인 일본인 관광객이 당시 상황을 '민폐'라고 발언한 것과, 2022년 장애인들의 이동권 시위를 '방해'라고 여기는 것의 바탕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공정의 역습'을 역습하기 위해서는

강연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되진 않았지만, 공정의 역습은 '근대성'의 일환으로 설명된다. 즉, '근대화'가 진행될수록 이러한 태도는 점점 더 보편화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에 아주 희망이 없는가? 그렇지는 않다. 강연은 '구체적인 삶의 경험'이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강연자가 몸담고 있는 미디어 플랫폼이 진행한 설문 조사 결과를 분석했을 때 공정의 역습이 고려하지 않는 '경쟁 바깥 환경'을 직접 경험하며 그 불균형을 몸으로 체감한 사람일수록, 공정의 역습이 제시하는 공정 감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했다. 역지사지가 답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이 날의 강연은 유난히 내가 빠져들었던 강연이었다. 내가 어떠한 관념을 학문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하기보다는, 이미 연구되고 분석된 것들을 바탕으로 조합하고 적용하며 논리를 쌓아나가는 것에 더 흥미가 있는 사람이어서, 현직 기자님의 강연에 더 재미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막연히 마음으로 느껴만 왔던 사회의 불균형을 정제된 언어로 정리를 당하니(?) 답답함이 해소된 것도 있을 테다. 덕분에 한 가지 확실히 깨달은 건, 이 시대를 살아가며 공정성이라는 관념에게 '역습'을 당하지 않으려면 내가 분명히 깨어 있는 사람이어야겠단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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